유학(儒學)의 흐름과 교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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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儒學)의 흐름과 교회의 역사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9.07.07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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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양림동에도 역사문화마을이 있다. 그 역사문화마을은 1905년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워 말씀을 전하고 병원에서 치료를 하며 학교를 세워 교육하면서 세워진 곳이다.

그곳에는 1905년 배유지(Eugene Bell)선교사가 양림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렸으며, 광주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은 광주, 전남지역의 가난한 환자들과 나병을 치료하였다. 또한 1908년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을 시작하였다.
김찬형 목사
김찬형 목사

교회에서 교인들과 더불어 생활을 하면서 항상 궁금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신앙적인 차이가 지역별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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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이는 지역별로 복음화율의 편차까지 나타나게 했다. 더 나아가 복음 수용 이후에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분들의 지역에서도 그 차이를 나타낸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영남지역의 복음화율은 인구대비 10-13%의 비율이지만 호남지역은 19-26%의 비율로 지역별 복음화율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또한 순교지 역시 다른 지역에 비해서 호남 지역에 편중되어 있다. 혹자는 이런 결과가 6.25전쟁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공산군 점령이 부산을 제외하고 모든 지역에서 있었다. 따라서 순교지 편중에 대한 다른 이유를 검토해야 한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교회성장을 논하면서 선교사가 전해준 복음의 씨앗만을 말하였다. 즉 그 복음이 수용된 토양의 차이를 검토하지 않고 복음화율을 고찰해 왔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복음의 씨앗은 그 토양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난다.

토양과 관련하여, 기고자는 먼저 유학에 주목하였고 더 나아가 이 유학을 지역별로 엄밀하게 구분하여 검토하였다. 기고자의 졸저인 “유학에서 찾은 교회의 성장”에서 그 차이와 이유을 밝혔는데 본 지면에서는 다섯 번으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한다.

1. 관혼상제에 따른 지역적 차이, 2. 내한 선교부의 성향과 선교방법, 3. 1950년대 교단 분열로 본 영호남, 4. 순교지로 본 호남, 5. 3대 장로로 본 영남.

첫 번째로 유학의 관혼상제에 따른 지역적 차이를 보려고 한다.

유학에서 심성문제는 사단(仁義禮智) 칠정(喜怒哀樂愛惡慾)으로 사람의 내면적인 기질이 드러난다고 하였다. 사단 칠정은 개념적이고 논리적으로 리발(理發)과 기발(氣發)의 존재로 구분하였다. 퇴계가 말하는 사단은 순수하게 선한 것으로 선악이 결정되지 않은 칠정과 섞어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은 기보다는 이를 우위에 두려는 경향으로 기발을 따르는 기호학파와 충돌하였으며 후기로 갈수록 이를 중시하였다.

율곡은 이기지묘(理氣之妙)로 이와 기가 하나로 존재하기에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기발이승(氣發理乘)을 주장하면서 퇴계와 달리 이발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남명 조식은 13차례나 관직에 제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적 학문인 의(義)를 중시하는 입장의 남명학파가 되었다.

영남유학은 퇴계학파가 경상좌도를, 남명학파는 경상우도을 기반으로 학맥을 이루었다가 인조반정이후 남인의 퇴계학파가 중심이 되어 영남지역을 대변하고 있다. 서인의 율곡학파는 기호지역인 경기, 충청, 호남지역을 포괄하고 있지만 본란에서는 호남으로 좁혀서 보고자 한다.

유학의 지역적인 특색을 알기 위하여 깊은 내용의 전개보다는 나타난 현상을 중심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사람과의 바른 관계를 만들기 위하여 제정된 예학의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살펴보려고 한다.

관혼상제에서 관례는 소년이 성인이 되면서 사회가 그들에게 새로운 지위를 관례 의식을 행하여 사회에 참여하게 하였으나 현재는 유명무실해져 있다. 결혼식의 혼례는 전통식보다 서양식을 선호하고 있어 관례와 혼례에서 유학의 정신을 찾기 어렵다.

관례와 혼례가 있고 사람의 죽음에서 장사지낼 때까지 상례와 돌아가신 후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제례가 있다. 현대사회까지 전해져 통용하는 상례와 제례는 아직도 유학의 예학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상례문제로 조선시대 예송논쟁을 들수 있다.

조선시대의 상례문제로 2차에 걸쳐 격렬한 논쟁을 벌인 예송논쟁은 지역에 따른 정치적인 입장차이를 남인과 서인으로 명확하게 보여주었던 사건이다. 예송논쟁은 1659년 효종과 1674년 효종비가 죽은 뒤 대왕대비가 상복을 1년 입어야 하는지 3년 입어야 하는지의 문제였다.

이는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가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혔다가 9년만에 귀국하여 죽은 뒤 적장자(嫡長子)인 석철이 있음에도 차남인 효종이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남인은 효종이 왕자례불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로 종법(宗法)이 천리(天理)를 따르지만 왕자는 서민과 달라 차남이지만 장남으로 보아 3년상을 치른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서인은 종법은 천리로 차남이 왕이 되었어도 변할 수 없는 차남이기에 1년상을 주장하였다. 예송논쟁은 예학을 둘러싸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남인과 서인의 치열한 정치적인 주도권 싸움이었다.

예학에서 남인은 퇴계 이이를 중심으로 전통예학인 주자가례를 따랐다. 서인은 주자가례에서 가례집람(1599년)과 사례편람(1844년)으로 시대에 따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가례에서 남인은 주자가례를 따르는 일관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서인은 시대의 정신에 따라 가례집람, 사례편람으로 변화를 수용하였다. 가례의 일관성과 수용성의 지역적 특색이 교회에서도 자리잡고 있다.

상례와 제례는 지역적으로 절차를 다르게 지내고 있다. 상례에서는 탈관(脫棺)의 경우와 제례에서는 제사 대상자를 쓴 지방(紙榜)에서 가장 크게 대별될 수 있다. 상례에서 영남과 일부 지역에서는 하관시 탈관을 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하관시 탈관을 하지 않고 있다.

제례에서 지방을 쓸 때 관직이 없는 경우 영남지역은 ‘처사’(處士)를 사용하고 호남지역은 ‘학생’(學生)을 사용한다. 현재는 1969년 정부에서 허례허식 탈피를 위하여 제정한 가정의례준칙에서 채택한 학생이 보편적이지만 영남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처사를 사용하고 있다.

현대 사회는 유학이 아니라 4차 산업시대로 과학의 문명에 살고 있는데 유학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말을 한다. 그러나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정에서도 가족간에 지키는 예의범절이 있다.

예의범절은 가정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부모가 자기의 부모에게 배워 습득한 것을 자기 자녀에게 가르치면서 가정교육을 하기 때문에 어느 지역에 사느냐 보다 부모가 어느 지역의 교육을 받았느냐로 자녀를 가르치고 있다.

지역별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지역색이라는 부정의 의미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색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존재하여 성경에서도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딛1:12)라고 하지만 그 지역색을 인정하고 수용하면 부정의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2. 내한 선교부의 성향과 선교방법

지난번에는 영남과 호남의 유학적 다름이 지금까지 남아 생활 속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그 차이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한 선교부의 선교방법과 성향에 따른 지역과의 연합을 보려고 한다. 이에 대한 것도 결코 작지 않은 많은 것을 논해야 한다.

지면의 제약으로 여러 교파 중에서 장로교를 중심으로 그 가운데에서도 영호남지역으로 좁혀서 보려고 한다. 지방자치제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지역을 새롭게 정의하여 지역의 자부심을 찾는 지방이 늘어나고 있다.

영남 지역의 대구 청라언덕과 부산 좌천동, 호남 지역에서 광주 양림동 역사문화마을을 보면, 우리나라 선교초기 유형인 교회와 병원과 학교를 세우며 말씀을 전하고 치료하고 교육한 모습이 동일한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구 청라언덕에는 대구제일교회와 제중원과 계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1893년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가 대구제일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하였고 1899년 선교사들이 제중원(현 동산의료원)에서 의료 선교를 하였으며 애락원에서는 나병을 치료하였다. 1906년 계성학교를 대구제일교회 내에서 세우고 교육하였다.

광주 양림동에도 역사문화마을이 있다. 그 역사문화마을은 1905년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교회를 세워 말씀을 전하고 병원에서 치료를 하며 학교를 세워 교육하면서 세워진 곳이다.

그곳에는 1905년 배유지(Eugene Bell)선교사가 양림교회를 세우고 예배를 드렸으며, 광주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은 광주, 전남지역의 가난한 환자들과 나병을 치료하였다. 또한 1908년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을 시작하였다.

또한 대구 청라언덕과 광주 양림역사문화마을에 흩어져 있는 선교사가 생활하였던 공간인 서양식 사택은 지하층과 지상 2층의 비슷한 형태로 지하층은 창고와 보일러실, 1층은 거실, 가족실, 다용도실, 주방, 욕실과 2층은 침실 등으로 건축되어 서양의 문물을 접하게 되는 새로운 공간의 역할을 하였다.

부산 좌천동에서 호주선교부는 1891년 부산진교회와 1895년 일신여학교를, 1952년 일신부인병원(현 일신기독병원)을 각각 설립하였다.

1884년부터 1897년까지 공식적으로 내한한 장로교 선교부의 성향을 구분해보면 호주 선교부가 가장 보수적이었고 캐나다 선교부가 진보적이었다.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와 남장로교 선교부는 그 중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내한 선교부는 선교지역의 중첩을 피하고 효율적 선교를 위하여 예양협정을 맺으며 지역분할정책을 수립하였다.

그 결과 결정된 선교지역은 가장 보수적인 호주선교부가 부산, 경남지방을 담당하였는데 이 지역은 지금도 장로교에서 가장 보수적인 고신교단의 70%가 중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지역이다. 부산 경남지역은 북장로교 선교부와 1889년 입국한 호주선교부가 선교하다가 1909년 예양협정으로 경남지역은 호주선교부가 전담하고 부산은 공동으로 선교하다가 1913년 부산까지 호주 선교부가 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캐나다 선교부는 개방적인 함경도 지역을 맡았다. 함경도 지역을 개방적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언급도 하지 못하였던 여자장로 안수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1933년 함남 여전도회 연합회는 103명의 청원을 받아 1934년 제22회 교단 총회에 정식으로 헌의하였다.

함경도 지역 캐나다 선교부는 1953년 신학을 받아들이는 폭의 문제로 분열된 한국기독교장로교와 손을 잡고 1955년 5월 제41회 총회에서 여자장로제도를 채택하였기에 같은 성향의 개방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해방이후 우리나라 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진영간 갈등이 치열하게 나타났다. 캐나다 선교부는 진보적인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와 연합하여 1955년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와 새롭게 선교협력하기로 하였다.

현재 기장 교인의 40%가 수도권보다 호남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도 진보적인 캐나다 선교부와 호남지역과 비슷한 사유를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각국 내한선교부와 선교지로 분할된 지역의 성향이 비슷한 가운데 선교가 시작되었다.

당시 내한 각 선교부가 사용하던 선교방법으로는 네비우스 선교방법에 따른 지역 분할과 순회전도, 사랑방과 집구경, 사경회 등의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네비우스 선교방법은 자진전도, 자력운영, 자주치리를 개념으로 한국장로교 선교부 공의회가 예양협정을 맺고 지역별 선교를 하였다.

선교 지역은 유학의 지역적 바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에 토양의 차이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영남의 사단(仁義禮智)에서 이(理)와 의(義), 호남의 칠정(喜怒哀樂愛惡慾)에서 기(氣)가 발동하고 있다.

호주선교부와 동역을 한 고신측은 경상좌도의 이황과 다른 경상우도로 남명 조식의 영향을 받았다. 남명 조식은 선조의 부름에도 출사하지 않고 처사(處士)로 생활하였으며, 실천없는 지식을 배격하고 의(義)를 지향하여 국난에는 의병으로 애국하였던 보수적인 색이 강한 지역이었다.

이런 지역성이 신사참배반대를 위하여 평양과 전국적으로 다니며 어느지역보다도 강한 역동성을 지녔기에 이 문제가 경남노회 중심으로 고신측 교단이 분열하게 되었다.

기장은 학문에서 신신학(新神學)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보수교단과 분열되었다. 분열되고 캐나다 선교부와 손을 잡은 기장은 기가 발동하는 역동성과 수용성이 캐나다 선교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기장의 40%가 호남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것을 보면 호남의 학문적 수용성은 역동적인 기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호남은 상례와 제례처럼 변화를 받아들여 생활에 맞게 고치려는 역동과 변화를 수용하는 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각 선교부가 자리잡았던 대구 청라언덕과 광주 양림역사문화마을, 부산 좌천동 지역에서 보듯이 복음을 직접 전하는 교회와 육영사업을 통한 학교, 건강을 돌보기 위한 병원을 설립하며 전도하였다. 이처럼 각 선교부의 선교는 대동소이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각 선교부가 비슷한 방법으로 선교하였음에도 영남의 교세와 호남의 교세가 약 10%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은 유학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로 볼수 있다. 즉 이것은 유학의 지역성이 함유되어 있는 토양(밭)이 기독교의 복음을 수용하는데 다르게 작용하여 열매를 맺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1950년대 교단 분열로 본 영호남(0603)

지난번에는 대구 청구언덕과 부산 좌천동, 호남 양림역사문화마을에서 보듯이 교회, 학교, 병원을 기반으로 하는 선교방법이 대동소이했다. 그럼에도 영남과 호남에서 10%이상 복음화율의 차이가 나는 것은 유학에 따른 퇴계 이황은 경상좌도(경북), 남명 조식이 경상우도(경남), 율곡 이이가 호남에 영향을 주었음을 보았다.

이번에는 1950년대 장로교 분열이 지역적 배경에서 이루어졌음을 살펴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1950년대 장로교의 분열은 신사참배로 인한 신앙의 문제로 고신측, 신신학의 수용문제로 기장측, W.C.C. 연합기관의 가입문제로 통합과 합통이 분열되었음은 자명하게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는 더 나아가 1950년대 분열이 지역성을 따라서 분열되었으며 그 결과 분열로 인한 지역성 결집의 상승작용으로 복음이 활발하게 확장되었다.

1940년대는 일제의 신사참배문제가 절정을 이루었으며 이에 대한 교회의 반발이 거세었다. 특히 경남지역의 목회자들이 전국적으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경상우도의 남명 조식학파는 임진왜란에서 많은 의병이 일어나 왜적을 물리치는데 앞장섰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어느지역에서보다 강하게 행동하였다. 남명학파는 경의지학(敬義之學)사상으로 국가의 어려움이 있을 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였던 인물들은 주기철(경남 밀양), 주남선((경남 거창), 이기선(평북 박천), 한상동(경남 김해), 이주원(경남 밀양), 주남선(경남 거창), 손양원(경남 함안)이며 대부분 경남 지역성이 두드러지고 있다.

참배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음에도 유독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신사참배반대운동이 이루어진 것을 주목해보았다. 그리고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고신측이 분열되었다. 고려파로 분리되어 60년이 지난 2018년 고신측 통계를 보면 경남 23%, 부산 23%, 울산 7%를 차지하여 현재도 전체교인의 53%를 차지하고 있다.

어느 시기에는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상존하였다. 사전적 의미로 보수는 역사적 기독교의 본질적인 신앙과 교리를 옹호하며 지키는 것이며 진보인 자유주의는 인간의 주체적인 사고와 활동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에서 기독교 해석의 궁극적인 권위를 성경보다는 이성에 두며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하고 기독교를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진 것이다.

1938년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신학교의 휴교로 1940년 신학적 자유를 표방하는 조선신학교를 둘러싸고 경기노회에서 김재준 목사를 제명하면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분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해방이후 남한에는 하나밖에 없는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성경의 절대무오설에 대한 태도를 명백히 밝혀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시작되었다.

김재준은 함경도 경흥에서 태어났으며 함경도 지역은 캐나다 선교부가 파송된 지역으로 선교사들의 자유주의적 성향으로 다른 지역에 비하여 자유주의 신학이 일찍 형성되었으며 그들의 여향을 받고 자라 조선신학교를 설립한 함경도 출신의 신학자와 교역자들이 있었다. 또한 1934년 함남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여성안수를 총회에 헌의한 것을 보아도 사고의 자유로움을 알 수 있다.

1953년 기장이 분열하고 김재준과 뜻을 같이한 함경도 및 호남지역 지역중 특히 군산 목포지역 목회자들이 참여하였다. 분열당시 기장은 호남지역에서 45%의 교회가 있으며 세례교인은 49%를 차지하였다. 2017년 교회수를 보면 전북 21%, 전남 17%로 호남에서 38%는 분열 당시보다 약 7%가 빠졌지만 서울, 경기 29%보다 여전히 높은 분포를 차지하고 있다.

율곡학파는 기호학파라고도 하는데 기호는 경기와 호남을 지칭하는 말이다. 퇴계가 리의 본질을 중심으로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말한다면 율곡의 기는 현상학적 경험에서 사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의 문제를 사물의 재료를 뜻하는 현실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현실에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호남지역 역사를 살펴보면 현실적으로 부딪치면서 살아온 역사가 점철되어 있다. 고려시대 훈요십조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장 강력하였던 동학은 반외세적이며 자주적 의식아래 현실에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건이다. 동학의 자주의식과 현실속의 실재 참여정신이 기장의 신앙양심과 자유와 의존사상을 배격한다는 ‘기장성’이라는 중심사상과 연결되고 있다.

1959년 마지막 분열인 통합과 합동의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한국전쟁 시기에 세계교회협의회가 공산주의를 용납하는 용공적이라는 문제와 박형룡 교장의 대지 불하사건의 주도권 문제였다. 이러한 논란에서 평안도 주류가 통합으로, 황해도 주류는 합동으로 움직였다. 혼란기 정확한 교단의 통계가 나타나지 않지만 1960년 12월 6일 기독공보의 교단별 교세통계표에는 경북노회의 272개 교회 가운데 통합 119개, 승동 129개, 고려 20개, 중립 4개로 나타난다.

영남지역은 병호시비(屛虎是非)처럼 주도권의 문제가 있었다. 병호시비는 퇴계를 주향으로 하는 여강서원을 건립하면서 퇴계의 양대 제자인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위패중 누구를 왼쪽에 모셔야 하느냐의 문제로 대결한 사건이다. 서애는 나이는 어리나 품계가 높았으며 학봉은 나이가 4살 많았으나 품계가 낮아 문제가 되었지만 우복 정경세가 서애를 상석으로 모시는 것으로 하였다.

200여년이 지난 1805년 한양의 문묘에 서애, 학봉, 정구의 종사를 나이순으로 청원하다가 기각당하자 병산서원은 호계서원과 절연하고 퇴계는 도산서원, 학봉은 임천서원, 서애는 병산서원으로 각각 배향하였다. 그후 경상북도에서 호계서원 복설추진위원회에서 상석에 서애를 배향하고 학봉위패옆에 대산 이상정은 추가하여 우배향하는 것으로 2013년 5월 15일 합의하여 400년간 이어진 위패 다툼을 마무리하였다.

퇴계학파는 사물의 원리와 이치를 중시하는 리를 중심으로 하였기에 병호시비에서 누가 우위를 점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하였다. 이처럼 교권의 주도권 문제가 연합의 문제에서 세계교회협의회의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여 통합과 합동의 분열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점에서 1950년대 교단의 분열은 표면적으로 신앙의 문제, 신학의 문제, 연합의 문제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지역성에 따른 분열이며 그 지역성은 지금까지 각 교단의 특성으로 남아있다.

김찬형 목사는 서울 한성고등학교 졸업,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과 졸업(Th.B)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교역학석사, M.Div.)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교회사 전공) 졸업 (신학석사, Th.M.) 연세대학교 대학원(한국교회사 전공) 졸업(철학박사, Ph.D)

-교회사역 

신촌교회(서울서노회) 전임전도사, 서울 서노회 목사 안수,신촌교회 부목사, 선임부목사,현재 영광교회(서울서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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