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교단 분열로 본 영-호남. 글 : 김찬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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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교단 분열로 본 영-호남. 글 : 김찬영 목사
  • 목장인터뷰뉴스 박동현 기자
  • 승인 2019.07.07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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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강요한 것으로서,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제는 합방 후 신사사원규칙을 발표, 서울에 조선신궁을 세우는 한편, 각 지방에 신사를 세웠다.
신사(상징건물)에 절하는 사람들. 성경은 못하게 명령으로 정하고 있다.
신사에 절하는 사람들. 성경은 다른신에게 절을 금하고 있다.

지난번 대구 청라언덕과 부산 좌천동, 호남 양림역사문화마을에서 교회, 학교, 병원을 기반으로 하는 선교방법을 볼 때 선교방법이 대동소이하여 큰 차이가 없음을 고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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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남과 호남에서 10%이상 복음화율의 차이가 난다. 그 요인으로 유학에 따른 퇴계 이황의 경상좌도(경북), 남명 조식의 경상우도(경남), 그리고 율곡 이이의 호남에 미친 영향에서 비롯되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1950년대 장로교 분열을 통하여 유학의 다름을 검토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1950년대 장로교의 분열은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로 고신측, 신신학의 수용문제로 기장측, W.C.C. 연합기관의 가입문제로 통합과 합-통이 분열되었음은 자명하게 알려져 있다.

사실상 1950년대 장로교 분열은 지역성을 따라서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분열된 결과로 각 장로교는 지역적 결집을 이루어 복음이 활발하게 확장되었던 것이다.

1940년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두고 한국교회는 찬반으로 나뉘어져 분열의 자충수를 두었다. 특히 경남지역 목회자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적극적인 것은 이유가 있었다.

남명 조식학파가 살았던 경상우도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대항하기 위해 많은 의병이 일어났었다. 그런 역사적 경험은 일제 강점기에 종교적이기는 하지만 신사참배를 용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명학파는 경의지학(敬義之學)사상으로 국가의 어려움이 있을 때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의병장을 배출하였다. 그런 신념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신사참배 반대 한 주요 인물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장로교회 분열 도표
한국장로교회 분열 도표

주기철(경남 밀양), 주남선(경남 거창), 이기선(평북 박천), 한상동(경남 김해), 이주원(경남 밀양), 주남선(경남 거창), 손양원(경남 함안) 등이다. 두드러지게 경남과 연관이 있다.

전국적으로 신사참배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경남지방을 중심으로 신사참배반대운동이 이루어진 것을 주목해보아야 한다. 그 결과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고신측이 분열되었다. 고려파로 분리되어 60여년이 지난 2018년 고신 측 통계를 보면 경남 23%, 부산 23%, 울산 7%를 차지하여 현재도 전체교인의 53%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1938년 신사참배 반대로 평양신학교는 휴교하게 된다. 그런데 1940년 신학적 자유를 표방하는 조선신학교를 둘러싸고 경기노회가 김재준 목사를 제명하면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분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해방이후 남한에는 하나밖에 없는 조선신학교에서 김재준 교수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불만을 가진 학생들이 성경의 절대무오설에 대한 태도를 명백히 밝혀달라는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하면서 또 다른 분열이 시작된다.

김재준은 함경도 경흥에서 태어났으며 함경도 지역은 캐나다 선교부가 파송된 지역이다.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유주의적 성향을 띠었고, 다른 지역에 비하여 그곳 역시 자유주의 신학이 일찍 형성되었다.

조선신학교를 설립한 함경도 출신의 신학자와 교역자들 중에는 그들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있었다. 1934년 함남노회 여전도회연합회가 여성안수를 총회에 헌의한 것을 보아도 사고의 자유로움을 알 수 있다.

1953년에 기장이 분열하고, 그 기장에는 김재준과 뜻을 같이한 함경도 및 호남지역 지역중 특히 군산 목포지역 목회자들이 참여하였다. 분열당시 기장은 호남지역에서 45%의 교회가 있으며 세례교인은 49%를 차지하였다. 2017년 교회수를 보면 전북 21%, 전남 17%로 호남에서 38%는 분열 당시보다 약 7%가 빠졌지만 서울, 경기 29%보다 여전히 높은 분포를 차지하고 있다.

율곡학파는 기호학파라고도 하는데 기호는 경기와 호남을 지칭하는 말이다. 퇴계의 ‘리’(理)의 본질을 중심으로 사물의 이치와 원리를 말한다면 율곡의 기(氣)는 현상학적 경험에서 사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의 문제를 사물의 재료를 뜻하는 현실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즉 현실에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한국장로교회 분열연대
한국장로교회 분열연대

이런 배경으로 호남지역 역사를 살펴보면 현실적으로 부딪치면서 살아온 역사가 점철되어 있다. 고려시대 훈요십조에서부터 시작되어 가장 강력하였던 동학은 반외세적이며 자주적 의식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사건이다. 동학의 자주의식과 현실속의 실재 참여정신이 기장의 신앙양심과 자유와 의존사상을 배격한다는 ‘기장성’이라는 중심사상과 연결되고 있다.

1959년 마지막 분열인 통합과 합동교단에서는 표면적으로는 한국전쟁 시기에 세계교회협의회가 공산주의를 용납하는 용공이라는 문제와 박형룡 교장의 대지 불하사건으로 표면화 하였다.

이러한 논란에서 평안도 주류가 통합으로, 황해도 주류는 합동으로 움직였다. 혼란기 정확한 교단의 통계가 나타나지 않지만 1960년 12월 6일 기독공보의 교단별 교세통계표에는 경북노회의 272개 교회 가운데 통합 119개, 승동 129개, 고려 20개, 중립 4개로 나타난다.

영남지역은 병호시비(屛虎是非)처럼 주도권의 문제가 있었다. 병호시비는 퇴계를 주향으로 하는 여강서원을 건립하면서 퇴계의 양대 제자인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의 위패중 누가 우선하느냐의 문제로 대결한 사건이다. 서애는 나이는 어리나 품계가 높았으며 학봉은 나이가 4살 많았으나 품계가 낮아 문제가 되었지만 우복 정경세가 서애를 상석으로 모시는 것으로 하였다.

200여년이 지난 1805년 한양의 문묘에 서애, 학봉, 정구의 종사를 나이순으로 청원하다가 기각 당하게 된다. 그러자 병산서원은 호계서원과 절연하고 퇴계는 도산서원, 학봉은 임천서원, 서애는 병산서원으로 각각 배향하였다. 그후 경상북도에서 호계서원 복설추진위원회에서 상석에 서애를 배향하고 학봉위패 옆에 대산 이상정을 추가하여 우배향하는 것으로 2013년 5월 15일 합의하여 400년간 이어진 위패 다툼을 마무리하였다.

퇴계학파는 사물의 원리와 이치를 중시하는 리를 중심으로 하였기에 병호시비에서 누가 우위를 점하느냐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였다. 이처럼 교권의 주도권 문제가 연합의 문제에서 세계교회협의회의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여 통합과 합동의 분열로 이어진다.

이런 점에서 1950년대 한국 장로교단의 분열상은 표면적으로 신앙의 문제, 신학의 문제, 연합의 문제이지만, 그 이면인 내면적으로는 오랜 지역성에 따른 분열이며, 그 지역성은 지금까지 각 교단의 특성으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사참배 강요(神社參拜強要)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운 뒤 조선인에게 참배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가리킨다.

신사참배는 신토의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이다. 종교의 교리가 신사참배와 충돌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신사참배 강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저항하다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통합 합동 로고(영어로는 같은 뜻이 된다)
통합 합동 로고(영어로는 같은 뜻이 된다)

신토는 조선에 1876년 개항 이래 문화 침략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보호 아래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면서 점차 강제적인 정책으로 변화했다. 일본 천황 신격화와 강제 신사참배는 조선을 정신적으로 지배함으로써 효율적인 식민 통치와 전쟁체제의 구축을 노린 것이었다.

1930년대 경성소방서 직원 신사참배 추진 과정

일제는 각지에 신사(神社)를 세우고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여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주로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같은 정책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에는 개화기 이래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들이 다수 있었고, 우상 숭배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신사 앞에서 절하는 신사참배 의식과 충돌을 낳았다.

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1935년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에 신사참배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면서 큰 갈등이 시작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무렵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일부 학교를 폐교시키면서까지 신사참배 강행 의지를 보여 문을 닫지 않은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실시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시키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했고,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이 솔선해 신사참배에 나서면서 급격히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의 강경론자인 주기철, 최상림이 옥사하는 등 희생자도 발생했다. 한편 평양에 있던 기독교 계열의 숭실대학은 1912년 11월 25일,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학교 인가를 했으나,[1] 1925년 대조선 교육방침(소위, 문화 통치)으로 숭실대학교를 전문학교로 격을 낮추었다.

1938년 3월 4일, 일본 제국의 억압적인 통치와 강제적 신사참배에 반대한 숭실전문학교는 자진 폐교 결정을 내린다. 신사참배와 친일활동을 했던 당시의 다른 대학들에 비교해 볼 때 이는 진정으로 민족을 위한 대학이었다는 평가가 의식있는 국민들로부터 제기되고 있다. [주 1]

신사참배에는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 등 다른 종교 성직자와 신자들도 참여해야 했으나, 상대적으로 마찰은 적었다.

위의 글 : 김찬형 목사
위의 글 : 김찬형 목사

아래는 편집자 추가 

신사참배는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강요한 것으로서,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신도(神道, Shintoism)의 사원으로 일본 왕실의 조상신이나 국가 공로자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일제는 합방 후 신사사원규칙을 발표, 서울에 조선신궁을 세우는 한편, 각 지방에 신사를 세웠다.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1935년경부터인데, 우선 각급학교 학생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으나 기독교계 학교에서는 이를 거부하다가 평양 숭실학교·숭의학교 등이 폐교되었고 학생·선교사·목사들의 반대운동은 계속되었으며, 주기철 목사와 같이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순교한 일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중일전쟁(1937∼1945년)을 전후하여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재차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천주교는 로마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에 응했고, 감리교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장로교는 한때 반대했으나, 총독부의 요구와 일부 친일목사들에 의해 제27회 총회에서 찬성결의를 함으로써 결국 굴복했다. 1945년 8월 15일 제국주의 야욕의 일제가 패전으로 종전되었지만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등 문제와 논란이 발생되고 있다.

신사참배에 기독교계 전체가 공식적으로 동원된 것은 그 후유증이 상당히 컸다. 일제 패망 후 며칠만에 신사를 불태워 버렸을 만큼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사참배에 앞장선 이들이 법적 책임을 지는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후에 이로 인한 상처를 씻기 위해 공산주의를 사탄으로 삼는 지나친 반공주의와 보수주의적 흐름이 나타났을 정도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있다.

2006년 대한민국의 소장파 목회자들이 모여 결성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가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한 일과 독재정권 시절에 권력층과 야합해 정의를 뒤엎기도 한 죄악에 대해 마음을 찢으며 참회한다" 내용으로 반성문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교단 차원의 공식적인 인정이나 참회는 현재까지 하지않고 있다.

참고자료

최덕성 (2006년 3월 30일). 〈III. 주기철과 장로회신학대학교〉.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 서울: 지식산업사. ISBN 9788951108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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