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조선왕조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당신은 김씨나 이씨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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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조선왕조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당신은 김씨나 이씨가 아니다.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9.07.18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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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문제가 좀 있다. 미안하지만 절반, 아니 절반 정도가 아니라 우리들 태반은 가짜 성씨고 가짜 족보다. 타인의 족보를 훔치고 타인의 성을 슬쩍 훔쳐 살아 온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김, 이, 박뿐만 아니라 최씨, 정씨를 비롯하여 여타의 성도 모두 마찬가지다.
사진 : '노컷 조선 왕조 실록' 책커버
사진 : '노컷 조선 왕조 실록' 책커버

당신의 성이 무엇인가? 김씨, 이씨, 박씨인가? 그리고 족보를 보면 김수로왕이랄지 박혁거세랄지 세종대왕이랄지 그런 왕가나 명문 대감의 몇 대 자손으로 표기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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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문제가 좀 있다. 미안하지만 절반, 아니 절반 정도가 아니라 우리들 태반은 가짜 성씨고 가짜 족보다. 타인의 족보를 훔치고 타인의 성을 슬쩍 훔쳐 살아 온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김, 이, 박뿐만 아니라 최씨, 정씨를 비롯하여 여타의 성도 모두 마찬가지다.

사실 요즘 세상에 그런 것들은 별 상관도 없는 문제지만 이런 거북한 이야기부터 펼쳐 볼까 한다. 당신의 성씨도 가짜고 족보도 가짜며 당신은 그런 왕가의 자손이기는커녕 상놈의 피가 흐르는 천한 신분이다. 그렇게 떠들어 댄다면 아마 명예훼손이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유감천만이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별 수가 없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우선 조선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라도 이런 허물부터 한 꺼풀 벗겨 보고자 한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은 다시 말하지만 대부분 가짜다. 왜냐하면 조선 시대 백성들은 왕족이나 권문세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성이란 것도 없이 그저 어느 고을에 사는 춘삼이, 막동이, 일남이, 이남이, 돌쇠, 개똥이, 오월이, 사월이, 그런 식으로 불리고 살았다.

성종 당시의 이름을 보면 효양, 자질금, 말동, 합이, 내은산, 자근, 약중, 철근 등이 나오는데 모두 한문 이름이다. 성은 없어도 이름은 한문으로 지은 경우도 많았던 듯하다.

태종 시절에는 조정 대신들도 성 없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고려 왕씨를 멸족시키는 과정에서 태조는 특별히 공이 많은 상장군 왕우의 두 아들은 노씨로 바꿔주기도 했다.

왕씨 외에도 고려에서 득세했던 귀족들 성씨 역시 사멸되었다. 왕씨들은 바다에 끌고 나가 수장시켜버리고 여타의 주요 귀족들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요행히 살아남은 왕씨들이 옥씨, 전씨로 성을 바꿨다고 하지만 아예 성을 쓰지 못했다는 설이 더 정확하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전체 백성들 중에 성을 가진 사람들은 특수 사대부층에 불과했으니 그 숫자야말로 아주 미미했다. 기본적으로 좁은 곳에서 서로 사는 것이 빤할 터인데 네가 어째서 성씨가 생겼느냐 추궁하면 변명할 길이 없었던 탓으로 대부분의 백성들은 오랫동안 성씨가 없었다.

병자호란 직후 왕이 내린 전공 유공자 전지를 봐도 장군의 이름이 막동이로 되어 있는 등 직접 뒤적여본 그 유지에는 성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풍양 조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조맹도 처음에는 이름이 그냥 바위였다. 그러다가 고려가 건국되면서 조라는 성을 하사받고 이름도 그에 맞게 맹이라 고쳤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대략 인구의 10퍼센트 미만 정도만 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수치는 왕족과 고위 관리들, 공개적으로 족보를 가진 가문의 숫자다. 10퍼센트 미만이라고 한 것도 최대로 잡은 것이다. (조선 시대 경상도 최대의 행정구역이었던 울주 언양의 호적대장 연구에 보면 공개적으로 성씨를 가질 수 있었던 양반들의 숫자는 1할 미만이었다. <#2. 우리는 십중팔구 상놈의 자손이다> 참조).

그러다가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늘어났다. 왕이 하사했든 어떻든 우선 관직이 있는 사람들은 성을 붙였지만 그 숫자는 미미했다. 인구 증가에 따라 조금씩 늘어나다가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템포가 빨라진 것은 조선 중엽부터다.

성도 없이 그럭저럭 살다가 임진왜란이 한번 휩쓸고 간 뒤부터 성이 부쩍 늘어난 것인데 정치건 제도건 엉망이 되면서 돈만 내면 벼슬을 주는 공명첩(왕이 내리는 관직 임명장. 벼슬만 적혀 있고 이름은 비어 있어서 마음대로 자기 이름을 기입할 수 있었다)이라는 제도까지 생겼다. 돈만 내면 하루아침에 쌍놈도 양반이 되고 벼슬자리까지 얻는다는 것이니 이런 호기회가 어디 있을 것인가.

결국 돈이 있으면 양반, 없으면 쌍놈, 그런 등식을 오히려 국가에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당연히 논 팔고 살림 팔아서 성을 얻는 자가 늘어났다. 당시 국가는 3년마다 호적을 정리했는데 그때마다 성을 가진 인구들이 부쩍 늘어났다.

성이 생긴 것은 그 고을의 호적대장에서 확인된다. 상놈이 호적에 성씨를 올리면 그다음 단계는 자연스럽게 양민 행세를 하고자 할 것이고 비록 벼슬을 못 한다 쳐도 양반 족보에 끼어서 양반 행세를 하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런 식으로 점점 성을 취득한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나라가 망한 뒤 일제 치하에서 1909년 민적법이라는 것이 생기고 그때에는 전국적으로 한 사람 빼놓지 않고 모두 성을 얻었다. 성이 없는 백성들이 모두 가짜 성을 만들었다.

조선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이 김씨고 그다음이 이, 박, 최, 정씨 순이다. 근래의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인구의 21퍼센트 정도가 김씨인데 약 1,000만이며, 이씨는 680만으로 15퍼센트 정도이니 두 개의 성씨를 합하면 전 인구의 35퍼센트가 김씨와 이씨다. 그다음으로는 박씨가 390만 정도, 최씨 210만, 정씨 200만 정도이고 강, 조, 윤, 장씨는 90만 내외다.

그러면 왜 가짜라고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성이 없는 사람이 성을 새로 가지려면 주변의 다른 사람과 달리 새로운 성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가짜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있는 다른 사람의 성씨 속에 은근슬쩍 들어갔다. 그러니 가짜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대부분 김씨와 이씨를 선택했다.

왜 김씨와 이씨가 그렇게 많을까? 그것은 성을 신고하던 시기와 무관하지 않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전주 이씨가, 그리고 한말에는 안동 김씨가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권문세가였으니 이왕이면 그 성씨가 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나마 마음이 약해서 전주 이씨나 안동 김씨로는 올리지 못하고 올려도 별 상관이 없는 김해 김씨가 가장 인기였다. 몰락한 옛 신라왕조의 성씨이니 쓴다 한들 누가 뭐라 할 것인가.

본향으로 가장 많은 김해 김씨가 410만 정도, 그다음으로 밀양 박씨 300만 정도, 모두 몰락한 옛 왕조의 성씨다. 그다음은 전주 이씨 270만, 경주 김씨 170만, 경주 이씨 140만 정도의 순서가 된다.

성 없이 노비로 한평생 살았던 안동 김씨 가문의 노비 3백여명도 한말에 일사분란하게 그 주인댁과 같은 성씨가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김좌근은 계동의 집 대지가 8천평, 농지는 수만평이라 노비가 수백명. 집안에만 데리고 있는 숫자만 노비가 아님.)

이렇게 두 성씨가 전 국민의 30퍼센트가 넘는 나라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다. 중국도 가장 많은 이, 왕, 장씨를 합쳐봐야 20여 퍼센트 정도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다. 몰려 있는 특정 성씨를 보기가 힘들다.

일본도 성씨 없이 살기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였다. 명치유신 후에 전국적으로 성씨를 만들었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그들은 우리 김씨나 이씨, 박씨처럼 기존에 행세하던 성씨를 슬쩍 도용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산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산중(山中), 소나무가 많은 고장에서 살던 사람들은 송하(松下), 들판 가운데 살던 사람들은 전중(田中), 대밭이 있는 지역은 죽전(竹田), 그런 식이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일본 성씨는 1만 개가 넘는다. 중국도 물론이다. 중국의 성씨는 당나라 황제 이세민이 개국공신들에게 이씨 성을 하사한 뒤 늘어나 현재 약 2만 3천 개에 달한다(중국 성씨 대사전).

미국 역시 성씨가 수만 개지만 자유롭고 창의적인 것은 일본과 거의 비슷하다. 대부분 성경이나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에서 따 왔는데 가장 흔한 존은 ‘하나님은 고귀하다’라는 뜻이고 로버트는 밝은 명성, 조지는 농부, 프랭크는 자유, 유진은 고상한, 리처드는 강력하고 힘 센, 그런 식이다.

우리는 그와 정반대였다. 새로 집을 짓기보다는 꼭 남이 살던 집에 들어가려 한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왜 그렇게 성씨 하나 용감하게 독립해 나가지 못했을까?

‘나는 쌍놈의 자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그렇게도 두려웠을까? 그렇게 비난하면서 도전정신이 부족하다느니, 항상 뒤에서 눈치를 살피며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속성이라느니, 이런 성씨 선택의 빈약함은 결국 태생적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큰 잘못이다.

쌍놈이 아니라는 걸 나타내려고, 그 한을 풀어 보려고 천신만고 끝에 성을 허락받았는데 어떻게 또 쌍놈의 증표인 새 성을 가지란 말인가. 그럴 바에 차라리 그대로 성이 없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창씨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던 조선의 폐쇄성과 권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무력하고 나약한 조선 쌍놈들의 한이 결국 이런 가짜 성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든 셈이다.

그래서 현재 우리 성씨는 모두 합해 봐야 286개 언저리에 불과하다. 그것도 1960년에는 258성이었는데 외국인들이 귀화하여 창씨를 하면서 좀 더 늘어난 것이다. 2008년 귀화한 미국인 로버트 할리는 부산 영도 하씨를 만들었고 관광공사 사장인 이참 씨는 독일 이씨를 만들었다.

귀화 인구가 많아지면서 성씨가 앞으로 조금씩 늘어나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해 봐도 일본이나 미국처럼 수만 개가 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할 것이다. 그나마 지금 이 정도도 상당히 많아진 셈이다.

고구려는 해, 을, 예, 손, 목, 우, 주, 마, 찬, 동, 연, 을지 등 10여 종에 불과했고 백제도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등 8대 성씨였다. 신라는 6대 성이 이, 최, 정, 손, 배, 설이고 외래 성으로 장, 요가 있었다. 김, 박은 왕족의 성씨지만 김씨는 진흥왕 이후로 쓰이기 시작했다. 김씨, 박씨는 오히려 숫자가 가장 적었다. 박혁거세, 김알지 등의 이름도 수백 년 뒤 후손들이 성씨를 붙여준 것이지 처음에는 성씨 없이 혁거세, 알지 등으로 불렸다.

통일신라가 되면서 고구려, 백제의 성씨는 사멸하고 고려 시대가 되면서 대부분 중국의 성씨를 모방한 새 성씨가 생겨났다. 지배 계층만 성씨를 가졌음은 물론이다. 이때 특징은 각 지역별로 쓸 수 있는 성씨가 규제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토성(土姓)이라 하는데 예를 들어 당시 인구 5천 정도였던 전주의 토성은 이, 최, 정, 손, 배, 설이다. 김씨는 아예 들어 있지도 않다.

경상도의 대도시였던 언양현(현재의 울산 일대)의 호적대장이 울산의 유형문화재 9호로 지정되어 귀중한 연구 자료로 사용되지만 1454년 세종실록지리지를 봐도 이 지역의 토성은 박, 김, 이, 목, 전, 오, 윤, 문, 임 등 9개에 불과하고 타 지역에서 들어온 외래 성 황, 허를 비롯하여 모두 13개에 불과하다. 다른 성씨가 추가된 것은 80년 후 정씨 하나뿐이다.

호남의 최대 도시였던 전주의 토성 손, 배, 설씨의 그 후 변화를 살펴보자.

이씨나 최씨, 정씨 비슷하게 인구가 늘어나야 정상인데 이씨는 지금 전국 600만, 최씨 180만, 정씨 170만 언저리인 반면 손씨는 36만, 배씨는 32만, 설씨는 30만 내외다(통계청 자료).

한 사람이 자손을 퍼뜨리고 오백 년 정도가 지났을 때 동일한 본관을 유지할 수 있는 숫자는 몇 백에서 많아야 천 명 근처가 된다. 확실히 이상하지 않은가? 토성도 아닌 김, 이, 박씨는 수백만으로 늘어났는데 정작 토성은 제자리걸음 상태다.

우리 시골에 집성촌이 많은 것도 사실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다. 17, 8세기 이후 한 마을이 의견을 모아 통째로 같은 성씨가 된 경우도 있었다. 낙향한 가난한 양반이 한 집 있으면 그 고을의 성 없던 하천배들이 뭘 좀 걷어 바치고 부탁하여 같은 성씨로 입문.

결국 우리나라에서 평생 성씨도 없던 쌍놈들이 이름 번듯하게 갖게 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겨우 일이백 년 전이다. 무더기로 김, 이, 박씨가 되었다는 추정이 충분하다.

성씨를 새로 만들게 하는 일제 민적법 시행 당시는 당시 순사들이 각 집을 돌면서 원하는 대로 성씨 신청을 받았다. 가끔 한자의 획을 잘못 써서 희귀한 성씨가 나오는 해프닝도 있었다.(예를 들 수 있나요?).(육 陸씨가 목睦씨로 되는등인데 밝히지 말아야 함)

이런 판국인데도 우리나라는 해방 후 법을 만들면서 동성동본 혼인을 법으로 막았다. 본래 동성동본 금혼은 성씨가 많지 않았던 1669년 현종 당시 송시열이 주장하여 만든 것이다. 당시로서는 아마 당연한 규제였을 것이다. 그런데 성씨가 이미 엉망이 된 마당에 해방 후 대한민국의 사대부들이 그것을 그대로 재적용한 것이다.

어찌된 셈인지 어떤 연구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가 일제에 합병이 되기 전 백성들 대부분이 성씨가 있었다고도 되어 있는데 의문이다.

최근에 <조선땅에 몸 던진 서서평(본명 엘리제 셰핑) 선교사 내한 100년 기념 평전이 출간되었다. 미국 여성인 그는 1912년 조선에 들어 와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병자를 돌보고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그 역시 병으로 이 땅에서 죽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500명중 이름이 있는 사람은 열명뿐입니다.>

그의 기록이다. 여인들은 돼지 할머니, 큰 년, 작은 년,등으로 불리우고 있어서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 주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엉터리 성씨와 함께 조선의 폐쇄적 잔재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실체가 족보라는 것이다. 지금은 집집마다 족보가 없는 집이 없다. 그것을 보면 우리 국민은 한 사람 빼놓지 않고 왕가의 후손이고 명문가의 자손이다. 그러나 솔직히 족보에 나와 있는 어른들 중 5, 6대 이상은 자신의 선조일 가능성이 적다. 남의 족보를 빌려다가 위는 베끼고 아랫부분에 현재의 자기 가족들을 집어넣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일제 때 이런 가짜 족보를 만들어 주고 한 재산 모았던 브로커들이 많았는데 쌀 다섯 말이 기본이었다고 한다. 이런 것은 원본 족보와 대조해 보면 금방 밝혀지지만 아무리 할 일 없어도 그런 것 확인해 보려 쫓아다닐 필요가 없다. 창녀의 자식, 비렁뱅이, 도적의 자식도 자수성가하여 훌륭히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박수갈채와 감동은 오히려 그런 곳에서 더 나온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족보가 지금 남아 있어서 국보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족보는 개국 전 함경도 화령(현재의 함경남도 영흥)에 살고 있을 때의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제대로 된 족보는 1476년 안동 권씨의 성화보인데 조선 초기에 족보를 가진 가문은 불과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조선 후기 들어와서 족보 위변조는 쌍놈들뿐만 아니라 양반도 가세해서 상당히 조직적으로 벌어졌는데 일제 치하에서가 아니라 1764년 영조 때부터 이미 그런 기록이 보인다.

영조 40년 10월 19일, 사헌부 집의 유수가 임금에게 보고하다.

“역관 김경희라는 자가 사사로이 활자를 주조한 다음 사람들의 보첩(족보)을 많이 모아 놓고 시골에서 군역을 면하려는 무리들을 유인하여 그들의 이름을 보첩에 기록하고 책장을 바꾸어 주는 것으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엄중히 조사하여 중히 다스리도록 하소서.”

사헌부는 조선에서 현재의 감사원과 비슷한 기관이다. 각지 관헌들의 뒷조사를 하다가 이런 비위 사실을 적발한 것이다.

김경희는 역관, 즉 중국어 통역관으로 신분은 양반도 아니고 상놈도 아닌 중인계급이다. 이런 자가 각 관부나 사찰 등에만 갖출 수 있는 인쇄시설을 마련해놓고 더구나 양반들의 족보를 다수 모아 가짜 족보 장사를 한 것인데 그런 일은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김경희가 한 일은 어떤 가문의 족보를 인쇄한 다음 그 사이사이에 돈을 낸 상민들의 가족을 끼워 넣어주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려면 족보를 빌려주는 양반이 있었을 것이고 또 고객을 모집하려면 관헌을 포함하여 비호세력이 있어야 한다. 규모가 상당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상놈이 족보를 갖게 되면 우선 무슨 혜택이 있나?

가장 큰 것이 군역 면제다. 병역에서 빠지려는 자들의 꼼수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당시 양반들과 관원, 성균관이나 향교, 서원 등의 유생들은 군역에서 제외되었다. 당시의 관례는 족보를 신분증명서로 제시하고 양반임을 주장하면 당연히 군역에서 면제될 수 있었다.

김경희 사건이 발각된 지 23년 뒤 1787년 4월 27일(실록 기록대로 음력으로 바꿨습니다) 당시 사간이었던 이사렴이 국왕 정조에게 올린 보고서 내용.

“요즈음 간사한 백성들이 유명한 양반의 족보에 이름을 기록하여 군역의 면제를 도모하는 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를 엄하게 금지시켜 주십시오.”

그 밖에 1791년 1월 22일(상동) 백성 박필관이 신문고를 울리고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고발하였을 때에도 “상민과 천민들이 거짓으로 족보를 만드는 것”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아뢰고 있다. 족보의 위조 행위가 단속만으로 쉽게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이들은 물론 비단 병역 면제만을 노리고 족보를 위조한 것은 아닐 것이다. 천대 받는 상놈 신분에서 족보를 지닌 어엿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해보고자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본능 아니겠는가. 오히려 그런 목적의 숫자가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위변조가 계속되면서 도처에서 분란이 일어나고 도저히 중단시킬 형편이 되지 않자 18세기 말부터는 일부 변칙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용인해 주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사학자 백승종 교수의 자료를 일부 인용한다.

별보니 별파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자기 가문의 족보에 엉뚱하게 끼어드는 무리가 늘어나자 아예 금품을 받고 그것을 양성화시켜 주기로 결정하되 정식으로 족보에 편입시켜 주는 대신 족보 외에 별도의 추가 족보를 제작하여 별보라고 호칭한 것이다. 우리 가문이기는 하지만 이 족보에 들어 있는 사람은 다소 의심쩍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당시 굴지의 세도 가문으로 인식되었던 모 성씨의 경우를 보면 1760년에 편찬된 이 가문의 족보 30권 가운데 28책에는 17개파가 별보 형식으로 수록돼 있다. 그들은 사실상 이 성씨와 혈연관계임을 입증하지 못했지만 당사자들이 이 성씨의 후예라고 극구 주장하면서 수록을 간청했기 때문이다.

그 후 다시 1826년에 편찬된 족보는 모두 35권인데 그중에서 32, 33권은 아예 별보이며 1900년에 다시 간행된 80권짜리 족보에서는 별보가 1권으로 줄어들고 있다. 별보에 수록되었던 인원의 대부분이 별보를 버리고 아예 다른 파로 흡수된 것이다. 별보에 수록되어 의심을 받느니 순순히 원본 족보에 넣어주는 다른 파로 가버린 것이다. 각종 지파가 늘어나고 본향이 갈라져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우리 족보의 특징이다.

같은 김씨도 경주 김씨, 김해 김씨 등 여러 김씨로 나뉘고 김씨의 총 본관은 가장 많을 때가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623본, 현재는 363본이 존재한다. 이씨 역시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가장 많을 때에 546본이었지만 지금은 100여 본 외에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약간의 권세를 가진 양반이 자신을 중심으로 한 지파를 세웠다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런 사례는 조선 시대에 나타난 현상으로 모든 성씨에서 공통적이다.

지금 국립중앙도서관에 수집되어 있는 족보가 약 7천 질이나 되고 족보연구소의 공개 자료를 보면 가락이라는 이름의 종친회만도 각 지역별로 50개가 된다. 경주 김씨 가문의 족보는 무려 107질, 안동 김씨 50여 질, 전주 이씨도 100여 질이 넘는다.

가나다 순서로 나열되어 있는 모든 성씨가 각각 많게는 100개 이상으로, 적어도 수십 개의 지파로 나뉘어 종친회를 운영하고 있다. 그야말로 지금 전 국민은 전통 양반의 후예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셈이다.

그 결과 20세기 들어서는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족보를 가진 양반이 되었는데 호적에 적힌 본관과 성씨를 근거로 그런 족보에 들어갔음은 물론이다. 그중에는 또 해당 가문과 상의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제작한 족보도 부지기수다. 해방 후 선거가 실시되면서 자기 가문의 위세를 숫자로 자랑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진위를 가려야 한다는 주장은 6‧25전쟁 과정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북 피란민들이 늘어나면서 성공한 재력가를 영입해서 자신들의 문중에 편입시켜 주는 사례도 많았다. 그에 대한 답례로 사업가는 막대한 문중 장학금을 기탁한 경우가 있다.

결국 조선 중기 이후부터 말기에 걸쳐 상놈의 신분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전 국민은 양반이 되었으니 이런 역사의 코미디가 어디 있을까.

다 합쳐 봐야 200여 개밖에 없는 성씨, 그리고 지금은 전 인구가 가지고 있는 족보,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폐쇄성과 허위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며 또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오늘을 보면 우리 역사는 가식과 허세의 거대한 늪에서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 같다.

<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의 성씨(행정자치부)/「천태만상 족보위조」(백승종, 신동아, 1999년 9월호)/한국 족보연구소 자료1장 조선왕조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김남 작가의 동의가 얻어 기사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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