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껍데기로만 이어갔던 왕조 오백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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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껍데기로만 이어갔던 왕조 오백 년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9.07.2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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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수만 자랑, 의미 없는 오백 년 역사의 위선,
유성룡은 임진왜란 중에 이제야말로 양반 상놈 철폐를 하고 획기적인 개혁을 해야 할 때라고 주창한 분이다. 선조도 처음에는 그런 주장이 옳다 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유성룡은 계속 개혁을 논한 끝에 아예 삭탈관직이 되어 벼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노컷 조선 왕조 실록 책 커버
노컷 조선 왕조 실록 책 커버

1849년 6월 초. 충청감사 김수근이 병조판서인 김좌근을 급히 찾아왔다. 그들은 안동 김씨로 한 살 터울이며 집안으로 사촌형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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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조선의 24대 왕 헌종의 재위 15년째이다. 당시 헌종의 나이 고작 22세. 그는 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지만 후손도 남겨놓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상감이 심상치가 않으며 전 의원들이 모두 대기 중인데 가망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런 경우에 왕실의 종친부에서는 긴급회동을 열고 후사를 결정해야 한다.

“아무래도 이하전이 낙점될 것 같습니다.” 이하전은 완창군 이시인의 아들로 적장자가 없는 현재로서는 가장 가까운 왕손이었다. 기개가 있고 똑똑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어서 다음 왕을 추대한다면 이론 없이 1순위인 것이다. “그 자가 만약 왕이 된다면 대감, 우리는 죽습니다.” 두 사람은 심각한 의논 끝에 일치된 결론에 이른다.

조선조의 특징인 4색 당파가 절정에 달하고 있을 때의 사건이다. 김좌근 등 안동 김씨는 파인데 이하전은 그들과 등을 지고 있는 파이다. 그동안 시파는 많은 벽파를 죽였다. 천주교도들을 비호하고 있는 세력이라 하여 함께 엮어서 처형을 거듭했다.

영조 재임 시절. 뒤주에 가둬 죽인 사도세자 사건이 난 뒤 사도세자를 온정적으로 보는 세력이 시파이고 허위보고로 사도세자를 죽게 한 강경파들이 벽파인데 두 파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기세등등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안동 김씨가 주축인 시파의 시절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벽파인 이하전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반대파가 힘을 잡으면 그 반대파의 씨를 말리는 것이 조선의 관습이다.

“이하전 말고 왕손으로 또 누가 있는가?” 그들은 똑똑한 이하전 대신 자신들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줄 수 있는 어리숙한 왕손을 급히 수소문한다. 부랴부랴 이삼일 만에 허겁지겁 골라낸 인물이 강화도령으로 알려진 철종이다.

그는 왕족이었지만 부친과 형이 역모로 몰려 모두 사약을 받았기 때문에 일가붙이도 없는 천애 고아로 살아 왔다.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고 글자 한 줄도 몰랐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왕으로 골라 뽑은 것이다. 오직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철종은 불우하고 가여운 왕이다. 섬 무지렁이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되었지만 평생을 신하들에게 눌려 말 한마디 해보지 못하고 살다가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는 죽을 때 유언을 했다. 내 어진에 일월오봉도를 그려 넣지 말라. 왕들은 생전에 모두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리고 그 어진은 규장각에 모셔지고 거상 기간이 끝나면 종친부로 옮겨졌다. 철종은 죽기 2년 전에 어진을 그렸는데 당시는 어진을 먼저 그리고 다시 그 뒤에 배경인 일월오봉도를 그려 넣는 경우가 많았다. 일월오봉도란 달과 해 앞의 다섯 봉우리인데 장엄하여 왕의 위상을 더해 준다.

“내 죽은 뒤에 뒷날이라도 일월오봉도를 그려 넣지 말라. 그 그림이 의미하는 것처럼 나는 백성의 어버이 노릇을 못해 본 임금이다.”

여기서 철종의 기구한 운명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억지로 이어 붙여간 것이 바로 조선왕조라는 것이다. 유럽 왕조들은 억지로 껍데기만 동일한 채로 유지한 것이 아니고 자기들 편에서 권력을 빼앗으면 지난 왕조를 폐하고 새로운 왕조를 만들었다. 그것이 상식이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붙여 새 왕조를 시작했다.

상당히 비판적인 사람도 조선을 거론할 때 가장 훌륭한 점으로 한 왕조의 역사가 오백 년이나 이어갔다는 긍지를 내세운다. 거기에 따른 조선왕조실록 이라는 기록 유산도 포함해서 말이다. 세계사를 살펴봐도 오백 년 이어온 왕조는 없다. 유럽 대륙은 워낙 부침이 심하여 일이백 년 가기도 힘들었고 섬나라 영국이라고 해도 엇비슷하다. 자꾸 왕조가 바뀌었다.

조선은 1392년에 개국하여 1910년 한일합방으로 문을 닫았으니 그 역사가 518년이다.

유럽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로 왕조가 긴 편이다. 왜 조선은 오백 년이나 지속되었을까. 영국은 비슷한 시기만으로 본다 해도 1309년의 랭커스터 왕조, 1461년의 요크 왕조, 1603년의 스튜어트 왕조, 1714년 하노버 왕조, 그런 순서다.

모두 엇비슷한 왕족의 후예들이었지만 그들은 새로운 왕조를 시작하면서 전 왕조와는 차별된 새 이름의 출발점을 만들었다. 물론 그만큼 내분이 많았고 전쟁이 뒤따랐다.

좀 오래되었다는 국가가 유럽에서는 북쪽의 스웨덴, 남쪽의 스페인 정도지만 역시 이백여 년을 한계로 왕조가 바뀌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도 삼백 년이고 일본의 마지막 왕조인 에도 막부도 우리나라와의 전쟁인 정유재란 이후에 세워졌으니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에스파냐 제국이 1516년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작으로 상당히 길지만 그 사이에 나폴레옹이 실질 지배한 기간도 있었고 공화제가 등장하는 등 복잡하여 오백 년 역사로 치지는 않는다.

중국의 원나라가 백여 년, 명나라 역시 삼백 년 정도, 청나라도 삼백 년 정도인 데 비하여 동쪽의 소국이었던 우리나라만 기이하게도 오백 년 역사를 자랑하고 있는 셈이다.

자긍심을 가질 만도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자랑일까? 아니다. 까뒤집어 보면 오히려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왕조가 바뀐다는 것은 단순히 왕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새 왕조의 새 인물이 뭔가 새로운 정책을 가지고 종전과는 다른 시대를 연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오백 년 27대 왕 동안 한 가문만이 왕위를 물려주고 내리받았다. 모름지기 전주 이씨가 우리 조선을 계속하여 통치해 왔다. 물론 말엽에는 외척인 안동 김씨가 육십 년 동안 실질 권력을 쥐었지만 왕은 언제나 한 가문이었다.

이렇게 한쪽의 오랜 통치는 상식적으로 봐도 새로운 기풍이나 제도, 개혁이 등장하기 어렵다. 선대왕들이 이뤄놓은 치적이라 하여 그걸 승계하고 받들어 모시면서 새로운 시책이 혹시라도 선왕에 해가 될까봐 오히려 삼갔다. 종묘에 가면 역대 왕의 위패가 즐비하다.

자손이 선대왕의 치적에 누를 끼칠 수가 없다. 손톱만큼의 비방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자세로 정사를 펼쳐 갔으니 획기적인 개선은 애초에 나올 수가 없다.

아무리 왕이 바뀌어도 개혁이라 할 만한 것은 의지도 발상도 없었다. 어떻게 새 국가를 경영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은 전무한 것이 당시 지배층들이다. 가끔씩 등장한 개혁주의자들은 오히려 걸림돌이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 중에 이제야말로 양반 상놈 철폐를 하고 획기적인 개혁을 해야 할 때라고 주창한 분이다. 선조도 처음에는 그런 주장이 옳다 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유성룡은 계속 개혁을 논한 끝에 아예 삭탈관직이 되어 벼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열하일기의 박지원은 중국에 가 보고 너무도 놀랐다. 넓고 쭉 뻗은 대로, 벽돌로 지은 커다란 2층 주택들, 거리를 오가는 무수한 수레들. 박지원은 우리도 빨리 그런 식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보고를 올렸지만 정종은 한번 검토해 보겠다는 정도로 넘어가 버렸다.

임진왜란 당시 손수 종군했던 광해군 역시 왕이 된 후 세금 정책을 혁파하고자 했으나 모든 대신들이 반대하기 때문에 결국 흐지부지 넘어가고 말았다.

조선의 특징이 바로 그런 것이다. 생각 있는 사람들이 가끔씩 나타났으나 생각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순리적으로 왕권이 계승되지 못하면 그 왕조를 끝내고 새 나라를 만들어 뭔가 새 정치를 펼쳐야 하는데, 조선의 권력자들에게 그런 발상은 전무하고 껍데기는 그대로 둔 채 왕만 바꿨다. 적임자가 없을 때에는 신하들이 들고 나서서 억지로 허수아비 왕을 끌어다 놨다.

광해군도 그중 한 사람이다. 서자의 자손이라는 등의 이유로 부왕인 선조가 끝까지 탐탁해하지 않자 정인홍과 이이첨 등이 나서서 그를 왕위에 올렸다. 선조가 갑자기 죽자 바로 다음 날 상복을 벗기고 번개처럼 일을 처리했다. 행여 다른 사람이 틈새를 노릴까봐서 말이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왕이 재위기간 내내 자신을 추대한 대신들에게 휘둘려 제대로 국정을 보살필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광해군은 은인 정인홍이 들어오면 일어서서 절을 하며 맞이했고 나가기 전까지는 자리에 앉지도 못했다. 이것은 정 대감의 뜻입니다, 그렇게 보고가 올라오면 두말없이 그렇다면 그대로 하시오 했다.

조선의 명맥이 사실상 끊어진 것이나 다름없는 첫 번째 사건으로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의 폐위사건을 들 수 있다. 극도의 패륜아이고 탕아였던 연산군은 재위 12년 만에 쿠데타로 쫓겨났다. 주동인물은 전 이조참판 성희안과 지중추부사 박원종, 이조판서 유순정 등이다. 모두 왕족출신들이 아니다.

광해군을 몰아낸 반란의 주동인물 역시 왕족이 아닌 반대파 서인이었던 이귀, 김자점, 김류, 이괄 등이었다. 이괄과 이귀는 이씨였지만 전주 이씨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들의 그다음 행동이다. 그들은 왕을 몰아냈으면서도 꼭 왕족 가운데 촌수가 먼 힘없는 인물을 골라 새 왕으로 추대했다.

유럽에서 그러한 반란이 일어나면 당연히 반란을 성사시킨 장군이 다음 왕이 되었다. 국가를 그대로 둔 채 승계하여 다음 왕이 되는 것보다도 그 왕국을 없애버리고 자신의 새로운 왕국을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에서 쿠데타에 성공한 무리들은 왕의 실정을 보면서도 뭔가 새로운 설계를 가지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보려는 의지라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것이 공통점이다. 그냥 그대로의 틀 속에서 자신의 영화만을 추구한 것으로 그쳤다.

철종이 33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죽었을 때도 왕실에서는 가장 적합하고 똑똑한 인물 한 사람을 골라냈다. 그러나 이때도 그런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열두 살짜리 엉뚱한 소년을 왕으로 끌어들인 사람은 대왕대비 조씨와 대원군이었다. 그대로 앉아 있다가는 다시 안동 김씨들의 세상이 될까봐 서둘러서 어릴 때 이름이 개똥이였던 소년을 양자로 입적시키고 새 왕으로 삼았다.

나이가 어리니 당연히 조대비 자신이 섭정을 했다. 그 혼란스러웠던 조선 말기에 좀 더 영민한 인재가 왕이 되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조대비가 섭정을 하고 다시 그 뒤를 이어 쇄국주의자 대원군이 나서고 하는 사이에 조선은 망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역사와 내막을 가진 왕조인데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긴 왕조라고 자랑만 하고 있는 것 같다.

조선을 통틀어 개혁을 주장하고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어 보고자 노력했던 훌륭한 인물들은 많다. 그러나 나라를 뒤엎고 반정에 성공한 인물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 백성들과 혼연일치가 되어 새롭고 강건한 나라를 만들어 보려는 생각은 애시 당초 가져보지도 않은 채 자신이 무시 받은 데 대한 보복심, 반대파에 대한 원한, 그런 것들만이 반정의 골격이었다.

차라리 태조 이성계는 그런 면에서 솔직하다. 신하도 왕이 되는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면서 고려라는 국호를 버리고 수도도 개성에서 한성으로 옮겨 새 터를 잡았다. 기존의 제도를 파하고 많은 개혁정책을 만들었다. 법 제도도 대대적으로 바꿨다.

차라리 그 쪽이 낫지 않은가?

연산군을 폐위시킨 무리들이 가령 주동자 성희안을 왕으로 추대하여 양반 상놈으로 나뉜 반상제도를 철폐하고 세금문제를 개혁하며 모든 제도를 백성들 편에서 연구하고 제정했더라면 국가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씨 조선이든 성씨 조선이든 백성들에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자리만 새로 장만했던 무리들, 무지한 산골 청년 철종을 내세워놓고 뒤에서 호의호식한 사람들,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인데 열두 살짜리를 왕으로 삼아 섭정을 하려는 늙은 조대비와 가진 자들에 대한 앙심만 똘똘 뭉쳐있던 대원군이 만들어 낸 나라.

불행한 일이다. 타락하고 무능한 왕을 몰아내는 데는 열심이었지만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건설해 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충효를 내세운 성리학적인 명분 때문에, 반역을 했으면서도 결코 반역자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만 급급했던 셈이다. 야욕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도난 회사를 인수했으면 이름도 바꾸고 경영진도 교체하며 경영전략도 새로 짜서 새 출발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 기본이다. 그렇지 않고 껍데기를 그대로 유지하며 똑같은 시스템과 경영전략 위에 그냥 눌러 앉아 자신의 봉급만 몇 배로 올린다면 그게 기업인가. 조선은 바로 그런 왕조였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새로운 권력층은 역적으로 처단된 이이첨, 박승종, 정인홍 등의 집과 재산, 노비들을 죄다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보면서 거리에는 상시가라는 노래가 흘러 다녔다. 이것이 숨김없는 백성들, 바로 상놈들이 보는 나라일 것이다.

상시가 (傷時歌)

아 훈신들이여. 잘난 척하지 마라. 그들의 집에 살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고 그들의 말을 타며 또다시 그들의 일을 되풀이하니 당신과 그들이 돌아다보면 무엇이 다른가. 이래도 조선 역사가 오백 년이나 된다고 자랑만 해야 하리?

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조선 왕실 광해군편(지두환) 기록만 하고 볼 수도 없었던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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