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만 하고 볼 수도 없었던 '조선 왕조 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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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만 하고 볼 수도 없었던 '조선 왕조 실록'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9.07.23 17: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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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의 원전이 되는 '승정원일기'는 그 방대함이 '실록'의 몇 배에 달한다. 총 3,245책이나 되고 글자 수로 하면 2억 자를 넘는다. 그나마 이것은 현존하는 것이 그러하며 광해군 이전의 기록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버렸다. 승정원은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격으로 왕명의 드나듦과 모든 회의, 행차 시의 동태 같은 것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8명의 사관이 있어서 왕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참석하여 대화를 기록했다.
노컷 조선 왕조 실록 책커버
노컷 조선 왕조 실록 책커버

조선을 말할 때 어지간히 비판적인 사람도 기록문화가 대단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다. 심지어 그것 한 가지밖에 볼 것이 없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면서부터 25대 왕 472년간의 동태를 기록한 총 1,893권 888책으로 이루어진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글자 숫자는 총 6,400만 자에 달하며 지난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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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의 원전이 되는 '승정원일'기는 그 방대함이 '실록'의 몇 배에 달한다. 총 3,245책이나 되고 글자 수로 하면 2억 자를 넘는다. 그나마 이것은 현존하는 것이 그러하며 광해군 이전의 기록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버렸다.

승정원은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격으로 왕명의 드나듦과 모든 회의, 행차 시의 동태 같은 것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8명의 사관이 있어서 왕이 있는 곳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참석하여 대화를 기록했다.

실록은 별도의 상설 기관에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왕이 죽으면 실록청이 구성되면서 전 왕 시절의 승정원일기와 시정기들을 참조하고 기록으로 남길 만한 가치가 있는 내용을 가려 놓은 최종 편집본이다. 이런 전통은 일찌감치 중국에서 시작한 것으로 모든 것을 중국과 같게 하려는 사대부들의 주장에 따라 만들어졌다. 고려 시대에도 고려실록이 작성되었지만 조선실록처럼 시시콜콜하게 작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훌륭한 기록물은 조금 물러나서 분석해 보자면 미심쩍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기록물을 만든 것일까? 그런 면에서 의문점이 생긴다. 애초의 목적은 훌륭하지만 활용 면에서는 전혀 점수를 줄 수 없는 것이며 무조건 예찬만 하기에는 큰 문제가 있다.

활용을 할 수 없다면 그 기록물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고의 도서관을 만들어 놓고 도서관장을 비롯해 아무도 책을 열람하지 못하게 하는 곳이 있을까? 그런 곳이 바로 조선왕조다. 그 실록은 왕도 보지 못했다. 내용을 아는 사람은 당시 제작 책임자들뿐이었다.

정조도 (정조 5년 7월 10일) “실록'은 금궤에 넣어 석실에 엄중 보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볼 수가 없다. 그런 때문에 잘 알려진 일들은 다른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지만, 더 중요한 실록의 자료를 쉽게 활용할 수 없는 것은 매우 흠결이 되는 일이다” 라고 불만을 털어 놓은 뒤에 국조보감을 따로 편찬하라고 명령했다.

국조보감은 주로 왕의 치적을 기록하여 놓은 것인데 '실록'을 볼 수 없으니 선대왕들의 행장을 간소하게나마 훑어볼 수 있도록 만든 일종의 간략본으로 현재 90권 28책이 남아 있다. 이 기록은 수식과 과장이 넘치고, 왕의 치적에 대한 찬사로만 이어져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별로 없다.

왜 '실록'을 왕도 못 보게 만들었을까?

물론 명분은 있다. 왕이 보기 시작하면 불만이 있는 부분을 고치라 할 것이고 여러 가지 부작용이 일어날 소지가 다분히 있다.

사실 연산군 때의 무오사화는 이 기록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당시 전라감사 이극돈은 국상 기간 동안 잔치를 벌이고 술을 마시는 불법을 저질렀는데 사관 김일손이 이런 사실을 모두 사초에 기록하고 말았다.

뒤늦게 알게 된 이극돈이 이 기록을 삭제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끝내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있다가 벌인 복수극이 무오사화인데 그 때문에 조정 대신 수십 명이 죽고 귀양 갔으며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하는 욕을 입었다.

연산군은 이때 김일손이 쓴 사초를 모두 가져오라고 명령했지만 실록청에서 반대했다. “예로부터 사초는 임금이 스스로 보지 않습니다. 임금이 만약 사초를 보면 후세의 기록자들이 옳게 기록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연산군은 화를 내고 “즉시 빠짐없이 가져와라” 호통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예로부터 임금은 스스로 사초를 보지 못하지만, 종묘사직과 관계가 있는 중요한 일이라면 그 부분만 절취하여 올리겠습니다. 그러면 일을 참작할 수 있고 또한 임금은 사초를 보지 않는다는 정의에도 합당합니다.

결국 6조목만을 절취하여 봉해 올렸으니, 그가 본 것은 실록의 극히 일부분이다. 천하의 연산군도 실록에 손을 대지 못한 것이다.

예종은 실록청에서 '세조실록'의 완성 보고를 받자 초 권(??)을 들이라고 명령했다. 사초의 방향을 한번 살펴본 정도였다. '세조실록'은 모두 49책이었으니 그중 한 권을 살펴본 것에 그쳤다.

세종대왕도 궁금하여 한 번 보자고 했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왕이 '실록'을 보면 다음 왕도 또 보자고 할 것이고 그다음 대에도 마찬가지다. 그걸 알면 사관들이 공정하게 기록을 할 수 있겠느냐는 반론을 이길 수 있는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록'을 공개하라는 왕과 이를 거부하는 대신들 간의 논쟁은 중종 때 가장 격렬했다. 중종 31년 7월. 전례대로 '국조보감'을 편찬하게 되었을 때 찬집청에서는 춘추관 문을 열고 '실록'을 한번 열람하게 해달라는 청을 올려 왕의 허가를 받았다. 연산군을 반정으로 몰아낸 정권이었으니 연산군에 대한 기록이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처음 한번 잠시 공개가 되었지만 얼마 후 추가 기록을 위해 다시 '실록'을 찬집청으로 실어 보내라는 왕의 명령이 내려왔다. 실록청과 춘추관 등이 시끌벅적해졌다. 간단한 '보감'을 편찬하면서 '실록'을 이렇게 재차 열람시킨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홍문관 부제학 성윤이 쫓아왔다.

 “이제 들으니 '실록'을 찬집청으로 실어 보내라 하셨다는데 춘추관을 열고 실록을 보내는 일은 매우 중대하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더구나 조종조의 본받을 만한 일은 기왕의 보감에 모두 실려 있으니 거기에 더 보탤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고를 경솔히 열고 닫고 한다면 뒤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므로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종의 반론도 지엄하였다.

“엄히 보관하는 것도 옳은 듯하나 예부터 큰 일이 있으면 '실록'을 상고함이 당연한 것인데 '국조보감'을 찬집하면서 '실록'을 참고하지 않고 어쩌겠는가? 비록 지난 '국조보감'에 기록이 있다 하여도 자세하지 못한 곳이 있기 때문에 대신들이 다시 보자는 것 아닌가.”

춘추관도 물러나지 않았다.

“이 일은 매우 중대한 것으로서 가볍게 열었다 닫았다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번 국조보감을 처음 편찬할 때는 선왕들의 일을 본받기 위해 할 수 없이 잠시 열었지만, 지금은 긴요한 일도 없는데 다시 열어본다는 것은 참으로 부당합니다. 지난번 무오사화의 발생도 임금이 친히 사록을 봤기 때문 아니었습니까?

오늘날 '실록'을 본 사람이 적지 않아 겸춘추까지 들어와 열람하였습니다. 특별히 비밀스러운 내용이야 없겠지마는, 대체로 임금이 본받을 일은 6경보다 나은 것이 없고, 근래 조종조의 일을 알고 싶으면 '국조보감'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더 상고하려고 하십니까? 또한 폐조(연산)의 일을 경계하기 위해 책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것도 부당하다고 봅니다.

폐조 때의 일이 아직 오래되지 않아 사람들의 머릿속에 역력한데 특별히 책으로 편찬한다는 것은 매우 타당치 못합니다. 지금 실록각을 여러 날 동안 여닫으므로 시골의 평범한 서민들도 모두 ‘지난날 이 문이 열렸을 때 큰 참화가 일어났는데 지금 또 이 문이 열리니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 하면서 물의가 흉흉하여 매우 경악스럽습니다.”

왕이 결국 다시 밀렸다.

“이 일은 좋은 일은 본받고 나쁜 일은 징계하기 위해 폐조의 일을 열람하라고 명한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니 굳이 열람하지 않아도 괜찮겠다. 여러 날 실록각을 열어놓은 일은 나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모든 기록이라는 것이 단순히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당대에도 지나간 기록을 통하여 무언가 현실을 반성하고 교훈을 얻어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그런 기본적인 측면에서 이해할 수가 없다. 활용을 할 생각도 없이 그냥 우직하게 기록하고 보관만 해놓은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춘추관에서는 열람을 했지만 왕의 명령을 받아 어떤 문제에 국한하여 자료 검색을 한 정도에 불과하다. 실제로 왕들은 이런 기록을 애초에 싫어했다. 태조부터 '실록'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도 없었다.

그는 왕이 되어 조선을 개국한 뒤 정도전을 시켜 '고려사'를 편찬하라 일렀다. 정도전이 편찬한 '고려실록'은 모두 38책으로 내용이 단출한 것이다. 그 내용 중에 고려 말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을 죽인 구절이 있다. 우왕은 그에게 중국 정벌을 지시한 왕이다. 이성계가 그를 배신하고 위화도 회군을 해버렸으니 그는 평생 그 콤플렉스를 지녔음직하다. 사초를 읽어보고 난 태조는 대노해서 기록을 했던 예문춘추관 학사 이행을 잡아들여 엄중히 국문을 했다.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 공양왕의 지시였을 뿐이고 나는 만류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미 이성계가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결국 사실을 정확히 기록했던 이행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런 터였으므로 '실록'을 만들어라 마라 할 리 없었고 그다음 정종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사관이라는 직책은 유지하고 있어서 자체적인 기록은 계속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다음 3대 왕인 태종도 마찬가지였다. 태종 1년 5월에 동지사 이첨은 이제 사관이 입시하여 왕의 발언을 기록하게 해 주소서 청원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중요한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에 미관말직인 사관을 입회시킬 수 없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다음 달에도 같은 청이 이어지자 다섯 승지가 모두 춘추관을 겸하고 있어서 임금의 언동을 다 알고 있는 터에 어찌 말직인 사관이 또 들어와야 되느냐, 차라리 할 일이 없다면 사관 직임을 없애 버리라는 의견이 나와 대신 김과(金科)와 노이(盧異)가 어전에서 몹시 다투었다.

다시 한 달 뒤에는 회의 도중 휘장 건너에 누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저게 누구냐?” 물으니 “사관 민인생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은 대노하여 “명령 없이 사관을 들이지 말라 했거늘 이 무슨 무엄한 짓이냐?” 귀양을 보내고 말았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사관 입시 허용은 태종 3년에야 겨우 이루어진다. 그것도 이유가 있었다. 태종이 종친 몇 사람과 활쏘기를 즐겼는데 사간원의 상소가 올라오기를 왕이 날마다 종친 두어 사람과만 어울려 활쏘기를 하므로 다른 종친들이 불쾌해하고 있으며 무관의 행위만 전념하고 있어서 문관들도 싫어한다는 사초 기록이 있으니 유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태종은 또 불쾌해졌다. 이따위 낭설이 어디서 나온 것인가. 활 한 번 쏜 것을 사관놈이 잘못 보고 헛소리를 한 것 아닌가. 내 이러니 사관 입시를 금한 것이다. 어디 그럼 가까이 와서 내 하는 일을 분명히 지켜봐라. 그 뒤로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씩 사관이 어전 회의 같은 데 입시를 했다.

태종 4년에는 그가 말을 타다가 낙마한 사건이 있었다. 태종의 첫마디는 “사관에게 알리지 마라”였으니 그 역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모양이다.

이때는 태조의 친위 대신들이 쟁쟁한 권한을 행사하던 때다. 친위 대신들은 왕의 뜻을 들어 사관 입시를 반대했고 반대파의 대신들은 음으로 양으로 계속해서 압력을 넣었다. 그 기간이 10년이나 된다.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지만 태종 9년 들어 정식으로 태조의 실록을 편찬하기로 정리가 되었다. 다음 해에는 실록 작성을 위해 그동안의 사초를 바치라는 지시가 내렸지만 편찬시기 문제로 계속 논란이 이어지더니 드디어 태종 10년에야 정식으로 사관 입시가 허용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실록 작성은 국가에 필요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세력 간의 명분 싸움이 계속된 끝에 결국 명분이 이긴 것이라 생각된다.

서서히 태조 친위세력들의 힘이 사라져 가게 되었으며 아무래도 왕을 견제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실록' 작성을 빙자하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세력 때문에 사관 입시도 되고 실록도 만들어졌지만 기이하게도 왕은 실록을 열람할 수 없다는 규정까지 만들어져 버렸다. 자신의 언행이 아니라 선왕들의 언행도 확인할 수 없게 해놨으니 왕으로서는 답답하기도 하고 분통이 터지기도 했을 것이다.

실록의 기본이 되는 사초도 편찬이 끝나면 지금의 세검정에서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 글자를 없애 버리고 실록은 사고에 자물쇠를 채워 단단히 보관했다.

오백 년을 그런 식으로 꽁꽁 묶어 놓았던 자료를 자랑만 하기에는 개운치가 않다. 선대의 체험은 기밀로 하고 오직 고대 중국 왕들의 가르침만 달달 외워 그 사례만을 가지고 국정이 논의되었다. 이것이 조선왕조의 실상이다.

명나라의 태조께서 이렇게 하셨습니다. 당 고조께서 이르시기를, 맹자 편에서 말씀하시기를, 한 고조 때에, 이런 것들이 모든 대신들의 발언 중 가장 많은 인용구다. 왕이 직접 기우제를 올리기 위해 선대왕 시절에 왕이 직접 올린 예를 찾아보라 하니 예조에서는 몇날 며칠을 뒤적인 끝에 중국 자료를 끄집어 왔다. 광해군 때의 일이다.

실록의 경우는 그렇고, 승정원일기는 비교적 오랫동안 개방되었다. 왕의 어떤 지시가 내리면 승정원일기를 살펴보고 답변을 올리겠노라는 응대가 많다. 그것도 한 시절이었다. 열람 신청이 많아지자 정조 7년에 왕명으로 그것도 엄금하고 말았다. 실록과 같이 엄하게 간수할 것이며 특별한 경우라 할지라도 허가를 받아서 열람해야 하며 열람자의 관등 직책을 엄히 기록하도록 했다.

사실상 이로서 승정원일기도 자물쇠가 채워지고 말았다. 그토록 꼼꼼하게 작성하고도 대외비로 막아 버린 문서기록. 그것이 자랑스러운 두 기록의 실체다.

<참고 문헌>조선왕조실록/국조보감/승정원일기: 소통의 정치를 논하다(박홍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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