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외침, '이웃을 잃어버리는 교회'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역할에 대한 반성. 이다현 (동덕여자대학교 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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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외침, '이웃을 잃어버리는 교회'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역할에 대한 반성. 이다현 (동덕여자대학교 조교)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9.09.21 19: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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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그동안 여성에게 많은 요구를 해왔습니다. 가임기 여성으로서 출산을 하기를, 하지만 경제적 능력 또한 놓치지 않기를. 엄마로서 바깥일보다는 가정에 충실하기를, 하지만 맘충이 되지는 말기를. 남자보다 능력이 약하기를, 하지만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더 많이 부담하게 하지는 말기를. 어디서든 성폭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 조신하기를, 하지만 남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몸매를 가꾸고 아름답기를. 이 이야기들은 사회가 여자들에게 하는 이중적 메시지들입니다.
이다현 (동덕여자대학교 조교)
이다현 (동덕여자대학교 조교)

안녕하세요, 저는 졸업 후 모교에서 조교로 근무하고 있는 이다현이라고 합니다. 20대 청년으로서 이 자리에서 발제를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각자의 고뇌와 씨름을 하며 고군분투를 하고 계실 목회자님들 앞에서, 외람되지만, 청년 평신도로서 교회를 바라봐 온 제 시각을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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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말씀드릴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20대 여성 청년으로서 느끼는 한국교회의 문제점 두 가지,

두 번째로는 한국교회에 바라는 점입니다. 먼저 첫 번째 주제입니다. 많은 교계 언론에서 한국 교회의 위기를 말합니다. 청년들이 점점 감소하는 교회, 교회를 다니지 않는 크리스천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 등의 문제가 한국 교회에 존재합니다. 저는 많은 목사님들이 이 문제들을 다원주의가 강조되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키는 문제로 환원하는 것을 봐왔습니다.

그러나 정말 지금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들이, 성도들의 믿음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저는 의문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충성되이 교회에 봉사하던 청년들이 왜 교회 밖으로 나가는지, 교회는 왜 세상으로부터 계속 신뢰를 잃어 가는지, 조금 더 다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먼저 교회가 현재와 호흡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를 말하고 싶습니다. 현재와 함께 호흡한다는 것은, 교회 밖 우리의 이웃들이 현재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알고 함께 그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며 돕는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세월호 사고가 일어났을 때, 수많은 국민들이 슬퍼하고 좌절했습니다.

물론 교회도 잠시 동안은 함께 우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세월호가 정치적 쟁점이 되어버리면서 교회는 발 빠르게 우는 자들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망언을 하는 목사님들이 있었고, 유가족들은 외면하는 교회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은 언제나처럼 평화로웠습니다.

교회 밖에서 어떤 고통이 있든지, 교회 안은 평안하고 건재합니다. 은혜 받는 신실한 성도들이 가득합니다. 교회는 이후로도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들에 대해 사회적 봉사의 책무는 드물게 실천했을지언정 실제로 행동하기는 망설이고, 교회 내의 비판적 목소리를 견제했습니다.

한국사회는 지금 꽤 많은 시련을 겪어내고 있습니다. 사회적 참사들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최근 몇 년간 약자들은 집을 잃고, 일터를 잃고, 가족을 잃었습니다. 어처구니없이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이 일에 사람들은 무관심합니다. 당장 내가 피해 입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라면 이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의 교회들이 함께 슬퍼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우는 건 당사자의 아픔에 귀 기울일 때 가능합니다.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그들의 고통이고, 그 고통은 왜 생겼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등을요. 하지만 교회는 단순히 세상은 악하다는 말로 이 모든 고통들을 단번에 설명합니다.

그들의 고통이 무엇인지 절대로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악한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밖 사람들이 겪는 노동의 문제, 청년문제, 여성문제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회의 흐름과 무관하게 교회가 무조건적 믿음과 감사를 강요할수록 교회의 언어는 세상과 유리됩니다. 청년들은 점차 교회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공허한 선포들로 가득한 교회에 점차 발걸음을 끊게 됩니다.

두 번째 문제는, 교회가 여성주의적 시각에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저는 대한민국에 사는 20대 여성으로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가집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여성혐오 문제가 대두되면서, 많은 20, 30대 여성들은 무엇이 문제였는지 차츰 인지하며 여성의 시각에서 많은 문제들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는 그동안 여성에게 많은 요구를 해왔습니다. 가임기 여성으로서 출산을 하기를, 하지만 경제적 능력 또한 놓치지 않기를. 엄마로서 바깥일보다는 가정에 충실하기를, 하지만 맘충이 되지는 말기를. 남자보다 능력이 약하기를, 하지만 남자가 데이트 비용을 더 많이 부담하게 하지는 말기를. 어디서든 성폭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 조신하기를, 하지만 남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몸매를 가꾸고 아름답기를. 이 이야기들은 사회가 여자들에게 하는 이중적 메시지들입니다.

이 외에도 많은 이중 메시지들 속에서 여성들은 사회의 시선에 맞추어 스스로를 검열해왔습니다. 지금 사회에서의 페미니즘의 대두는, 이제까지 이 메시지들에 반기를 들지 못했던 여성들이, 수많은 여성 대상 살인사건과 폭력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눈을 뜨기 시작한 결과입니다.

여성들이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한 채 사회적 기준에 맞추기 위해 발버둥쳐왔으나, 그렇게 해도 결국 돌아오는 건 비합리적이고 불평등한 결과였습니다. 이제 20, 30대 여성들은, 출산율이 낮으니 여자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라는 사회의 요구와 여자는 회사에서 뽑아봤자 결혼하면 애 낳고 쉬어버리니 뽑아선 안 된다는 유리천장의 괴리를 견딜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동등하다고 믿었던 관계에서 약자가 되어 데이트폭력을 당하다 죽기까지 하는 여성들을 보며, 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 조현병 환자라는 남성에게 죽임을 당해야 했던 사건을 보며 여성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세상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실은 전혀 놀랍지 않지만, 여성들을 향한 이중 메시지는 교회에서 매우 자주 들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회에서 들려주는 이중 메시지는 그 힘이 약하다고 느껴질 정도입니다. 여성의 입장에 서보지 못했던 수많은 남성 목회자들이 성경의 힘을 빌어 여자 성도들에게 들려주는 이중 메시지는 그 힘이 더욱 강합니다.

자녀를 낳고 사회생활을 일찌감치 포기한 채 돌봄과 가사노동에만 매몰된 여자 집사님들을 향해 이는 하나님이 주신 일이니 그저 순종하라는 메시지를 줍니다. 여성들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하고 사회적 권력을 획득한 건 남성들이지만, 마치 그것이 성경의 메시지인 것처럼 선포됩니다.

또한 집에만 있으면서 외모를 가꾸지 않으면 남편에게 성적 만족을 주지 못하므로 남편을 위해 외모 가꾸기도 소홀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대단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강대상에서 선포됩니다. 남성 목회자들의 남성주의 시각으로만 성경이 해석되고 그것이 설교가 됩니다. 명백한 여성혐오적 설교 내용이지만 그 메시지에 거부감을 갖는 순간 믿음이 없는 성도가 됩니다.

게다가 우리는 지난 몇 년간 다수의 목회자 성폭력 사태를 목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조차 여성들은 남성들과 동등하지 못합니다. 성적 존재로 인식되고, 검열되고, 교회가 바라는 여성상이 되도록 교육받습니다.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교회 내에 없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교회의 권력자인 남성 목회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 내 직분의 성비로도 교회가 여성차별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여성 목사 안수는 일부 소수 교단에서만 허용하고, 여성들은 교회의 중요한 결정사항을 정하는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청년들은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성별로 인해 그 중요성의 차이가 있다고 말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다른 성별로 인해서 직분이나 지위에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여성 인권의 유린과 직결됩니다.

이처럼 수많은 사회 문제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기존의 세계관이 이 문제들을 전부 설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회문제에 예민한 20대 청년들은 구시대적 입장을 견지하는 교회에 더 이상 동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주제로, 한국 교회에 바라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교회가 현재와 함께 호흡하는 감각을 잃어버린다면, 기존의 청년들 뿐 아니라 우리의 이웃까지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할 이웃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제가 배운 그리스도인이란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나 자신을 사랑함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이, 우리가 우리 교회와 교인들을 사랑함과 같이 세상을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고는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기만적이듯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에게 관심이 없는 것 또한 기만적입니다.

먼저 사랑받은 자들은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안고 있고, 그것이 왜 그들에게 문제이며, 우리도 왜 그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쏟아지는 온갖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채, 우리끼리 이 성곽 안에서 행복하면 그만일까요? 개인적 신앙과 내적인 문제에만 천착한 채로 예언자적 목소리를 잃어버리고, 이웃을 잃어버린 한국교회에는 죄가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한국교회는 사랑할 이웃을 몽땅 잃어버린 채, 고독한 성이 되어 성곽 안에서 자기들끼리 먹고 마시고 즐기는 우스꽝스러운 집단이 될 것입니다. 아무도 복음을 궁금해 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우리의 선포를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가 논의를 진전시켜나간 주제들 중 어떤 것에도 일반적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더 많은 논의들이 이뤄져야 합니다. 사회적 쟁점들에 관한 논의 중 몇은 이제 시작 단계에 있으며, 상당수는 퇴보한 상태에 있기도 합니다.

이미 사회적 약자인 성소수자들에 대해 당당히 혐오감정을 밝히는 교회, 피해 받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지워지는 교회, 난민과 탈북민에 폐쇄적인 교회 등 정치적 보수 집단이 싫어하는 것은 그대로 함께 싫어하는 교회가 지금의 한국교회인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 내에는 더 많은 약자들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고, 더 자유로운 공론장이 필요하며, 더 평등한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종교개혁 이후 성직자들은 신적 위치에서 내려왔지만, 오늘날 크고 힘 있는 교회의 목회자들은 여전히 신적 대우를 받습니다.

성도들은 평신도라는 이름에 갇혀 교회의 각종 중요 결정사항에 의견을 보태지 못합니다. 교회가 목회자 중심으로 시스템을 구동한 결과, 교회 내부에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에 동의하며 사회 문제에는 무관심한 사람들만 남아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나 초라한 행색으로 여러 마을을 다니며 아프고 소외된 자들을 만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예수님이 어둠 안에 있던 우리를 어떻게 찾아오셨는지도 너무나 잘 기억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울타리 밖을 나서지 않은 채,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가라고 명령하지 않은 채 그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속에서 그 칭송받음에 만족하며 우는 자들의 곁에 직접 가지 않으셨다면 어땠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기 위해 이 땅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이웃을 알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교회가 강자를 대변하고 개인의 복을 구하는 곳이 아닌,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울며 세상 속에서 예언자적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우리는 늘 말을 하고 글을 씁니다. 특히나 하나님의 성전에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계시는 목회자님들은 말하고 글쓰기의 빈도와 밀도가 더 높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언제든 적절히 지혜로운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으실 것 같습니다. 저는 평범한 청년 그리스도인 중 한 사람으로서, 청년들을 사랑으로 품기 위해 노력하시는 수많은 사역자님들을 봐왔습니다. 그분들의 기도와 포용으로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진로에 대해 고민할 때, 가족 전도로 아파할 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을 때, 저는 저의 고통과 함께 울어주시는 좋은 사역자분들을 만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겸손한 자세를 보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지난주, 저는 마음이 많이 괴로웠습니다.

이 발제가 혹여나 공허한 외침이 될까 두려웠습니다. 저 또한 이 발제를 통해 제가 생각하는 옳은 방향을 말씀드렸지만, 좋은 말과 좋은 글은 그 사람을 대변하지 못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발제하며 저는 두렵고 떨립니다. 어쩌면 제 발제는 그저 20대의 의견이라는 취급을 받을 수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주, 또는 매 만남마다 옳은 말과 바른 선포를 해나가시는 목회자님들께서 부디 말과 삶이 일치하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변하고 성도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하는 사명이 하나님 앞에서도 진정 옳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상 부족한 발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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