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성지를 가다 이강근 박사가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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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성지를 가다 이강근 박사가 소개한다.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0.02.20 14: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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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8월 20일에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478호 결의(찬성 14, 반대 0, 기권 1(미국))는 이스라엘의 주장을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하며 모든 회원국들의 외교관들은 예루살렘에서 철수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 결의에 따라 이스라엘에 있는 각국의 대사관과 대표부는 예루살렘 대신 텔아비브에 있으며 사실상 텔아비브가 이스라엘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이강근 박사,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성지를 소개한다.
이강근 박사,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성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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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히브리어: יְרוּשָׁלַיִם 예루샬라임, 아랍어: القدس 알쿠드스[*], 영어: Jerusalem, 문화어: 꾸드스)은 예로부터 종교 분쟁에서 불씨가 되어온 중동에 있는 도시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중심부의 지중해 연안 평야와 요르단 강에서 이어지는 그레이트 리프트 밸리 사이에 자리하고 있으며 세계 3대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성지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에서 적지 않은 문제점을 낳고 있으며 도시가 행정상 동과 서로 나뉘어 있는 상태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이를 수도로 삼고 있으나, 국제 사회상 인정하지 않고 텔아비브를 사실상 수도로 삼았다.

지명, 예루살렘은 히브리어로 "평화의 마을"을 뜻한다. 성경에서는 '예루샬라임'(Yerushalaim)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예루살렘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고대 가나안 신앙에 등장하는 평화의 신인 샬림(Shalim)을 모시는 사원이 있었기 때문에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랍어 이름인 알꾸드스(알쿠드스)는 아랍어로 "신성한 도시"를 뜻한다. 알꾸드스라는 지명은 9세기에 무슬림 세력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뒤부터 처음 등장했다.

지리, 예루살렘은 사해의 북쪽으로 약 28km 떨어져 유대아 산맥의 언저리의 해발 780m에 위치하며, 지형적으로 동쪽으로는 키드론 골짜기와 남쪽으로는 힌놈 골짜기의 가운데 솟은 구릉에 기원전 약 3000년 이래로 사람들이 부락을 이루어 사는 것으로 추측된다. 산악 지형이 가진 장점을 살려 예루살렘은 외부 침입을 쉽게 막을 수 있는 성채를 중심으로 서서히 도시의 윤곽이 잡혔다.

역사, 통일 왕국 시대

오늘날과 같은 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기원전 약 1000년경에 이스라엘의 선조 다윗 왕이 구릉에 위치한 '시온의 성'이라 불리던 도시를 정복한 후 유대인들은 이곳을 '다윗의 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무엘 하 5,7: 역대기 상11, 4-7: 열왕기 상 8, 7).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민족에 중요한 뜻을 지니게 되었다. 다윗의 이름 밑에 유대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이 합병된 후, 예루살렘은 통일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사무엘 하 2, 4: 5, 3). 이렇게 이곳은 다윗 왕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하면서 역사의 중심무대로 등장한다.

다윗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은 도시에 왕궁과 신전 및 성채를 새로이 건설하고 언약궤를 신전 안에 보관하였다고 타나크에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열왕기 상 6-8).

남북조와 이민족의 지배, 솔로몬이 세상을 떠나자(BC 925, 이설도 있다.) 이스라엘은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고, 예루살렘은 남조(南朝) 유다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기원전 587년 신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느부갓네살)에게 정복되어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에 억류되었다.

기원전 537년 페르시아 왕 키루스 2세에게 석방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로마 공화정에 정복된 이래로 원래의 하스몬 왕조와 일진일퇴 끝에 기원전 37년 로마의 지원을 받은 헤로데 대왕이 협공으로 로마령으로 확정하고 분봉왕 즉위와 동시에 성전을 개축하였다.

70, 135년의 두 차례 봉기가 있은 후 로마는 전 유대인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하고 '이방인의 도시'라 했다. 4세기에 로마가 기독교화됨에 따라 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중세, 638년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했으나, 그들은 기독교의 성지를 존중하였다. 동시에 이슬람 사원이 솔로몬의 성전 터에 세워졌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웠다.

1187년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1260년 훌라구의 몽골군이 예루살렘 근방까지 육박했으나 바이바르스가 이들을 몰아냄으로써 맘루크 왕조의 성지 관할권이 확립되었다.

오스만 제국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셀림 1세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400년 내내 지배하였다. 크림 전쟁 중에는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등의 성지 관리권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1차 대전 중인 1917년 영국에 점령되어 위임통치령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이민이 진척되었다.

이스라엘 건국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동예루살렘(요르단 령)과 서 예루살렘(이스라엘령)으로 분리되었다. 19676월 제3차 중동 전쟁 당시에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전체를 인위적으로 점령하였다.

1980730일 이스라엘 국회는 예루살렘 전체를 "분리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수도"로 규정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관한 기본법을 통과시켰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80820일에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478호 결의(찬성 14, 반대 0, 기권 1(미국))는 이스라엘의 주장을 국제법 위반으로 간주하며 모든 회원국들의 외교관들은 예루살렘에서 철수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 결의에 따라 이스라엘에 있는 각국의 대사관과 대표부는 예루살렘 대신 텔아비브에 있으며 사실상 텔아비브가 이스라엘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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