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미국 캔자스주 고등학교 육상선수권 대회에서 흔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여자 3,200미터 릴레이에서 우승한 팀이 실격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더 이례적이었다. 이 실격판정으로 인해서 우승을 하게 된 팀이 바로 돌아서서 자신들의 메달을 실격판정을 받은 팀에게 주었던 것이다.
1위로 들어온 성 마리아 콜겐 고등학교의 한 주자가 바통을 넘길 때 주어진 코스바깥으로 나갔다고 심판이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1위를 놓친 것이다. 따라서 2위였던 마라나타 아카데미가 1위로 올라서게 되었다.
금메달을 받은 후, 마라나타 학교 소녀들은 성 마리아 학교 소녀들의 얼굴에 드리운 몹시 실망한 표정을 보고 각자 받은 금메달을 그들에게 주었다.
세계 스포츠 사상 이런 일은 들어본 적이 없는 초유의 사건이었다. 경쟁자의 실격으로 인해 어부지리로 메달을 받은 사람이 메달을 박탈당한 이를 위로하는 장면조차 보기 드문 일 아니던가. 그런데 자신들이 받은 금메달을 실격 당한 이들에게 모두 다 내어주는 일은 역사상 없었다. 기껏해야 18살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들의 감동적인 리얼 스토리이다.
그 앳된 소녀들이 왜 그렇게 했을까? 마라나타 고등학교의 버니 잘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금년 표어는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뛰는 것이었습니다.” 소녀들이 이를 행동에 옮긴 결과, 그들의 이야기는 캔자스 주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하나님의 이름이 크게 높임을 받았다. 아, 정말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미담이다.
무한경쟁 시대, ‘양보는 결코 미덕이 아니다’라고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 ‘양보’는 ‘뒤쳐짐’과 동의어로 속한다. 지금 젊은이들의 세계에선 양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힘이 든다. 자기밖에 모르는 교육과 가치관이 그리 만든 것이다.
마라나타 고등학교 소녀들이 자신들이 딴 메달을 양보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자기들만 찬사와 영광을 받고 지금쯤 그 메달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녹이 슬어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소녀들이 자신이 정당하게 받은 금메달을 실격당한 팀에게 양보했을 땐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 내 영광이 우선인가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인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성경 속에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한 이들도 있다(요 12:43).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은 자신의 영광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3-4)
이 말씀 따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것이 더 나음을 알고 우리 자신의 이익과 성취를 옆으로 제쳐놓을 때,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를 통해서도 영화롭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소요리 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지가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Man's chief end is to glorify God, and to enjoy him)이다. 나의 남은 생의 표어도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필자 신성욱 교수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이다.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공부했음, University of Pretoria에서 공부했음, 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음,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언어학 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