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카럴) 양파 한 뿌리의 선행. 오세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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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카럴) 양파 한 뿌리의 선행. 오세열 교수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1.02.20 1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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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발버둥치자 양파뿌리는 끊어져 버렸고 여인은 다시 불구덩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를 구원하고자 했던 천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자리를 떠나갔다. 자신밖에 모르는 사악한 여인, 그런 여인마저 가엾게 여기는 수호천사, 그리고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필자 오세열 교수는 Midwest 대학원 리더십교수며, 성신여대 명예교수, 목회학 박사(D.Min),목사, 경영학박사(고대)이다.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형제들’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마을에 이기적이고 마음이 사악한 여인이 있었다. 어느 날 이 여인이 죽게 되자 사탄은 주저없이 이 여자를 지옥불 속에 던져 버렸다. 그런데 이 여인의 수호천사는 그녀가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는 것을 불쌍히 여겨 하나님에게 간청했다. “저 불쌍한 여인을 살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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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하나님은 “그 여인이 생전에 착한 일을 한 가지만이라도 했다면 고려를 해보겠다”고 답했다. 수호천사는 그녀가 생전에 했던 행위를 천국의 영상을 통해 돌려 보았다. 마침내 그녀가 했던 단 하나의 선행을 찾아냈다. 그녀가 농사를 지을 때 양파 한 뿌리를 캐서 지나가는 거지에게 던져 준 일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은 “그 양파 한 뿌리를 그녀에게 던져주고 그것을 잡고 천국으로 오도록 하라”고 말했다. 수호천사의 호소에 하나님은 그녀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수호천사는 양파 한 뿌리를 그녀에게 던져주었다. 수호천사는 그녀가 양파 뿌리를 잡고 나올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천사가 그녀를 거의 다 끌어올렸을 무렵 지옥의 불바다 속에 있던 많은 죄인들이 자신들도 살겠다며 그녀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함을 지르며 죄인들을 마구 발로 차서 떨어뜨렸다. ‘저리가 이 것들아 이 양파는 내 것이야!’.

그녀가 발버둥치자 양파뿌리는 끊어져 버렸고 여인은 다시 불구덩이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를 구원하고자 했던 천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자리를 떠나갔다. 자신밖에 모르는 사악한 여인, 그런 여인마저 가엾게 여기는 수호천사, 그리고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여인의 유일한 선행은 양파 한 뿌리의 나눔이다. 성경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5-40)”는 말씀이 있다.

양파 한 뿌리로 거지를 도와준 것이 곧 하나님에게 한 선행이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가르쳐준다. 만일 그 거지가 예수님이란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큰 선행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서 보잘것 없는 자에게 한 착한 일도 하나님을 감동시키며 그의 긍휼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물론 구원은 우리의 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기독교의 사랑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는 감정의 기복이 있으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에는 기복이 없다. 때때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 응답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불평하고 믿음을 저버리기도 한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설교를 통해서나 성경에서 많이 듣고 읽는다. 심지어 대형교회인 사랑의 교회의 공식적인 표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자하는 감정을 우리안에서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솔직한 고백이다.

연인끼리의 사랑이나 부모의 자식사랑, 친구사이의 우정 등은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 실체가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그 해답은 성경에 나와 있다. 하나님의 정의는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와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계명을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1 5:2).”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컴퓨터시대에는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소통한다’라는 명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은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사랑한다’라는 명제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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