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건국의 씨앗, 드레퓌스 사건. 이 정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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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건국의 씨앗, 드레퓌스 사건. 이 정권 목사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1.03.30 1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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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대법원은 드레퓌스를 무죄 방면했다. 드레퓌스에게 씌워진 모든 혐의가 벗겨지고 그는 대위에서 중령(소장까지-류모세, 유대인 바로 보기)으로 진급하며 보상을 받았다. 피카르트 중령은 장군이 되고 전쟁성 장관을 역임했으며 에밀 졸라는 두려움을 모르는 정의의 투사로서 명성을 얻었다. 드레퓌스를 지지하던 친드레퓌스파는 1906년 선거에서 압승했다.
영화 드레퓌스 사건

드레퓌스 사건은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휩쓸었던 반유대주의와 이 때문에 희생된 무고한 유대인 드레퓌스의 무죄 여부를 놓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군부 등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이 격돌했던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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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카톨릭 교회는 드레퓌스 사건 중에 진실을 외면한 채 거짓을 옹호하고 반유대주의 선동에 앞장서며 공화제를 반대했다. 가톨릭교회의 적극적인 반드레퓌스 운동은 결국 드레퓌스의 무죄로 끝나며 프랑스의 정교분리 원칙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내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실과 양심이 거짓과 음모를 굴복시키는 거대한 드라마로 종결되었다. 결국 드레퓌스 사건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이 있는 고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서 유대 국가를 세워야 만이 디아스포라 생활의 고난과 박해, 반유대주의를 마칠 수 있다는 시오니즘 운동으로 발전하고, 결국 이스라엘을 건국하게 한다.

드레퓌스 사건의 주인공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피스와 두 명의 기독교인 장교 에스테라지와 피카르트와 한 명의 소설가 에밀 졸라가 등장한다.

이 사건은 1893년 ‘에스테라지 연애 사건’에서 시작된다. 프랑스 군 참모부의 에스테라지 중령은 바람기를 주체할 줄 모르는 플레이보이였다. 그는 부인들과 뭇 여성들과 인생을 즐기는 게 유일한 목적인 사람이었다. 에스테라지 중령의 애정 행각과 도박, 방탕한 소비생활은 계속 이어졌는데, 그 비용은 군사 기밀을 프랑스 내의 독일 대사관에 팔아넘김으로써 마련했다.

그 당시 독일은, 영국, 프랑스에 비해 근대화가 한참 늦어, 황제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 수상의 체제를 출범시키면서 빠른 속도로 추격전을 펼쳤다.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은,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통일 독일 제국을 선포했다. 프랑스 인의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한 때에, 독일 측에 군사정보를 넘긴 에스테라지의 간첩행위는 매국행위였다.

내부 스파이를 조사하던 프랑스 감찰부는 친필로 쓴 메모인 ‘세부 문서’를 발견하고 참모부의 명단을 중심으로 필적 조회를 하며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감찰부는 한명한명 이름을 짚으며 내려오다가 ‘알프레드 드레퓌스’라는 이름을 보고 조사를 종결하기로 결정했다. 드레퓌스는 프랑스 참모부 내의 유일한 유대인이었고, 왕당파로 구성된 참모부 내에 유일한 공화파였다. 영문을 모르는 드레퓌스는 곧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체포 직후 정보부는 필적 조사를 통해 진짜 범인인 에스테라지를 찾아냈다. 그러나 프랑스 귀족 출신이고 훈장까지 받은 에스테라지를 간첩 혐의로 체포한다는 것은 군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라고 모의하고, 드레퓌스를 사건의 희생양으로 삼아 남미에 있는 악마의 섬에서 종신 유배형을 받도록 한다.

억울하게 역사 속에 파묻혀 버릴 드레퓌스를 희대의 사건 주인공으로 부각시킨 사람은 또 다른 기독교도인 조지 피카르트 중령이었다. 피카르트 중령은 사건을 파악하고 사실을 알게 된 후, 상관을 찾아 갔는데, 그 상관은 ‘입 닥치고 잠잠히 있으라’고 위협하고, ‘당신이 한 유대인 문제에 간섭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란 말을 듣게 된다.

피카르트는 이 문제를 유대인 문제, 즉 인종의 문제가 아닌 ’인권‘의 문제로 인식했다. 그는 거대한 국가 권력이 한 개인의 인생을 파탄으로 내 모는 이 상황을 기독교인으로서 잠잠히 넘길 수 없었다.

피카르트는 드레퓌스 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했다. 군은 피카르트를 강등해 튀니지 전선에 배속시켜 아랍 부족들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피카르트는 드레퓌스 사건의 문서를 언론에 넘겼고, 이는 순식간에 프랑스 사회를 뒤집어 놓았다.

사회와 언론은 반드레퓌스파와 친드레퓌스파로 나뉘었으며, 군 참모부는 자체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무리한 연극을 계획했다. 계획된 재판에서 에스테라지는 무죄 석방되고, 피카르트는 무고한 선임자를 비방했다는 죄명을 뒤집어썼다. 그러나 군의 억지 재판은 오히려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감지되었고, 군의 무리수로 인해 국민들은 친드레퓌스파에 점점 더 가담하게 되었다.

여기에 한 명의 소설가 에밀 졸라가 있다. 1898년 에밀 졸라는 ‘나는 고발(비난)한다’는 글을 “여명” 지 1면 사설란에 실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정부를 비판하고, 군의 불명예를 감추기 위해 드레퓌스를 음해하고 인간성에 대한 중대한 범죄를 프랑스 군이 행하였다고 비난했다.

참고로, 마크 트웨인은 뉴욕 헤럴드에 이렇게 기고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와 아첨꾼은 한 해에도 100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에밀 졸라 같은 인물이 나오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결과적으로 많은 저항도 있었지만, 국민은 에밀 졸라의 글의 영향으로 저항군을 조직해 친드레퓌스파에 가담했다. 이후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증거를 조작하던 앙리 소령이 사실이 밝혀짐을 두려워하여 자살하고, 사건의 진범인 에스테라지가 모든 사실을 실토함으로써 사건은 종결을 맺는다.

필자  이정권 목사 

결과적으로 1906년 대법원은 드레퓌스를 무죄 방면했다. 드레퓌스에게 씌워진 모든 혐의가 벗겨지고 그는 대위에서 중령(소장까지-류모세, 유대인 바로 보기)으로 진급하며 보상을 받았다. 피카르트 중령은 장군이 되고 전쟁성 장관을 역임했으며 에밀 졸라는 두려움을 모르는 정의의 투사로서 명성을 얻었다. 드레퓌스를 지지하던 친드레퓌스파는 1906년 선거에서 압승했다. 이는 드라마틱한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만 정부와 군은 지속적으로 사건 은폐와 반유대주의로 사실 조작과 뒤집기를 시도했던 사건이며 정의와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드레퓌스 사건에서 보는 반유대주의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있는 고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서 유대 국가를 세워야 만이 디아스포라 생활의 고난과 박해, 반유대주의를 마칠 수 있다는, 파리에 주재하며 이 사건을 지켜본 유대계 오스트리아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의 주장인 시오니즘 운동이 시작된다.

그의 주도로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오니스트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시오니스트 기구와 조직을 조직하였다. 시오니스트 회의는 이 후 1901년까지 5차례 개최되었다. 비록 테오도르 헤이츨이 1904년에 사망하였으나 그의 노력은 훗날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의 씨앗이 되었다.  글 이정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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