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이스라엘 건국-헤르쯜과 시오니즘과 밸푸어 선언. 이정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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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칼럼 )이스라엘 건국-헤르쯜과 시오니즘과 밸푸어 선언. 이정권 목사
  • 박동현
  • 승인 2021.04.13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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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니즘에 호의적이었던 유대인들은 가난한 서민 계층이었기에, 헤르쯜은 재정적 부담과 1차 시오니즘 회의 참가자들의 경비를 사비로 충당했다. 그는, 50년 후에 이스라엘 국가 탄생을 예언했는데, 정확히 52년 후인 1948년에 이뤄졌다. 이스라엘에서는 다비드 벤구리온(초대 총리), 하임 바이쯔만(초대 대통령)과 함께 국부로 칭송되고 있다.
이스라엘 - 1972 년경 이스라엘에서 인쇄 된 우표, 현대 정치적 시온주의의 아버지의 초상화, 테오도르 헤르 츨 '박사 벤자민 지브 헤르 츨'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 1972 년경 이스라엘에서 인쇄 된 우표, 현대 정치적 시온주의의 아버지의 초상화, 테오도르 헤르 츨 '박사 벤자민 지브 헤르 츨'을 보여줍니다

테오도르 헤르쯜(Theodor Herzl, 1860–1904)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한 유대인이며, 은행가로 백만장자가 된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가, 아버지가 파산할 때에, 석유 상인인 대부호의 딸과 결혼한다. 신문 기자 겸 작가로 활동하다가, 파리에 특파원으로 가게 되어, 드레퓌스 사건을 목격하고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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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대인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유럽인들 속에 동화되어 살아간다(살롱 유대인이라 한다)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직시하며, 유대인에게도 조국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해결책은 “유대국가의 창설 외에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헤르쯜은 1896년 2월, 《유대 국가: 유대인 문제의 현대적 해결 시도》 라는 책을 펴내 자신의 생각을 발표, 시오니즘의 정치적 지도자가 된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시오니즘 세계대회는 그의 노력의 결실이며, 이 대회에서 "팔레스타인에 국제법으로 보장되는 유대인의 조국을 건설한다"는 선언이 나왔다.

시오니즘에 호의적이었던 유대인들은 가난한 서민 계층이었기에, 헤르쯜은 재정적 부담과 1차 시오니즘 회의 참가자들의 경비를 사비로 충당했다. 그는, 50년 후에 이스라엘 국가 탄생을 예언했는데, 정확히 52년 후인 1948년에 이뤄졌다. 이스라엘에서는 다비드 벤구리온(초대 총리), 하임 바이쯔만(초대 대통령)과 함께 국부로 칭송되고 있다.

시오니즘(Zionism)은 ‘시온(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는 즉, 세계 곳곳의 유대인들이 시온에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됨으로써 실현되었다. 유대인들은 매년 이국땅에서 유월절을 지키며, 그 마무리에 “내년 유월절은 예루살렘에서…”를 외쳤다.

민족주의 열풍이 불면서 시오니즘도 '자본주의의 착취와 제국주의적 폭압에 병든 유럽을 버리고 유대인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신천지를 개척하자'라는 메시지가 강력하게 퍼지기 시작했고, 러시아 제국의 반유대주의 폭동(포그롬)이 심각해지면서 동유럽 유대인들의 대규모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필자 이정권 목사
필자 이정권 목사

시오니즘 운동이 구체화되면서 예상 밖의 현상도 나타났다.

첫째, 대부분의 랍비들이 세속적인 시오니즘 운동에 반대하고 나섰다. 누려온 지위에 위협을 염려했고, 이스라엘 국가는 메시아가 올 때에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둘째, 유럽사회에 동화된 세속적 유대인들도 시오니즘 운동에 반대했다.
셋째, 강력한 반유대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을 자국내에서 쫓아 내기 위해 시오니즘에 동조했다.
넷째, 다만 동유럽의 가난한 유대인들이 시오니즘에 열광적 지지를 보냈다. 그런데,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 국가를 세우려 할 때에,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다.

유대 이민의 초기에는 충돌이 없었고 오히려 아랍 엘리트들은 시오니즘을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유대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강박증과, 아랍인을 미개인 취급하는 시온주의자들의 관점은 아랍인들과 충돌을 빚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유대인 이민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유대인 공동체가 아랍인에게 2등 시민의 지위를 강요하자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시오니즘에 큰 반감을 품게 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이 선포됨과 동시에 주변 아랍국가들은 일제히 이스라엘에 선전 포고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는데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에서는 아랍계 팔레스타인인들이 추방되고 주변 아랍국가에서는 유대인들이 추방되면서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팔레스타인의 분쟁과 갈등이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을 도운 영국의 밸푸어 선언은, 복잡한 1차 세계대전의 계산 속에서 영국이 일구삼언을 한 약속 중의 하나다.

첫째는 프랑스와 영국(사이크스-피코 협정)이 아랍(팔레스타인)지역의 남부와 북부를 나누어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둘째는 영국이 아랍지도자 후세인에게 1915년 터키의 배후에 있는 아랍 민족이 반란을 일으켜 주면 종전 후 아랍 독립 왕국을 세워주겠다고 약속한다(후세인-맥마흔 각서).
둘째는 헤르쩰과 로스차일드와 바이쯔만의 공로와 지혜와 정치적 노력으로 얻은 영국의 “밸푸어 선언”이다. 이 선언은 영국의 전쟁 공채를 사 준 로스차일드의 돈과 아세톤을 생산해서 탄약을 확보하게 하여 영국의 윈스턴 처칠, 아서 밸푸어, 로이드 존스 같은 거물들을 시오니즘의 지지자로 만든 바이쯔만의 기술이 영향을 주었다.

1917.11.2일 영국의 외무부 장관인 아서 밸푸어가 유대인 공동체 대표인 로스차일드 앞으로 편지를 보낸다. “본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모국을 수립하는 것에 대하여 지지를 표하며, 이를 성취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영국의 위임통지가 된 팔레스타인에 박해를 피해 유대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2차 대전 후에 유대인들이 더욱 집결하며 분쟁이 거세지자, 1947년 영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넘겼고, 새 패권국가가 된 미국은 분할안을 제출하여 가결시켰다. 1948년 영국의 위임통치 기간이 끝나고 영국군이 철수하자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공화국 건국을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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