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6개월마다 반도체 집적도가 두 배씩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에 대해 지난 4월 인텔은 종말을 선언했다. 반도체를 작게 만드는 것이 한계에 왔다는 의미이지만 과학자들은 달랐다.
실리콘 외에 신소재를 활용하거나 기존 반도체와는 전혀 다른 원리로 작동하는 양자현상을 이용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 그중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분야가 '슈퍼컴퓨터'의 계산능력이다.
기존 반도체는 한정된 면적에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는 방식으로 전자기기의 용량을 키워왔다. 반도체에서 전자가 통하는 길목으로 불리는 '전류통과길'의 폭은 현재 14㎚(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까지 좁아졌다. 하지만 반도체 간 상호간섭이 발생하면서 작동하지 않을 때도 전기가 흐르는 '누설 전류량'이 많아졌다.
회로선폭을 더 줄이면 전자기기를 사용하지 않을 때도 전자가 이동해 배터리 소모량이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학술지 '네이처'는 이 같은 이유로 올해 2월 "무어의 법칙은 폐기될 것"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네이처는 "무어의 법칙 폐기가 관련 기술 발전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반도체 기술은 우수한 재료와 새로운 종류의 컴퓨터를 통해 변화를 맞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슈퍼컴퓨터의 계산능력이다.
반도체에 새로운 소재를 적용한다 하더라도 회로선폭을 14㎚까지 줄여야만 한다. 이때 슈퍼컴퓨터의 계산능력이 필요하다. 새로 개발된 반도체가 제대로 기능을 할지 점검하는 역할을 맡는다.
여러 소재를 이용해 14㎚까지 크기를 줄인 반도체를 만들 수는 있지만 일일이 성능을 평가해야 한다면 상당히 많은 연구개발(R&D) 비용과 시간이 소모된다. 류훈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슈퍼컴퓨팅본부 책임연구원은 "슈퍼컴퓨터를 활용해 실리콘 외의 소재 및 구조를 반도체에 적용했을 때 어떤 성능이 나오는지 평가할 수 있다"며 "수십~수백만 가지 경우의 수 중에서 최적화된 결과물을 얻은 뒤에 제품을 만들어 평가하면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반도체 개발에 슈퍼컴퓨터가 필요한 이유는 또 있다.
반도체는 한 개로 작동하지 않는다. 수백~수천 개의 반도체가 한 번에 작동하는데 이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구리선'이 필요하다. 반도체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구리선도 덩달아 가늘어지고 있다. 하지만 구리 등의 금속선은 10㎚ 이하로 줄어들면 문제가 생긴다. 일정한 굵기로 만들기가 어려워서 안정적으로 전류가 흐르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전선의 굵기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 역시 슈퍼컴퓨터를 활용한다. 류 책임연구원은 "슈퍼컴퓨터를 활용해 원자의 분포경향과 나노선 굵기의 상관관계를 이론적으로 규명해낼 수 있다"며 "실제 나노선을 원자 수준으로 묘사해 KISTI 슈퍼컴퓨터로 계산해 최소 1.5㎚의 가는 전선에서도 안정적으로 전류가 흐를 수 있음을 밝혀냈다"고 말했다.
슈퍼컴퓨터보다 뛰어난 계산능력을 갖고 있는 양자컴퓨터 개발에도 슈퍼컴퓨터가 도움을 줄 수 있다. 양자컴퓨터는 반도체의 원리를 벗어나 작은 입자의 움직임인 '양자현상'을 이용하는 컴퓨터를 말한다. 기존 컴퓨터보다 1억배 이상의 빠른 연산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