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 오세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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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 오세열 교수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2.06.07 11: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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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서 위로 십자가를 올려다 보면서 창을 찌를 때 예수의 옆구리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피가 롱기누스의 눈에 떨어졌다. 그는 당시 백내장 눈병을 앓고 있었는데 즉시 병이 낫고 시력을 회복했다. 이후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십자가 위의 예수를 찌른 로마 군인 '롱기누스'의 창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로마군사가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다. 그 창 끝에 예수의 피가 묻었기 때문에 그 창은 ‘거룩한 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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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성경) 요한 복음 19장 34절에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외경 니코데모 복음서에는 로마군사의 이름이 롱기누스라고 기록되어있다.

아래에서 위로 십자가를 올려다 보면서 창을 찌를 때 예수의 옆구리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피가 롱기누스의 눈에 떨어졌다. 그는 당시 백내장 눈병을 앓고 있었는데 즉시 병이 낫고 시력을 회복했다. 이후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베드로성당에 전시되어 있는 예수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

롱기누스는 나중에 카파도키아에서 복음전도를 하다가 우상숭배를 거부한 죄로 목이 잘려 순교했다. 그후 언제부턴가 이 창을 차지하면 왕이 된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4세기경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는 열성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헬레나는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예수가 못박힌 골고다 언덕에서 버려진 십자가와 녹슬은 못, 그리고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했다.

이 창은 역대 로마황제가 대대로 보관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로 믿지 않은 황제들에게는 아무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마제국이 476년 게르만 이주민들의 반란으로 몰락한 후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었다.

이 창은 8세기에 서로마제국의 샤를마뉴 대제의 손에 들어갔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의 이름이 이웃 나라에 까지 퍼져나가 사람의 이름에 사용된 사례로서 영미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John)과 유럽의 군주 샤를마뉴(Charlemagne)대제가 있다.

필자 오세열 교수는 Midwest 대학원 리더십 교수이며 성신여대 명예교수, 목회학 박사(D.Min), 목사, 경영학박사(고대)이다. 

성경에 나오는 세례요한(John Baptist)은 예수가 탄생하기 전 광야에 거주하며 길을 예비하러 온 선지자였다. 그 후 요한이란 이름의 어원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 각 나라에서 사용되었다.

미국의 존(John), 프랑스는 쟝(Jean), 이탈리아에서는 조바니(Giovanni), 스페인은 후안(Juan), 포르투칼은 주앙(joao),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는 얀(jan), 러시아에서는 이반(Ivan), 독일에서는 요하네스(Johannes) 등의 어원이 세례요한에서 유래되었다. 

성경 누가복음 7장 28절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한편 로마가 멸망한 후 유럽을 재통일한 샤를마뉴(Charlemagne)대제는 재위기간 동안 바깥으로는 광활한 영토를 정복하고, 내부적으로 화폐개혁과 행정개혁을 이루었다. 또한 문자체를 발명하고, 피뢰네 산맥을 넘어 침략해 오는 이슬람군을 패퇴시킴으로써 유럽의 각 나라로부터 왕중왕으로 추앙받았다.

각 나라들은 샤를마뉴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이름을 자국의 이름으로 바꾸어 불렀다. 프랑스는 샤를마뉴(Charlemagne)대제, 독일은 칼(Karl)대제, 영국은 찰스(Charles)대제, 스페인은 카를로스(Charlos)대제로 부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영향력있는 사람의 이름은 나라와 국경을 초월하여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샤를마뉴대제

샤를마뉴대제

믿음이 돈독했던 샤를마뉴대제는 전장에 나갈 때 이 창으로 싸워 47회 승리했으나 48회째 전투에서 창을 떨어뜨려 적군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 후 롱기누스의 창은 유럽 왕실에서 대대로 보관해 왔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 창은 아돌프 히틀러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 창에 대해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했다.

2차대전 막바지에 베를린이 함락되자 미군이 이를 탈환해서 지금은 빈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물로 등재되어 호프부르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여러 사람들이 롱기누스의 창을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롱기누스의 창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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