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리 때부터 기도는 섬세하게 하라고 배웠다. 그래서 내가 갖고 싶은 악기를 세부적인 부분까지 머릿속으로 그려가며 세심하고 구체적으로 기도하곤 했다. 악기의 음색(音色) 형태(形態) 빛깔 (色) 무게까지, 과르네리(1700년대 이태리 악기제조 장인(匠人) 는 무수히 상상하고 기도 했던 이상형의 모습 그대로였다.
바이올린 외부 색체는 전체적으로 거뭇하면서 붉은 빛깔이었고 악기의 목 부위는 좁고 가늘었다. 손가락이 짧고 손이 작은 나는 바이올린이 무겁거나 목이 두꺼우면 아무리 좋은 악기라도 오래 연습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이 과르네리는 좋은 악기 일 뿐 아니라 나를 위해 디자인한 듯한 맞춤 악기였다.
그러나 나는 과르네리를 받아 갈 수가 없었다. 바이올린을 받기 위해서는 바이올린 임대계약서와 악기보험 계약서를 써야 했다. 나는 보호자가 동행하지 않은 열일곱 살 미성년자로 계약서를 작성 활 권한이 없었다.
주최 측과 의논 끝에 계약서를 한국에 보내 엄마가 사인을 하여 보내주면 그 이후에 내가 과르네리를 가져가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다. 당시 내가 느낀 실망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바덴바텐(독일)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데뷔공연, 크고 작은 연주회, 국제콩코르 등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마인즈에서 왕복 1600Km 떨어진 함부르크에 다시 온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무대들에서 과르네리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도 속상했다.
엄마만 있었다면, 혼자 유럽 여러 곳의 콩쿠르를 참가했지만 이 때만큼 엄마의 빈자리가 크게 느꼈던 적이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입상자들이 임대 계약을 마쳤다 이윽고 수상자들의 갈라 콘서트가 열렸다.
유난하게 치열했던 2003년 콩코르에서 상위 입상자들이, 그것도 심사위원들이 최종적으로 뽑은 몇 명만이 갈라 콘서트에서 연주 할 수 있었다. 악기를 제공한 악기소유자 부유층과 장관급 인사들이 관객으로 자리 잡은 VIP 공연이었다.
공연실황은 “도이칠란트라디오” 방송으로 전역에 송출되고 다큐용 텔레비전 녹화제작도 한다고 했다. 박지혜 에세이 p103-104- 105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