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로 또 한 해가 다 저문다. 2016년은 희망으로 시작했으나 갈등으로 마친다.
광의로 보면 인류역사는 세 과정으로 늘 반복된다고 본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정(正) 반(反) 합(合)으로 설명했지만, 나는 갈등(conflict)과 소통(communication)과 신뢰(trust)라고 본다.
개인이나 단체. 국가, 내지 역사는 위 세 가지 단계로 반복된다. 나(I) 아닌 너(You)가 있는 한 갈등은 생기게 되어 있다.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는 길이 소통이다. 갈등이 극복되는 길이 소통이라면 그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행위 속에서 (희생과 내려놓음) 있어야 이뤄진다. 그럴 때 참된 신뢰가 형성되고 그 신뢰는 법과 제도보다 우월하게 된다. 저는 요즘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위의 것을 느낀다. 촛불시위가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
갈등으로 점철된 국민들에게 대통령의 소통의 행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미사여구(美辭麗句)로 말해도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소통이 없는 사람들과만 국정을 논하게 되다 보니 신뢰를 잃게 되었다. 이것은 사회의 어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저는 이것을 신학적으로도 동일하게 느낀다. 갈등은 죄인들의 모습이라면 소통은 성육신 incarnation)이다. 죄 된 인간을 위해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서 소통을 완성시켰다. ‘다~이루었다’고 십자가상에서 외치고 운명하셨다.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일까? 죄로 막혔던 갈등의 벽을 뚫어서 소통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를 구세주로 믿게 되었고, 그 신뢰는 사랑으로 모든 제도와 힘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 현대 목회자들에게 큰 교훈이 된다고 본다.
갈등이 없는 교회가 어디에 있겠는가. 죄인들이 모인 곳이기에 초대교회부터 오늘까지 갈등은 늘 있어왔다. 그런데 목사와 장로, 교인들과 목회자들 간에 문제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소통의 부재"라고 본다. 소통은 말로(설교)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지당한 말씀으로 설교를 해도 교인들과 소통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 일 뿐이다. 소통은 주님의 행위처럼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 내려오는 행위가 바로 십자가의 행위요 자기희생의 행위이다.
교인들 위에 군림하거나 일방통행이 되면, 아무리 말씀으로 가르쳐도 신뢰를 얻지 못한다.신뢰는 바로 스스로 비어 종의 형체로 내려오는 데서 시작된다. 금년 한 해를 다 보내면서 묵상 중에 떠오른 생각을 적어둔다. 글: 청운 김이봉 목사(상도교회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