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바이올리니스트 박지혜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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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바이올리니스트 박지혜 연주
  • 박동현기자
  • 승인 2017.03.23 0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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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의 ‘고향의 봄’은 1925년에 창원 소답리에서 지낸 유년시절에 대한 향수를 그린 노래다.
▲ '나의 살던 고향은' 바이올리니스트 박지혜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던 동네 그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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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李元壽, 李山元壽, 1911~1981)라는 이름이 낯선 이는 적지 않을 테지만, 동요 ‘고향의 봄’을 모르는 이는 없을 터이다. 이 나라에서 태어난 사람치고 그 노래를 부르며 자라지 않은 이는 결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법에 맞지 않는 첫 구절 ‘나의 살던 고향은’부터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를 거쳐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를 구성지게 부르면 저도 몰래 저 유소년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나기 마련이다. 그 노랫말에 실린 것은 근대화 이전의 ‘고향’, 그 원초적 정경이기 때문이다.

 

이원수는 ‘고향의 봄’과 ‘겨울나무’ 같은 동요의 노랫말을 지은 아동문학가다. 모두들에게 유년의 고향을 정겹게 떠올리게 해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친일 부역자였다.

 

그의 노랫말에 곡을 붙인 작곡가 홍난파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라는 사실은 식민지 시절에 친일 부역이 예술의 전 영역에서 일관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해 주는 것이다.

 

'고향의 봄'과 '겨울나무'의 이원수

 

이원수는 1911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났다. 창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1922년 마산으로 이사해 정착한 후 어린이잡지인 <어린이>와 <신소년>을 애독하며 문학적 소양을 쌓았다. 등단작은 1924년 <신소년>에 발표한 ‘봄이 오면’이지만 1926년 4월, 만 열다섯 살에 <어린이>에 ‘고향의 봄’이 입선하면서 정식 등단했다.

 

‘고향의 봄’은 1925년에 돌아가신 부친에 대한 그리움과 창원 소답리에서 지낸 유년시절에 대한 향수를 그린 노래다. 이원수는 1925년 마산에서 활동하던 소년 단체인 신화소년회(新化少年會)에 가입하여 문학을 접하고 민족애에 눈뜨게 되었다.

 

이원수는 식민지 조국과 민족적 정체성 때문에 혼란스러운 사춘기를 보냈던 듯하다. 그는 1926년 마산공립보통학교 6학년 때 조선인을 학대하는 일본인의 만행을 비난하는 글을 학급신문에 실었다. 이를 경찰에서 문제 삼았으나 당시 담임교사가 책임을 지기로 하면서 처벌을 면한 것이다.

 

1928년 이원수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상업학교에 입학했다.그는 이응규·윤복진·신고송·서덕출·최순애 등과 함께 서울에 있던 윤석중이 만든 모임 ‘기쁨사’의 동인으로 참여했다. 또 방정환이 창간한 순수아동잡지 <어린이>지의 집필 동인으로 동시 ‘비누풍선’과 누나에 대한 그리운 감정을 그린 ‘섣달 그믐밤’ 등을 같은 지면에 발표했다.

 

1931년 상업학교 졸업 후 이원수는 함안금융조합에 취업했고 9월에는 아동예술운동 단체인 ‘신흥아동예술연구소’가 창립될 때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35년 2월 그는 반일 성향의 문학 그룹인 ‘함안독서회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4월부터 10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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