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철저한 기획과 준비 우선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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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는 철저한 기획과 준비 우선 되어야”
  • 박동현기자
  • 승인 2017.03.29 2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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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돕던 동역장로는 더위와 열악한 환경 탓에 탈진하여 귀국 했다. 건축이 완료 된 현관에 한국어와 영어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 현판을 걸었다
▲ 동티모르 선교사 이정수 장로(전 여수노회장)

동티모르 주민과 72개 장로교회 교인들이 건강하게 자립 할 수 있도록 농업기술을 전수 해 주고 있는 동티모르 자비량 민간선교사 이정수 장로가 목장드림뉴스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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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동티모르선교회(회장 김봉구)의 이정수 장로( 전 여수노회장)는 4년 전 동 티모르를 향했다. 몸은 이때 행동 했지만, 이미 1999년 우연히 뉴스에서 동티모르 주민들의 비참한 영상을 보면서 마음이 먼저 그곳을 향했고 기도모임에 이어 동티모르 선교회를 창립했다 놀랍게도 뜻을 함께 하겠다는 동역자들이 늘어났다.

첫 번째 방문에서 통합교단 총회가 파송한 이대훈 선교사의 안내를 받아 동티모르 섬 주민들의 삶과 교회들을 돌아 봤다. 이때 헤나교회를 담임하는 피터목사가 담석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선교지 탐방을 마치고 서둘러 귀국한 후 여수선교동역자들과 피터목사 치료문제를 의논하자 선교회원들은 의료선진국 한국에 오게 해서 치료해 주자고 공감대를 형성했다. 항공료를 보내주고 한국에 초청하여 여수성심종합병원과 순천성가롤로병원 거치면서 완치하여 귀국시켰다.

▲ 동티모르 서민 주거 형태

동티모르 수도 딜리 가까운 헤라교회 부지에 선교센터를 설립하기로 협의하고 우선 이 장로 개인자금 1억 원 상당의 건축재를 몇 개의 컨테이너에 넣어 배편으로 보냈다. 약 40여 일이 소요 되었다. 이 장로는 동티모르에 들어가 선교센터 겸 숙소를 약 3개월에 걸쳐 건립했다.

건축을 돕던 동역장로는 더위와 열악한 환경 탓에 탈진하여 먼저 귀국 했다. 이 장로 혼자 건축을 하고 건축이 완료 된 현관에 한국어와 영어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라” 현판을 걸었다.

이곳은 건기와 우기가 확실했다. 주민들은 인디언처럼 정글에서 자연 열매를 따다 먹고 살고있으며 농사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농사를 짓는 사람도 보기 드물었다. 이 장로가 우기에 준비해간 참외 오이 고추 토마토 호박 가지 등 씨앗을 심고 농사를 지었다.

수확한 농산물을 차로 30분 거리의 딜리 중심가 대형마켓에 실고가 맛을 보였더니 토종 야생과 달리 부드럽고 맛이 있다며 서로 살려고 줄을 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동티모르는 온도나 일조량은 충분했지만 현재는 우기에만 제한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다. 지하수를 개발한다든가 하기에는 비용 등 문제가 있다 그러나  건기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도 연구 중이다.

▲ 동 티모르 삶의 현장 시장. 오래전 한국의 재래시장 모습같다.

이 장로는 현재 선교회후원금 상당액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며 선교회를 법인으로 발전시키고 확대하여 동티모르 주민들이 스스로 경제력을 갖고 자존감을 갖도록 농업기술을 전수하고 복음적인 삶을 살도록 섬기려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다고 사선교역을 소개 했다.

티모르는 포르투갈/네델란드/일본/인도네시아의 지배를 받았다. 이들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펼치다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장기간 정복자 포르투갈은 티모르인들에게 삼무 (3無, 학습금지, 쇠 연장제조금지, 금주) 우민화 정책을 썼다.

마지막 지배자 이웃 인도네시아로부터 2002년 독립을 했지만 문맹률이 70%, 절대 빈곤층도 70% 에 이른다.

▲ 티모르 섬. 한 때 해양 강자들은 유럽에서 이작은 섬까지 찾아내어 지배 했다

1642년 포르투갈군인들이 티모르 섬에 도착해 딜리에 목제교역소를 설치하고 포르투갈 영토(식민지)로 삼았다. 그 뒤 1859년 네덜란드가 이 곳까지 뻗쳐오자 포르투갈은 네덜란드와 조약을 체결해 서쪽을 네덜란드에게 넘겨주었다.

이 조약으로 서티모르와 동티모르의 역사는 갈리게 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호주침공을 위해 이 곳을 점령했고 당시 티모르 인구의 10%가 죽임을 당했다. 1954년 포르투갈은 다시 동티모르에 돌아왔고 1974년 식민지 포기선언으로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합병파와 독립파로 나뉘어 혼란해졌다.

1975년 11월 28일 동티모르는 독립을 선언하고 동티모르민주공화국을 수립하자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를 우려 9일 뒤 침공, 점령했다. 1999년 8월 30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동티모르 유권자가 독립을 지지했고 2000년 7월 동티모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2002년 4월 대통령선거로 구스망이 뽑혔다. 2002년 5월 20일 동티모르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인터뷰 박동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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