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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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7.11.24 21: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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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즈 소령, 윔스 대위는 1945년 10월 5일에 임명된 11명의 미군정 행정고문 중에 6명이 기독교인이며 그 중 3명이 목사로 임명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윌리엄즈와 2세 한국명 우 광복

지금부터 110여 년 전,  젊은 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선교사 부부가 감리교 미국선교부에서 한국으로 파송을 받았다. 이 젊은 선교사 부부는 충남 공주를 선교 기반으로 하여 선교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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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서 첫 아들을 낳았는데, 첫 아들의 이름을 한국의 광복을 기원하면서 한국식 이름을 "우광복"이라고 지었다.  그리고 동생 "올리브"와 "로저"라는 두 딸을 낳았다.

1906년 2월 논산지방 부흥회를 인도하고 돌아오다가 비를 피해 "상여저장소"에서 잠시 쉬었는데, 바로 전날 장티푸스로 죽은 사람을 장례하고 그 장례용품을 보관해 두었기 때문에 선교사는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졸지에 윌리엄스 선교사님 부인은 과부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2년후 자녀를 데리고 다시 한국(조선땅) 공주로 돌아왔다. 공주에 교회들을 세우는데 기여를 하고 47년 간 선교사역을 했다.

두 딸이 풍토병에 걸려 죽었는데 우광복의 여동생 올리브는 11살에 죽어서 공주땅 영명동산에 묻혔다. 우광복은 공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나오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 왔다.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해방되어 하지 장군이 군정관으로 한국을 신탁통치 하던 때였다.

그때 영어와 한국말을 능통하게 구사할 통역이 필요 했고 바로 그 사람이 선교사 아들 우광복이다 우광복이 하지의 참모가 되어 한국 정부수립에 관여 하게 되면서 하지장군이가 우광복에게 "자네가 한국 실정을 잘 아니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 50명을 추천해 달라"고 한다.

우광복은 어머니와 상의한 후 어머니가 추천해 주는 50명을 하지 장군에게 소개했다. 놀라운 사실은 그중 48명 거의 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이다. 한국정부 수립될 때 요소요소에 기독교인들이 들어가서 나라를 세우게 된다.

특별히 문교부 장관에 기독교인이 임명되어 미신 타파를 시작했고, 국방부장관이 기독교인이 되어 군대 안에 군목제도의 토대를 마련하여 한국군을 하나님의 군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제헌 국회 국회의원 거의 모두 기독교인들이었다 지금도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기도로 국회를 개원한 것을 알수 있다.

1948년 5월 30일 이승만은 이윤영 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열 것을 주문합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伸寃)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아멘

이때 기독교인이 전국민의 5% 도 안 되는 때 였다. 그런데 윌리엄 사모님이 추천해준 50명의 기독교인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서 영향을 미친 결과 10년만에 500만이 되고, 20년 만에 1000만성도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것이다

기적은 미 군정 시절 우광복이 추천한 50명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우광복에게 누가 50명을 추천했는가? 바로 우광복의 어머니 이역만리 타국에서 남편을 잃어 버리고 두 딸을 잃어 버렸는데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사모님 때문입니다.

우광복은 1994년 87세 일기로 소천했는데, 11살에 죽은 내 동생 올리브가 묻혀있는 공주 영면동산 내 동생 곁에 나를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아마도 한평생 한국에서 풍토병으로 죽은 동생이 가슴에 살아있었던것 같다. 그지금 우광복의 묘가 동생 옆에 나란히 있다.

참고자료

윌리엄즈 소령, 윔스 대위는 1945년 10월 5일에 임명된 11명의 미군정 행정고문 중에 6명이 기독교인이며 그 중 3명이 목사로 임명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45년 12월에는 미군정청의 국장대리 또는 국장에 한국인을 기용하였다.

이때 정일형 목사는 인사행정처장에, 영명학교 출신인 조병옥은 경무부장에 임명되었고, 류형기 목사는 조선인쇄주식회사 관리인이 되었다. 그리고 미군정청의 자문기관으로 1946년 2월 14일에 발족한 민주의원 의장에는 이승만이 선정되었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들의 역할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감리교인물(프랭크 얼 크랜스턴 윌리엄스) 

편집자 주: 페이스북에 오른 글을 기사 형태로  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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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섭 2019-07-08 17:39:36
자료 조사 좀 제대로 하고 기사 쓰세요.
프랭크 윌리엄스 부부 선교사와 로버트 샤프 부부 선교사
두 커플 내용이 섞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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