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동교회 수요 직장인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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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동교회 수요 직장인 예배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8.02.2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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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동교회 수요직장인 정오예배 찬양팀

서울 종로 5가에 있는 연동교회(이성희 목사 시무) 주변에는 예장총회, 기독교연합회관, 기독교회,관 상양사 등이 있다. 인근 직장인들이 참석허며 출석하는 교회의 수요일밤 기도회에 참석이 쉽지 않은 크리스천들도 정오예배에 참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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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선포 전에 찬양이 뜨겁다 성경 마태복음 4장1-11 본문으로 “사순절을 지나며” 제목으로 권 철 (부목)목사가 말씀을 전했다. 예배 후에는 아래층 식당에서 큰 접시에 반찬과 밥, 그리고 시래기된장국으로 소탈한 식사를 대접했다.

연동교회는 조선 말기인 1894년에 설립된 오래된 교회이다.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모삼열(본명 S. F. Moore)이 1894년 전도하여 몇 명의 신자를 얻었고, 그래함 리(한국명 이길함) 선교사와 서상륜이 연지동 136-17번지(현재의 비번)의 초가를 예배처소로 삼아 예배를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 연동교회당(좌)과 교육관, 건너편(우) 기독교회관 6층에서 촬영했다.

연동교회의 초기 신자들은 천민에 속한 갖바치들 즉, 짚신을 삼는 노동자들이었다고 한다. 점차 신도가 증가하면서 이듬해에는 교육 기관인 연동소학교를 세워 여학생도 모집해 운영했다. 이 학교는 정신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 되었다.(구 학사는 연동교회 인근에 그대로 남아 있고 봄이 오면 교정의 벚꽃이 아름답다)

1900년에는 제임스 게일이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왔고, 한옥집을 개조해 교회당으로 사용하는 등 본격적으로 교회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때 장로를 선출하였는데 양반들은 낙선하고 갖바치 출신의 고찬익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 일로 양반들은 종묘 옆 봉익동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1910년 묘동교회를 설립하였다.

1904년의 기록에 따르면, 연동교회의 주일예배 참석 인원은 163명이고 이 가운데 세례교인이 35명이었다. 박승봉, 유성준, 이상재 등 양반 출신의 개화파 청년들도 여럿 있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이준 역시 당시 연동교인이었다.

1907년에는 매주 1천 2백 명의 교인이 출석할 만큼 교회가 확장되었다. 같은 해 어린이 교육을 위해 소아회(小兒會)라는 이름으로 주일학교를 처음 시작하여 근대 한국 기독교의 교육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소아회로 인해 어린이 신도 수가 크게 늘어났고, 다른 교회에서도 차츰 어린이 전도와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연동여학교의 영향으로 신교육을 받은 여성 신자도 늘어나 김마리아, 신의경, 유각경, 김필례 등 유명한 인물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연동교회의 유성준 등 일부 양반들은 김창재의 집에서 시작한 안동교회로 분립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담임목사 전필순이 혁신교단을 조직하는 등 장로교계의 친일 활동에서 선두에 서 있었다.

이에 따라 일제 패망 후인 1945년에 당회장을 포함해 전원 사직서가 제출되었으나, 재신임을 결의해 그대로 남아있게 되었다. 1959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분열될 때는 예장통합 측에 속했다 예장통합 직전 총회장 이성희 목사가 위임목사로 시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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