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주의적 해석을 두려워하라. 정장복 전총장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무죄를 변증한다." 고 외치면서 박해가 교회를 소멸시키지 못한다고 주장했던 교부이자 평신도 신학자였다. 박동현 기자l승인2018.07.02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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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장복 명예교수

150년경 카르타고에서 비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된 터툴리안(Tertulian)은 195년 기독교의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당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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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박해는 그리스도인의 무죄를 변증한다." 고 외치면서 박해가 교회를 소멸시키지 못한다고 주장했던 교부이자 평신도 신학자였다. 또한 그는 처음으로 ‘삼위일체’라는 신학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인간이성으로 분석해 볼 때 매우 많은 부분이 모순됨을 인정하였다. 그가 이성과 지성으로 해결할 수 없는 기독교를 보면서 그 진리가 “불합리한 고로 나는 믿는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바 있다.

생각해보면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 인간의 이성적 기능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많다. 우선 동정녀의 몸에서 예수님이 탄생했다는 사실부터 그의 부활에 이르기까지 유한한 인간이성으로 터득하기 힘든 일들이 실로 많다.

그래서 18세기 ‘독일 합리주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젬러(J.S. Semler)는 성경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기록들은 “당시의 미신적인 생각과 편견 및 무지에 동조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을 펴면서 성경의 영감설을 부인한바 있다.

그리고 19세기 중엽에는 합리주의적 성경해석이 등장하여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해석방법은 성경의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을 부정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로 이룩된 각종 기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독일의 대표적인 자유주의 신학자였던 슈트라우스(D. F. Strauss)는 “기독교의 진리란 계시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발전과 발견의 결과로서 성립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교회가 창조해낸 ‘신화적인 인물’로 단정하였다.

그리고 초기의 열광적인 신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받도록 “온갖 것들을 옷 입혔다.”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해석은 성경 무오설을 인정하지 않는 오늘의 신정통주의적 해석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인간의 이성적 기능과 지적인 바탕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의 지성이나 사고의 능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불합리한 것이 훨씬 많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의 합리적인 영력을 초월한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1970년 목사고시를 볼 때 윤인구 전 연대총장이 나의 면접관이었다. 그분의 첫 질문은 “Mr. 정, 홍해가 갈라졌다.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났다. 그가 죽은 지 3일 만에 무덤을 박차고 부활했다. 이걸 믿을 수 있나? 매우 불합리한 것 아니야?”하는 것이었다.

그 때 나의 대답은 매우 단순하였다. “박사님, 저는 창세기 1장1절을 믿기에 성경의 모든 기록을 그대로 믿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분은 나의 이 짧은 대답에 “Excellent!!”라는 한 마디를 하고서 통과시켰다. 지금도 필자는 그 때 그 대답을 가슴에 품고 있다.

매주일 설교를 들어야 하는 오늘의 평신도들, 특별히 합리적인 세계에서 자라온 젊은 세대들에게 성경해석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성경해석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성이나 사고의 틀을 가지고 수용(acceptance) 여부를 결정 한다면 진리의 가치나 위력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종종 첨단을 달리는 설교자들이 오늘도 젊은 지성인들이나 합리주의론 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왜곡시키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교과서처럼 전락시킨다.

구원의 종교인 기독교의 본질을 뒤로하고 일반종교의 범주 속에서 설교를 이어간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설교는 회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성서해석과 설교 형태를 보이는 설교자들 앞에 동질성(homogeneity)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교회는 구원의 종교로서의 특성보다 동류의 사람들이 교제하는 사회성(social nature)을 더 중하게 여긴다. 거기에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감격하는 행위가 잘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보다 성도들의 수평적 관계가 우선이 되어 인간이 즐겁고 행복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여기서 우리의 평신도들이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 역사(work)는 언제나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 초월한다는 사실이다. 터툴리안의 말대로 하나님의 역사는 때로는 비합리적이다. 거기에는 ‘오직 믿음’이 요구될 뿐이다.


박동현 기자  p76501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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