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설교와 종교수필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특별히, 대화의 달변가나 구수한 언어구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설교자 앞에 우리 평신도들이 정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박동현 기자l승인2018.07.1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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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장복 교수

사학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어는 ‘설득-persuas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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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사람이 상대를 이해시키고 어느 목적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설득이라는 과정과 방편을 반드시 거쳐야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도 이 설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설득하여 소돔을 구하려고 시도한 것이나, 모세가 바로를 설득하여 이스라엘을 구출하려는 것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오늘의 모든 광고사업도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광고를 보고 듣는 이들을 설득하는 과정이다. 사업의 세계뿐만 아니라 말이나 글을 매체로 삼고 사는 교사, 변호사, 설교자 모두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효율적인 설득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특별히 설교자는 매주일 자신이 정한 설교의 주제에 회중을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메시지를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방법으로 전개하여 설득을 이룩할 것인지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설득을 위한 설교자들의 양상은 실로 다양하다.

어떤 설교자들은 감동적인 예화들을 사용한다. 또는, 수려한 문장이나 논리적 전개로 회중의 흥미를 이끌어 보려고 한다. 혹자는 자신의 경험담이나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설득을 이루려는 시도를 한다.

이러한 설교자의 노력은 필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설득에 지나친 노력을 기울이고 회중들의 흥미진진한 모습에 함께 도취되어 곁길로 빠져버리는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오류는 설교의 목적이 희미해지고 더 나아가 복음의 본질을 상실하게 된다.

특별히, 대화의 달변가나 구수한 언어구사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설교자 앞에 우리 평신도들이 정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평신도들은 설교자들이 성경을 봉독한 다음에 하는 말을 모두 설교로 착각하고 있다. 이것도 설교이고 저것도 설교로 여기다 보면 자신의 신앙에 틈이 생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올바른 양식을 공급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의 설교현장을 냉철하게 살펴보면 문제가 적지 않다. 설교자가 어떤 주제를 자신의 경험이나 예화를 통해 지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풀어가면서 흥미를 유발시킬 때 많은 평신도들이 매료된다. 그 지성적인 설교자가 삶의 장을 분석하면서 합리적으로 고상하게 엮어나갈 때, 지적인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평신도들은 그것을 가장 좋은 설교로 여긴다.

그러나 설교는 수필이 아니다. 수필은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생활주변에서 소재를 찾고 거기에 대한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이다. 그래서 수필은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의 인생관이나 감정과 사상이 중심이 된다. 현대의 많은 설교가 이 수필의 틀에 맞추어지는 경향을 본다. 바로 ‘종교수필’로 설교단에 등장하여 회중을 붙잡는다.

여기에 다음의 질문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 대한 정답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성도는 설교를 통하여 무엇을 듣기 원하는가? 한 주간 내내 우리들은 인간들의 말을 들으며 살아온다.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보도와 분석을 매스컴을 통하여 지치도록 듣는다.

그리고 드라마와 각종 프로그램을 통하여 인간사에 대한 상식이나 경험을 듣는다. 주일이 되면 이러한 속세(俗世)의 장을 벗어나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거룩한 순간을 맞이한다. 이 순간마저 내가 듣고 경험한 바를 설교에서 되풀이하여 또 들어야 하는 것이 정상인가?

칼빈의 주장대로 진정한 설교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 해석, 적용이다. 오늘의 회중들은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하여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들려주기를 원한다. 수천 년 전에 기록된 그 말씀을 좀 더 정확하게 옮겨주고 쉽게 풀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오늘이라는 삶의 장에 효율적으로 적용, 곧 현장화(現場化) 시켜주기를 기대한다.

문제는 말씀의 해석과 적용의 단계에서 설교자들이 취하는 설득의 차이점이다. 어떤 설교자는 말씀을 풀어주는데 주안점을 두고 그 말씀의 실천을 위한 현장화는 별관심을 두지 아니한다. 반면에 어떤 설교자는 말씀을 연구하여 그 뜻을 헤아리는 해석에는 별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말씀의 현장화에만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 현장을 위해 설득에만 관심을 두고 자신의 지식, 경험, 분석과 판단을 위해 설교를 예화의 진열장 또는 종교수필의 전개로 설교를 대신한다. 이제는 우리의 평신도들이 설교인지 ‘종교수필’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그리고 설교자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66권의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우침이 있기를 원합니다. 나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말씀만이 언제나 나와 동행하게 해 주십시오. 정장복 교수(한일장신대 명예총장/장신대 명예교수)


박동현 기자  p76501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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