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 주님이 말씀하셔야. 헤브론 교회 김일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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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칼럼> 주님이 말씀하셔야. 헤브론 교회 김일수 목사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8.11.10 1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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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자료와 정보들을 수집하고 거기에 성경 이야기를 곁들여 인위적으로 작성한 설교를 중단하고, 성경 말씀을 통하여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신 말씀을 증거하는 ‘말씀의 사람’이 되었으면..
▲ <신앙칼럼> 헤브론성결교회 담임 김일수 목사

설교는 목회자에게 영적인 긍지이며 영예입니다. 목회의 연륜과 성과에 상관없이 목회자는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설 때 자신이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정체감을 갖습니다. 그래서인지 모든 목회자들이 설교를 잘하려 하고, 설교를 통하여 자신과 사역을 평가 받고 싶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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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가 곧 목회의 척도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44년째 목회를 하면서 참으로 많고 다양한 설교들을 했습니다. 어떤 설교이든지 최선을 다해 준비했고,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설교를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저는 목회 현장에서의 설교에 대한 경험들을 진솔하게 나누고 싶고, 또한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도 제안하고 싶습니다.  

설교

저는 언제인가 거짓 선지자에 대한 말씀을 읽다가 제 설교의 근본이 흔들리는 충격과 도전을 받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여 그 말을 알아들었으며 누가 귀를 기울여 그 말을 들었느냐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라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을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렘23:16-18, 21-22)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율법의 말씀을 거스르고, 주변 강대국을 의지하고, 온갖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 향락에만 빠짐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자초했습니다. 바벨론의 침략과 나라의 멸망이 임박했는데도 거짓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평화와 번영만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자기들 마음에 내키는 대로 예언했습니다. 그들이 힘주어 외치는 예언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예언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였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나라의 멸망이 작정되고 임박하였으니 바벨론 군대에 항거하지 말고 항복하라. 하나님의 징벌을 달게 받으라, 그러면 너희에게 아무 피해가 없으리라. 만일 항거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니 죽음을 면하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왕과 백성들은 바벨론 군대에 항거했고, 슬프게도 거짓 선지자들은 멸망의 날까지 평화와 번영만을 외쳐댔습니다. 결국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나라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했고, 항거했던 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살육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까지도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과 사건을 통하여 주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충격과 도전은 ‘너는 설교를 준비할 때 여호와의 회의에 참여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예언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지 않고도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외치기 때문에 거짓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은 거짓 예언이 하나님을 기만하고, 또한 회중도 속이는 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짓 예언에는 하나님의 징벌이 임할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설교’가 구약 시대의 ‘거짓 예언’일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마을마다 커다란 교회당들이 세위지고, 신앙적으로 검증되지도 않은 채 수 많은 사람들이 교회당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데에 키케로의 수사학이 도입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말씀을 전하기 위해 수사학적으로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지요.

설교학에서 배운 대로 서론과 본론과 결론으로 설교의 틀을 짜고 적절하게 간증과 예화를 곁들입니다. 그리고 회중에게 감동을 주고 은혜를 끼치기 위해 온 힘과 정성을 설교에 쏟아 붓습니다.      

주석과 설교집을 참고하기도 하고, 인터넷 등 다양한 통로들을 통해서 설교거리들을 수집합니다.그리고 짜임새 있게 잘 배열하고 가다듬으며 설교 원고를 작성합니다. 그 후에 회중에게 웅변하고 강연하듯이 힘차게 설교를 합니다. 

회중이 감동을 받고 ‘설교를 잘한다’고 찬사를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설교가 설교자와 회중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랜 동안 이러한 자신의 설교를 문제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논리적이고, 더 세련되며, 더 은혜를 끼치려고만 노력했습니다. 그보다 먼저 주님께 나아가고 그 말씀을 받으려고 힘써야 했는데도 말입니다.

말씀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감동과 깨달음은 설교를 하기 전에 진지하게 주님께 나아가 저 자신과 회중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정중하게 받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만든 인위적인 작품으로서의 설교를 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받고 증거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설교자’에서 ‘말씀 증거자’로 거듭나는 과정은 결코 쉽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오랜 동안 ‘설교를 하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말씀을 듣는 일’부터 하도록 저를 깨우치시며 강하게 이끄셨습니다. 주님께 직접 말씀을 듣는 것이 저에게는 급선무였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실제로 주님이 믿어지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 믿어지는데, 이 믿음도 없이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겠습니까? 

이 들음은 그냥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기울여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기에 갈급해 하듯이 주님의 말씀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믿음이 주어지면 확신을 가지고 그 말씀을 증거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광대한 말씀의 세계로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  성경 전체가 주님에게 대한 증언이고,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 어디에서나 주님을 만날 수 있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성경에 눈을 뜨게 하셨고, 성경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갈망하게 하셨습니다. 매일 십여 장씩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말씀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경을 열심히 그리고 많이 읽게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부담을 느끼고, 의무적으로 읽기도 하고, 성경 지식을 늘리는 것만 같은 느낌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성경 말씀에 매료되고 빨려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는 시간은 점점 늘어났고, 성경을 보는 분량은 점점 많아졌습니다. 

성경을 보기 위해 새벽 3시 반에 일어났고, 수시로 성경을 읽었습니다. 이제는 성경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맛있는 음식보다 주님의 말씀이 더 맛이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로부터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신8:3)  사탄은 ‘떡으로만 살라’고 시험하는데, 주님께서는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라’(마4:4)고 분부하십니다. 

저는 육체의 목숨을 위해 음식을 먹을 때에도 제 영혼이 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말씀의 사람’이 되어가면서 저는 주님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히4:12)  주님 말씀이 내 안에 살아 있고 생활 속에도 살아 있습니다. 주님 말씀이 내 영혼을 깨우치고, 하늘의 지혜를 주고, 마음을 기쁘게 하며, 눈을 밝게 합니다.(시19:7,8)  주님 말씀이 내게 불이 되고 방망이가 되기도 합니다.(렘23:29)  

주님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 되고 내 길에 빛이 됩니다.(시119:105)  그러기에 가끔은 변화산의 베드로처럼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마17:4) 하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상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말씀의 사람’이 되어 가면서 저 자신이 변화되었습니다. 저에게 ‘믿어지는 믿음’이 생겼습니다.순간순간 주님이 저와 함께 하심이 믿어지고,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심이 믿어집니다.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겨도 결과적으로는 선이 되고, 영적으로 유익이 된다는 것이 믿어집니다.(시119:71, 롬8:28)  제가 주님 앞에서 ‘아멘’한 말씀과 선포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어집니다. 제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응답하신다는 것도 믿어집니다. 주님의 말씀이 제게 믿음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저의 설교도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수사학에 근거하여 설교학에 충실한 설교를 했었는데,이제는 주님께 들었던 그 말씀들을 회중에게 그대로 전달합니다. 이제는 토요일뿐만 아니라 예배 전 시간까지도 긴장을 하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리고 토요일에나 주일에도 평온하게 성경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받고, 예배 가운데 회중에게 전할 말씀도 주님께 여쭙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설교 원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 한 권으로 충분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성경에로 저를 이끄시면서 ‘성경을 눈과 머리로 읽지 말고, 귀를 열고 내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9)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모하는 영혼으로 주님의 음성과 메시지를 받으라는 말씀이지요. 성경에 집중하고 주님 말씀을 사모하자 주님께서 저의 귀를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성경 말씀을 읽을 때마다 주님의 음성(말씀)을 듣습니다. 주님 말씀이 제 속에 들어오면서 육적인 욕망과 속된 지식 정보들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새로운 틀로 삶의 질서가 세워졌습니다.

그 후에 주님께서는 저에게 ‘내 말만 듣지 말고 눈을 들어 나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저의 논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성경의 모든 곳에 주님이 계셨고, 성경 전체가 주님이 활동하시는 현장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천지창조 그 한복판에 계셨습니다. 모든 것들이 주님의 손길에 의해서 지어졌습니다.(요1:3, 골1:16)  주님께서 족장들의 생애에 직접 관여하셨으며, 모세의 소명과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주도하셨습니다. 가나안 정복도 앞서 지휘하셨고,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에도 역사를 운행하셨습니다. 선지자들과 그 예언 속에도 주님이 등장하십니다. 신약 전체가 주님의 기록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실 뿐만 아니라 저를 만나셔서 교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사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던가요! 두렵고 영광스럽게 주님이 저를 만나 주시고 함께해 주시며 동행해 주십니다. ‘임마누엘’(마1:23)과 ‘여호와삼마’(겔48:35)를 실제적으로 경험합니다. 

그리고 저도 에녹처럼 주님과 동행합니다.(창5:22)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고, 날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입니다.(고전15:31)  제가 죽어야 비로소 주님께서 제 안에 살아 계시고 역사(役事)하십니다.(갈2:20)  

그 후에 주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네가 하지 말고, 내가 하면 어떻겠느냐?”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가 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주님께서 직접 하시도록 했습니다. 

저는 그냥 주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일 뿐이지요. 그래서 말씀을 준비하고 예배를 인도할 때에는 제가 되살아나지 않고, 주님이 서 계실 곳에 제가 서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합니다. 여기까지가 어렵고, 이렇게 되기까지가 힘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말씀과 예배의 생명력은 여기서 결정됩니다.

저 자신과 생애에서 주님이 주재(主宰)이듯이 예배와 말씀에서도 주님이 주재이십니다. 주일이면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려고 교회당에 옵니다. 이들은 냄새만 풍기고 연기만 피우는 어설픈 설교를 들으려고 오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은혜 받으려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실상을 말하면 이들은 영적으로 주님이 고파서 옵니다. 강단에 주님이 서셔서 말씀하시고 용서하시고 치유하시고 위로해 주시기를 기대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이들이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것은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 나라의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설교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이 시대에 아모스 선지자를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원래가 홍수 나면 생수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주님께서 세상에 영적인 기근을 보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헤맬 것도 예고하셨습니다.(암8:1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12:32)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30:6)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게 한 모든 말을 전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렘6:2)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22:18,19)

저를 비롯하여 이 땅의 모든 목회자들이 요한 웨슬리가 말한 것처럼 ‘한 권 성경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저런 자료와 정보들을 수집하고 거기에 성경 이야기를 곁들여 인위적으로 작성한 설교를 중단하고, 성경 말씀을 통하여 직접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신 말씀을 증거하는 ‘말씀의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교회의 예배와 목회 전 영역에서 목회자가 주재가 되지 않고, 주님이 주재가 되시기를 기대해 봅니다. 주님이 하셔야 건강한 교회, 풍성한 목회, 말씀의 역사가 있는 예배가 되지 않을까요?

필자:김일수 목사 : 서울신학대학원,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 졸업, 서울남지방회장 역임. 현재 헤브론성결교회 담임목사로 25년 봉직 중, 성경통독을 통한 믿음실천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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