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장로협(회장:독고인호) 야회수련회가 강화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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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장로협(회장:독고인호) 야회수련회가 강화도에서..
  • 박동현시자
  • 승인 2015.10.05 2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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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침공하였을 때, 이곳 광성보에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 강남협 장로로 야외 예배 실황

5일 강남장로협의회(회장:독고인호) 야회 수련회가 강화도에서 있었다. 강남, 강,동 동남노회 3개 장로회는 강변역에서 버스로 출발하고, 경기노회 안양노회 등 9개 노회의 장로회는 노회별로 모여 예배장소인 솔향기(회의 겸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1부 예배는 수석부회장 안옥섭장로 인도로 신앙고백과 찬송가 478장을 다 함께 부른 후 이충재장로 기도, 서기 김남수 장로가 잠:12장23절 말씀을 봉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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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는 전회장 조종수장로가 “행복한 삶” 제하 말씀을 전했다. 중국고사를 예화로 들며, 송나라에서 같은 조건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 노력한 사람과 안한 사람의 삶의 결과의 차이를 교훈하며, 물질의 부자와 심령의 부자를 비교했다. 종국은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심령의 부자로 살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하냐며 바로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으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며 말씀을 전했다. 2부 식사와 친교 후 광성보를 견학한 후 귀경했다.

한편 광성보는,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고려시대의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는데,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 화도, 광성의 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 보에 소속되었다. 1745년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되어 당시 성문도 설치되었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 후 성책과 문루가 파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7년 안해루, 광성돈, 손돌목돈, 용두돈과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묘, 그리고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각 등이 모두 보수 정화되었으며, 이 때 세운 "강화 전적지 정화기념비"가 용두돈대 위에 서 있다. 1998년에는 해변 쪽으로 넓은 휴식공간을 조성하여 관광객들에게 이용 편의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광성보는 현재 사적 제 2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광성보는 당시에 사용한 대포와 포대, 성이 잘 남아 있어 아이들을 데리고 답사 오기에 좋으며, 바다를 내려다보는 전망과 돈대의 곡선 모양이 인상적이다.

광성 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 5년(1679)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 만에 완공하였다 한다.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다.

손돌목 돈대 - 이 돈대는 조선 숙종(1674-1729,재위)때 축조된 돈대이다. 원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 처가 있었다. 손돌목돈대는 성곽 길이가 108m이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때 미국 해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당시 강대국 전함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목숨바처 이곳을 사수해야 했다. 거칠게 흐르는 썰물을 보면서 밀물 또한 빠른속도로 들어오게 되어 있어 적의 함대는 이 물쌀을 이용했을 것 같았다. 광성보 현장에서 박동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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