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기고> .통일에 대한 역사의 증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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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통일에 대한 역사의 증언 1.
  • 박동현기자
  • 승인 2015.10.2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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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교회 월요기도회 강의 원고
▲ 백도웅목사 전KNNC총무

"레위기 19장 18절,“너희가 같은 민족끼리 앙심을 품지 말고, 원수사이가 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나 주 하나님이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나누고 싶은 것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전 총무로써 교회사적 의의에서 남한교회가 한반도 통일에 대하여 어떤 역할을 해 왔고, 앞으로 해가야 하는가를 말씀드리려합니다. 일곱 번 북한 방문과 국내외에서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지도자들과 만남의 경험을 토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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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통일에 관심을 가지고 논의가 시작한 것은 한국교회에서 부터가 아닙니다. 1984년 10월 29일부터 11월 3일까지 일본 YMCA 도잔소센터에서 WCC국제위원회 주최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한 중요한 회의였습니다. 이때부터 세계 교회협의회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공식적으로 회의를 시작한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2년 후 1986년 9월에 WCC가 주선하여 남한의 NCCK(NCCK) 인사들과 북한 조선그리스도연맹 지도자들이 ‘스위스 글리온’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모임을 갖습니다.

이 모임은 1946년 한반도 분단 이후 남북교회 지도자들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1988년 2월 29일 t서울 연동교회에서 KNCC 제37차 총회가 열렸는데 이 모임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선언’을 선포하게 됩니다. 모든 참석회원들은 기립박수로 만장일치 통과시켰습니다.

남북통일은 어느 정권이든지 시도하곤 하였습니다. 특히, 1972년 7월 4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후락 밀사(특사)를 통하여 평양에서 남북공동성명서가 발표되는 획기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7.4 공동선언정신의 원칙은 ➀ 자주 ➁ 평화 ➂ 민족대단결 인데 이 원칙을 기반으로 ➀ 민간참여 ➁ 인도주의를 덧붙인 것이 ‘88선언문’의 핵심입니다. 한반도 통일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뿐만 아니라, 민족전체의 운명의 문제이기에 민간인도 통일 운동에 참여하여야 하며, 이 통일 운동은 인도주의 원칙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988년은 이런 의미에서 민주화 운동과 더불어 평화 운동이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이 88선언문이 나오기 까지 정말로 수고하시고 노력하신 통합교단 측 72회기 총회장이며, 연동교회 원로 목사이신 김형태 목사님의 헌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NCC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장이란 직책은 매우 힘든 자리였습니다.

그 힘든 자리를 6년간 맡으시고 또한 WCC 중앙위원으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을 위해 세계교회회원교단들의 협력을 촉진시키는데 크게 공헌 하셨습니다. NCC 총회 석상에서 88선언문을 낭독하고 발표했을 때 김형태 목사님은 그 감격에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고백하셨습니다. 당시 남북 분단의 통일은 흡수통일이 아니라 평화통일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그 당시 정부와 보수단체들은 크게 당황하여 일제히, 연일 신문광고란을 통해 KNCC 매도하고, 우리 교단의 보수성향의 장로 목사들조차도 72회기 총회장이신 김형태 목사님을 성토하였습니다.

그 이듬해 제73회 총회장 이북출신 임옥 목사님은 교단 총회에서 이 88선언서를 거부키로 하여 우리교단에서 채택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북한을 적대시하는 반공주의적 이념이나 또는 북한의 박해를 받는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던 실향민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교회사적 입장에서 결코 자랑스러운 일은 아닙니다. 저는 김형태 목사님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분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제가 KNCC회원 교단인 총회에서 파송 받은 목사인데도 불구하고 KNCC 총무라는 것 때문에 목회 할 때 그렇게 아껴주셨던 서북출신 장로님과 목사님이 멀리하기 시작하는데서 오는 그 소외감은 아직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KNCC 총무 당시 용천노회에서 명성교회 소속인 서울동남노회 회원으로 옮기려고 시도한 적이 있습니다. 교단에서 파송 받은 목사인데도 불구하고 서울동남노회 석상에서 NCC 총무는 좌파이기에 노회원 전입이 된다/안 된다는 논쟁을 벌이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그 고독감과 섭섭함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그 노회장소에서 김삼환 목사님이 퇴장하면서 저를 보고 어깨를 두드리면서 격려해 주셨던 그 체온을 지금도 느낍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5년부터 천재지변으로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의 처참한 상황이 전 세계에 알려지자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북한동포 돕기 운동이 이루어집니다. KNCC가 북한 조선그리스도교 연맹을 파트너로 남한교회가 북한에 식량지원을 하는 창구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KNNC 총무 백도웅 & 고 강영섭 조그련위원장

제가 조선그리스도연맹의 강영섭 위원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98년 3월 22일 중국 북경에서입니다. ➀ 저는 강영섭 위원장을 만난 그해 1998년 10월 29일부터 31일까지(2박3일) 조선 그리스도교 연맹의 초청으로 인천항에서 남포항까지 한국기독교 북한 동포 후원 연합회 이름으로 ➀ X-Ray 검진차 1대 ➁ 발전기 4대 ➂ 밀가루 1천 톤 ➃ 분유 15톤을 싣고 1500톤 배를 타고 북한 땅을 처음 밟았습니다. 북한의 남포에 가니까 당연히 평양에 갈 줄 알았고, 또 조그련의 배려로 제 고향 평안북도 의주도 갈 수 있다는 순진한 기대도 해보았지만, 한마디로 불가입니다. 인천항에서 남포항까지 가는데 36시간이나 걸렸습니다.

36시간, 이해가 가십니까? 인천항에서 정부 출항 허락이 날 때 까지 기다리다가 허락이 나서 공해로 나갔습니다. 또 공해 상에서 출국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대기하다가 출국 허락을 받고, 북한 공해까지 갔더니 그 공해 상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북한으로부터 입국 허락을 받아 목적지인 남포항까지 가는데 36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이튿날 태풍이 불어 1박만하고 출항하라고 하니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중앙일보에서는 “물자를 지원하려고 갖다가 추방되었다”라는 추측성 기사 때문에 항의 소동도 있었습니다.

➁ 그 이듬해는 금강산 방문이 허락되어 1999년 2월 27일 3박 4일로 유람선 봉래호를 타고 강원도 동해항을 출항하여 북한 강원도 고성 항까지 가는데 8시간 걸렸습니다. ➂ 1999년 10월 29일부터 11월 6일까지 7박 8일 동안 제9차 대북 지원 차 어렵게 평양을 방문하게 됩니다. 평양 땅을 밟는 순간 서해 뱃길 36시간, 동해 뱃길 8시간, 비행기로 1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북한 땅인데 아직도 자유롭게 고향 방문을 하지 못하는 실향민의 한 사람으로써 가슴이 저려 왔고, 한스러웠습니다. 그러나 36시간에서 8시간, 8시간에서 1시간으로 줄어들 듯이 통일의 길이가 점점 짧아져 통일이 맞아오는 듯하여 감사했습니다.

6,25 한국전쟁 때 집을 떠나면서 잠시 일줄 생각하여 <다녀오겠습니다> 가족들에게 인사 후 고향 땅을 밟지 못하는 실향민이 120만 명이나 계시며, 그들은 80. 90세가 넘었습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을 상봉하기 위하여 대기하는 이산가족 12만 명 중 금년 한해만도 3,500여명이 사망했습니다. 이것이 분단 된 한반도의 현실입니다. ➃ 또한 이듬해 2000년 9월 22일부터 6박 7일 동안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슬로건으로 남측에서 북에 있는 백두산에 가고, 북측에서 한라산을 오는 교차 방문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남쪽에서 최초로 평양을 거쳐 삼지연 비행장에서 내려 백두산을 등정하는 첫 민간교류였습니다. 각계 공식대표 100명으로 구성되어 종교계 대표로 불교 1인, 천주교 1인, 기독교 대표로 제가 뽑히는 큰 행운을 얻었습니다.

평양일대. 삼지연. 백두산.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백두산 밀영을 비롯해 압록강, 두만강, 일대를 방문했습니다. 우리가 왜 한반도 땅에 있는 백두산을 중국 동북 성을 거쳐 백두산이란 이름이 아닌 장백산 이름으로 관광을 가야하는지 안타까웠고, 서울에서 비행기로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하루 코스인데 한라산 백록담을 보고, 백두산 천지연을 보는 그 날이 왜 이렇게 더딘지 참담했습니다. 장백산에서는 천지에 내려갈 수 없지만, 백두산에서는 천지, 호숫가 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05년 6월 14일 7개 종단 수장들의 모임인 한국종교인평화회의 대표회장인 제가 남측 대표단 단장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통일에 대한 역사의 증언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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