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고대 이집트 문명과 과학의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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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고대 이집트 문명과 과학의 결과.
  • 목장드림뉴스 박동현 기자
  • 승인 2019.08.02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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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 왕의 보물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가 발견한 그의 왕묘에서 부장품으로 나온 것이다. 그의 재위 기간(기원전 1354~1345)이 짧았으나 그의 묘는 완전히 보존된 유일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보물은 공예적 가치가 높고 금을 대량으로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특히 귀금속 공예(미라의 마스크 등), 보석류 세공, 목공예(침대나 의자), 상아 세공, 석제 용기 등이 주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금속 공예는 중왕국 시대의 것이 더 우수한 것도 있다. 물론 이것보다 더욱더 많은 유물도 있다
소대 이집트흙벽돌 유적(흙벽돌은 성경 창세기에도 등잔한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 하류에서 번성한 문명이었으며, 최전성기인 기원전 15세기에는 나일 강 삼각주에서 제벨 바르카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이 시기에는 에티오피아와도 교류하기까지 했다. 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 년 동안 존재했으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점령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집트는 원조 수로 제국으로서 관개 산업에 의존하였던 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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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이집트 영토의 대부분은 북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으나 시나이 반도는 서남아시아에 있다. 이 나라는 지중해와 홍해에 해안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리비아와, 남쪽으로는 수단, 그리고 동쪽으로는 가자 지방과 이스라엘을 마주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흔히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뉜다. 나일 강은 남쪽에서부터 지중해를 향해 북쪽을 향해 흐른다. 이집트의 인구는 대부분 나일 강을 둘러싸고 집중되어 있다. 이 강은 석기 시대와 나카다 문화 시대로부터 근근히 이어져온 이집트 문화의 동맥이다.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나일 계곡 외곽의 사막 지대는 지중해에서 남쪽으로 수단 중북부의 앗바라까지 펼쳐져 있는데, 대부분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으며, 간간이 생기는 오아시스 주변을 빼고는 식물이 전혀 자라지 않는다.

기자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카이로 서쪽 연안의 지명인데 보통 서쪽 10km의 유적지를 가리킨다. 즉 제4왕조의 파라오인 쿠푸·카프라·멘카우라의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고, 그 주변에 신전과 스핑크스와 귀족의 묘지인 마스타바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오스트리아·미국·아랍연합 등이 이를 조사하였다. 기자 묘의 부조는 사카라의 부조보다 떨어지나 카이로에서의 교통이 편리하여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 스핑크스를 중심으로 손 에 르미에르를 실시하고 있다.

사카라 사카라는 카이로 남방 25 km 지점에 있는 지명이다. 초기 왕조의 왕묘을 비롯하여 제3왕조 제세르왕의 계단 피라미드, 피라미드텍스트가 있는 제5왕조 우니스왕의 피라미드, 부조의 정수(精髓)라고 하는 티(제5왕조)와 메렐카(제6왕조)의 마스타바 및 성우(聖牛)의 묘 세라페움 등이 있다. 또 나일강 쪽으로 고왕국시대의 수도 멤피스의 유적이 있고 야자수 사이 사이에 라메스 2세가 세운 프타흐 신전의 옛터와 그의 거상(巨像)이 있다.

아비도스 아비도스(Abydos)는 카이로 남방 약 550 km 지점에 있는 지명. 초기 왕조의 왕묘와 신전이 세워져 있고, 고왕국 시대에는 오시리스 신(神) 신앙의 중심지였으며, 신왕국 시대 말기에 걸쳐 이집트 각지로부터 성지(聖地) 순례자가 모여들어, 오시리스 신에 바치는 신전과 개인의 묘가 구축되어 신의 가호를 기원하는 스테레(石碑)가 세워졌다. 신전에는 특히 유명한 제19왕조 세티 1세의 아름다운 부조와 채색이 잘 보존되어 있다. 여기에서 출토된 석비와 우샤브티 등은 방대한 수에 이른다.

테베(Thebes)는 현재의 룩소르 일대의 옛 이름이다. 이 지방은 제11왕조와 제18왕조 이후 왕국의 수도로 되었다. 나일 강을 끼고 동·서로 나뉘어 동쪽은 국가 수호신이 된 아멘 신의 신전과 시민을 중심으로 하였고, 서쪽은 국왕과 왕족의 능과 묘 그리고 장제전(葬祭殿) 및 귀족의 묘와 같은 사후의 세계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서쪽에도 왕궁이 있었던 적이 있다(아멘호테프 3세, 라메스 3세 등). 아멘 신전은 카르나크가 본전이고 룩소르가 부전인데 역대의 왕이 계속 덧붙여 건축하였기 때문에 거대한 규모가 되었다.

서쪽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은 신왕국 시대 왕족의 '영원한 집'으로 계획된 것인데 대개의 것은 즉시 도굴당하였다. '귀족의 묘'는 미려한 벽면으로 애호가를 매혹시키고 있다. 데르 엘 바하리(하트솁수트 여왕)와 메디네트 하부(라메스 3세)의 신전은 각각 개성이 있는 대표적 건축이다.

투탕카멘 왕의 보물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가 발견한 그의 왕묘에서 부장품으로 나온 것이다. 그의 재위 기간(기원전 1354~1345)이 짧았으나 그의 묘는 완전히 보존된 유일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 보물은 공예적 가치가 높고 금을 대량으로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특히 귀금속 공예(미라의 마스크 등), 보석류 세공, 목공예(침대나 의자), 상아 세공, 석제 용기 등이 주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귀금속 공예는 중왕국 시대의 것이 더 우수한 것도 있다. 물론 이것보다 더욱더 많은 유물도 있다

누비아(Nubia)는 아스완부터 제4카타락트 부근까지의 지역이다. 고래로 아프리카 내륙부와 이집트에 중개무역을 하는 사람이 많았고, 또 이 지방은 금의 다량 산출로 역대 이집트 국왕은 누비아를 자기 세력하에 두었으며 여러 곳에 신전과 성채를 구축하였다. 아부심벨 신전과 부헨 성이 그 대표적 유적이고 북누비아의 전 유적지가 아스완 댐의 건설로 수몰되기 때문에, 유네스코가 중심이 되어 세계 40개국의 협력을 받아서 해체 이동 등을 하여 구제되었다.

아부심벨 신전은 제19왕조 라메스 2세가 아스완의 남방 300 km 지점에 만든 암굴 신전(岩窟神殿)으로 누비아에서 최고의 유적이다. 대신전은 태양신 라하라크티 등에, 또 소신전은 하트홀 여신에게 바친 것이었다. 특히 대신전 전면에 있는 왕의 거상(巨像)은 높이가 20m 이상이나 되고 내부의 벽면에는 카데시 전투 등의 부조가 있다. 아스완 댐 건설로 인하여 수몰되게 되는 것을 세계 각국의 협력에 의해 약 3천 6백만 달러의 비용을 들여 구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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