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철 따낸 아베 경제외교 비밀은…
상태바
고속철 따낸 아베 경제외교 비밀은…
  • 도쿄 = 황형규 특파원
  • 승인 2015.12.25 17: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佛에 뺏겼다" 첩보에 치밀한 반격카드 준비,印철도청간부·국회의원 초청해 분위기 돌려,모디 방문땐 교토까지 신칸센 타고가 영접 `파격적 엔차관` 모디 확답 끌어내

지난해 8월 30일 도쿄 시부야 미용실에서 머리를 손질한 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고도(故都) 교토행 신칸센에 몸을 실었다. 오후 늦게 교토역에 도착한 아베 총리는 교토 영빈관에서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를 맞이했다. 외국 정상이 수도가 아닌 교토로 입국한 것도 이례적이지만 아베 총리가 외빈을 맞이하러 도쿄 밖까지 찾아간 것은 더 이례적인 일이었다. 

Like Us on Facebook

두 정상은 이틀간 영빈관 정원을 거닐고, 교토 명승지를 함께 돌아보며 끈끈한 유대를 쌓았다.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에 나선 모디 총리를 교토에서 '오모테나시(일본 특유의 극진한 손님맞이)'로 사로잡은 아베 총리는 도쿄 정상회담에서 돈보따리까지 풀어놨다. 인도에 3조5000억엔에 달하는 투·융자를 약속하면서 아베 총리는 "일본 신칸센 시스템을 인도가 도입하기를 기대한다"고 운을 뗐다. 극진한 대접과 선물을 받은 모디 총리는 "일본이 인도 고속철도와 관련해 조사를 실시해줘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시간을 거슬러 5년 전인 2009년, 인도 고속철도 예비 사업화조사(FS) 컨설팅을 프랑스 업체가 맡게 됐다는 첩보가 일본에 전해졌다. 컨설팅 업체는 최종 사업자를 선정할 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대로 가면 프랑스 고속철 TGV가 절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 정부에 비상이 걸렸다.

도요게이자이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이때부터 치밀한 반격 카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프랑스는 세계은행이나 유럽투자은행 융자를 받더라도 자금 동원력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파고들어 저금리 엔차관으로 인도 정부를 설득했다. 실무진도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1년 인도 철도성 간부 12명을 일본에 초청해 인도 철도 실무자들을 신칸센 팬으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예비 사업화조사는 프랑스가 맡았지만 2013년 본격적인 사업화조사는 결국 일본 기업 컨소시엄이 빼았아왔다. 모디 총리 방일 직전 '전용궤도 방식을 전제로 한 선로 계획'이라는 내용의 보고서가 인도 정부에 제출됐다. 신칸센이라는 단어는 보고서 어디에도 없었지만 전용궤도 방식은 곧 신칸센을 의미했다. "인도 고속철 조사를 해줘 고맙다"는 모디 총리의 도쿄 발언은 수년간 일본 민관이 외교전을 펼친 결과물이었다. 

지난해 모디 총리 방일 이후에도 신칸센 수주가 최종 확정될 때까지 일본은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지난 10월 일본은 인도 국회의원들을 도쿄에 대거 초청해 분위기를 돋웠다. 인도의 철도 인프라 구축과 관련한 강연에서 초청받은 국회의원들은 일본 기술이 인도 철도 인프라를 확충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는 언급이 이어졌다. 정책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국회의원들까지 친일본파로 끌어들였다.

이어 인도를 찾은 아베 총리는 뭄바이~아마다바드(505㎞) 고속철 건설비용 80%에 대해 상환기간 50년, 연 0.1%라는 파격적인 조건의 엔차관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연히 모디 총리는 오케이 사인을 냈다. 6년간 치밀했던 외교 전략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이번 수주는 첫 단추에 불과하다. 일본은 인도가 추진 중인 7개 철도 노선 가운데 3개의 사업화조사를 맡고 있다.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인도 시장 전체를 신칸센망으로 거미줄처럼 이어놓겠다는 장기 전략을 세워 놓고 움직이고 있다. 이번 엔차관 제공으로 인도는 일본의 최대 개발원조(ODA) 수혜 국가로 올라서게 됐다. 일본이 인도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도의 신칸센 수주 전략은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신칸센은 일본 내에서 첫 도입된 이후 50년 이상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이 운행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것으로 대내외에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철도 인프라는 기업의 기술력은 기본이고, 정부 최고위층에서 실무진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민관 외교 전략이 가동돼야만 수주할 수 있는 일종의 종합예술에 속한다. 정부와 기업이 따로따로 움직이거나 즉흥적으로 수주에 참여하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이 중국·일본에 밀려 제대로 된 철도 수출을 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무성하지만 민관이 머리를 맞대고 제대로 된 장기 전략을 세운 적이 있는지를 먼저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은 민관이 한몸처럼 움직이며 시장 장악에 나서는 데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 연 5조원이 넘는 일본의 ODA는 상대국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가장 강력한 외교 수단으로 활용된다. ODA가 외교의 첨병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 없이 신흥국 개척을 기업에만 맡기는 것은 리스크를 떠안으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기업도 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ODA 지원국이 결정되면 재계는 대대적인 동반 투자로 몇 배 이상의 효과를 낸다. 지난해 모디 총리의 방일 때는 물론이고 지난달 아베 총리의 인도 방문에도 일본 기업들은 앞다퉈 인도 투자를 발표했다. 

신칸센 수주를 위한 민간 외교 전략의 또 다른 특징은 상대국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을 찾아 집중 공략한다는 점이다. 일본은 신칸센을 수주하면서 인도의 가장 취약점인 대대적인 자금 지원을 약속했을 뿐 아니라 원자력 협정 추진과 해상자위대가 자랑하는 구난비행정 'US2'도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핵확산금지조약(NPT) 미가입국인 인도와 원자력 협력을 강화하고, 중국 견제를 위해 핵심 무기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 것은 일종의 혈맹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아베 총리가 교토에서 모디 총리를 맞이하고, 인도 방문 때는 모디의 지역구이자 힌두교 성지 바라나시를 방문하며 정상 간 친밀도를 대내외에 과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엇보다 신칸센 수주에는 아프리카 아시아·태평양 신흥국에 대한 일본의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투자가 밑바탕이 됐다. 일본은 1993년부터 아프리카개발회의(TICAD)를 창설해 아프리카 국가들과 경제·안보·외교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원래 5년에 한 번 열리던 회의는 내년부터는 3년에 한 번씩 열린다.
 
2009년부터는 메콩강 유역 국가들을 불러모아 매년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만 해도 메콩강 유역 국가들은 물론이고 동남아 국가 정상들이 거의 대부분 도쿄를 찾아 경제 지원을 약속받았다. 중국의 팽창에 위협을 받고 있는 동남아 국가들에 함정 등을 제공하며 안보에 대한 근심을 덜 수 있도록 협력체제도 구축하고 있다. 이 같은 일본의 장기적인 경제·외교 협력은 향후 이들 신흥국이 철도 인프라를 확충할 때 수주전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출처 : [도쿄 = 황형규 특파원]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