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과거에서 평화를 내다보기, 철원 기독교 유적지 답사를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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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과거에서 평화를 내다보기, 철원 기독교 유적지 답사를 통하여.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0.06.14 1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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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덕 주 교수 전 감신대학교 교수.
“제단에 붙은 불을 끄지 말라.”
이 표어는 대한수도원 창설 때 유재헌 목사가 정한 것인데 80년 동안 변하지 않은 목표로 계승되고 있다. 그 표어에 따라 대한수도원 식구와 제단지기들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 두 차례 ‘구국기도회’를 개최하는데 매번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천여 명이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
이덕주 교수 전 감신대학교 

한국복음주의협의회에서 부탁받은 강연제목은 ‘6·25전쟁의 회고와 전망’이란 주제 가운데 ‘전망’ 부분이었다. 과거를 공부하는 역사학도에 ‘전망’은 수용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내가 예언자라면 모를까? 그렇게 고민하던 중 미국 워싱턴 웨슬리신학대학에서 예언서를 강의했던 구약학자 부르스 버치(Bruce Birch)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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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전망 사이가 예언자의 자리다.” 이사야도 그렇게 예레미야도 그러했다. 망국의 위기시대를 살았던 구약의 예언자들은 과거의 기억, 특히 오늘 당하고 있는 불행한 현실의 원인이 된 과거의 잘못된 행실을 들춰내 고발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시작하였다.

그렇게 과거를 회고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내용의 반 이상을 채운 후 “다가올 하나님의 날을 대비하라.”는 메시지를 끝맺었다. 긴 회고와 짧은 예언, 그것이 예언자 메시지의 특징이었다. ‘기억(memory)과 전망(vision) 사이’. 그것은 예언자의 자리만 아니었다 역사학자의 자리이기도 했다.

과거에 이루어진 일들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탐구하고, 가르치는 이유는 과거에서 지혜를 얻어 오늘을 창조적으로 살고 밝은 미래를 열기 위함이다. “바른 기억이 바른 미래를 연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학에서 기억과 전망은 떼어놓을 수 없는 가치이며 목적이다.

전망하기 위해 기억하고 기억을 바탕으로 전망한다. 그런 맥락에서 ‘6·25한국전쟁과 관련한 기억과 전망’을 구하기 위해 70년이 지났어도 전쟁으로 인한 아픔과 슬픔, 폐허와 상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철원을 찾았다.

철원은 정말 볼 것이 많다.

철원과 한탄강 주변으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시대의 우리 조상들의 살림터와 고인돌 유적이 널려 있고 비록 전쟁으로 인해 많이 파괴되고 자유롭게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후삼국시대 이 곳에 태봉국 수도를 건설한 궁예의 흔적과 고려와 조선시대 유적들을 만날 수 있으며 일제강점기 민족 수난, 특히 해방 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민족 갈등과 고난의 역사를 그 어느 곳보다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철원이다.

그런 민족 수난과 전쟁으로 인한 현장에서 이루어진 복음 선교의 역사 흔적들을 살펴보는 것이 철원 여행의 목적이다. 더욱이 철원 여행에서 우리의 옷깃을 여며야 하는 것은 일제말기와 분단, 전쟁을 거치는 동안 이 지역에서 목회하던 목회자와 교인들 가운데 ‘순교자’ 12명이 나온 곳이기 때문이다.

백마고지와 노동당사, 그리고 무너진 예배당

서울에서 철원 가는 길은 보통 의정부로 해서 포천과 운천을 통해 가는데 공휴일엔 교통체증으로 의정부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서울 서부에 사는 사람은 아예 자유로를 타고 문산까지 가서 적성과 전곡, 연천을 거쳐 가는 길이 편하다. 조금 돌지만 비교적 막히지 않고 또 3년 전부터 신탄역 북쪽으로 철원으로 들어가는 길이 개방되어 지뢰밭 한가운데로 북한 땅을 지척으로 보면서 갈 수 있어 처음부터 철원 답사의 맛을 볼 수 있다.

이 길로 가다가 철원에 들어가기 직전, 6․25전쟁 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 중 하나였던 백마고지를 보고 갈 수 있는데 거기서 보면 전쟁으로 철원평야를 잃은 김일성이 너무 분해서 사흘간 먹지도 않고 그 평야를 내려다보며 울분을 토하고 갔다는 김일성고지가 멀리 보인다.

백마고지에서 나와 5분 정도 달리면 옛 철원읍 도심지에 도착한다. 거기서 길이 두 갈래로 갈리는데 왼쪽 길은 군인들의 통제하여 비무장지대에서 농사짓는 지역 사람들이나 사전에 출입 허락을 받은 관광객이나 성묘객들만 들어갈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면 부서진 기차가 서 있는 온정리역과 비무장지대 안 궁예 성터를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해방 전 온정리에도 교회가 있었지만 그 터는 철조망으로 바뀌었다. 검문소에서 신철원 동송으로 가는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바로 유명한 철원 노동당사 건물이 보인다.

38선 이북이었던 철원은 해방 후 당연히 북한 영토로 들어갔고, 노동당에서 ‘한 동리에 쌀 2백 가마씩’ 공출하고 지역 주민들을 동원하여 한 달 만에 지었다 한다. 공산 치하 5년 동안 많은 우익 인사와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잡혀와 취조를 받기도 했는데 전쟁 때 폭격을 맞아 내부는 완전히 파괴되고 뼈대만 남았다. 철근을 쓰지 않고 벽돌과 시멘트로만 지었는데도 골격은 그대로 남아 있다.

노동당사에서 남쪽으로 바로 보이는 곳에 철원제일교회 유적이 남아 있다. 본래 철원읍에는 1899년 경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먼저 들어와 교회를 세웠는데 1909년 감리교와 선교지역 분할협정을 맺으면서 이 지역을 남감리회 선교부에 이양하는 바람에 철원은 감리교회 선교지역이 되었다.

그래서 해방 전까지만 해도 예배당 주변으로 남감리회 선교부 사택과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병원과 학교, 여성관 건물이 있어 이곳이 김화 평강 포천 연천을 포함하는 철원 선교의 중심 거점이었음을 보여주었다.

1937년 지은 철원제일교회 예배당 설계는 일본의 유명한 건축 선교사 보리스(W.M. Voris)가 맡았는데 그의 작품으로 아직 남아 있는 서울의 이화여대 대강당과 석조 교사 및 신세계백화점 등에서 볼 수 있듯 고전적인 낭만파 성향의 웅장미가 물씬 풍겨나는 석조 고딕 건물이었다. 1,200평 대지에 3층 건물로 지었는데 벽재를 화강암과 화산석으로 처리하여 견고성과 건축미를 더했다.

그러나 이 예배당 건물 역시 전쟁 때 미군 폭격으로 파괴되었었다. 동쪽 벽면과 남서쪽 모서리 기둥만 남고 모두 무너졌다. 주차장으로 변한 교회 앞마당에서 예배당까지 돌계단이 남아 있는데 중간 쉼터를 경계로 양쪽에 12단씩, 모두 24단으로 되어 있다.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사도를 상징한 것이겠지요.” 철원 답사를 안내하는 장흥교회 이금성 장로의 설명이 그럴 듯 했다. 옛날 우리 선배들은 계단을 쌓을 때도 성서적 의미를 새겨 넣었던 것이다. 비록 지붕은 없어졌지만 예배당 입구, 현관에 들어서니 바닥의 색타일이며 2층 대예배실로 오르던 계단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일제말기 경기 북부에서 제일 아름다웠다는 예배당 건물의 위용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주일학교 교실로 사용했다는 1층 출입문으로 들어서면 기초석만 남고 무너져 내린 벽면 흔적을 통해 2백 평에 달하는 예배당 규모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그 폐허 한 가운데 서 있어 보라. 백 년 전 이 곳에서 예배를 드리던 교인들의 찬송과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조금 더 숨을 죽이고 들으면 삼일운동 때 지역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벌인 후 ‘철원애국단’을 결성해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다가 체포된

이 교회 박연서 목사와 청년 교인들의 속삭임이 들리고, 일제말기 여기서 목회하다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교한 강종근 목사의 사자후(獅子吼),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하는 일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신사참배는 하지 말라!”는 외침도 들린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터지고 예배당이기에 안전하리라 싶어 이곳으로 피신했다가 미군 폭격으로 몰사한 철원 주민들의 아우성도 들린다.

그렇게 무너져 내린 철원제일교회 담벼락은 오늘 우리에게 예루살렘 ‘통곡의 벽’과도 같다. 바벨론과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은 기초를 쌓았던 벽만 남았고 오늘날 성지를 찾는 순례자들에게 자기 죄를 회개하며 애통하는 성스런 장소로 남았다.

이방민족에게 공격을 당하고 성전이 무너진 것이 남의 탓이 아니라 내 탓인 것을 깨닫고 통회 자복하는 장소가 되었다. 철원제일교회 무너진 담벼락도 마찬가지다. 일제말기 신앙 양심과 지조를 저버리고 신사참배를 수용하며 전쟁 폭력에 동참했던 교회 지도자들의 신앙훼절, 분단시대와 전쟁 시기에 군인들의 전쟁과 별개로 민간인들마저 이념과 노선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편을 가르고,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의 피해자가 되었다.

다시 피해가자 가해자가 되어 서로 죽이는 일에 몰두하다가 그 후손 대까지 증오와 불신의 유산을 남겨 준 ‘전쟁세대’의 과오를 반성하고 회개할 일이다. 통곡의 벽에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함으로 예루살렘이 이름 그대로 ‘평화의 도성’으로 회복되기를 기도하는 순례자들처럼,

아직도 분단된 한반도 휴전선 북방 한계선에 전쟁 폭격으로 무너진 채 남아 있는 철원제일교회 담벼락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이기적이고 당파적이며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편 가르고 살았던 왜곡된 신앙을 회개하고 반성할 일이다. 회개로 평화를 열라는..

장흥교회 서기훈 목사 순교기념비

철원제일교회 무너진 담벼락을 보고나서 장흥교회로 옮긴다. 철원 평야를 가로질러 고석정으로 가는 길 오른쪽으로 봉분처럼 생긴 장방산 아래 장흥리 마을이 있고 그 안에 교회가 있다. 마을 입구에 교회 표지판이 있어 찾아가기 쉽다.

장흥교회는 일제시대 철원 지역에 설립된 교회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교회다. 1920년 철원제일교회 지교회로 개척된 장흥교회는 작지만 ‘거물급’ 목사들이 거쳐 간 곳으로 유명하다. 삼일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이었던 신석구 목사를 비롯하여 간성 만세시위를 주도했던 유시국 목사, 일본 칸사이학원 유학 출신 전진규 목사, 역시 일본 칸사이학원 유학 후 금강산 산기도로 은혜 받고 나서 대한수도원을 창립한 박경룡 목사가 일제시대 이곳에서 목회하였다.

그리고 인천 숭의교회 이호문 목사의 아버지 이성해 목사가 평신도 시절 이 교회에서 봉사했고 광림교회 김선도 목사의 아버지 김상혁 전도사가 전쟁 후 이곳에서 목회했다.

그 많던 철원지방 교회 중에 ‘홀로 남은’ 장흥교회는 분단과 전쟁 기간 중 이 지역 주민들과 교인들이 당했던 아픈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무리 갈 길이 바빠도 이야기 두 대목은 듣고 가야 한다.

전쟁 전에 일어난 ‘신한애국청년회 사건’과 전쟁 중에 일어난 ‘서기훈 목사 순교’에 대한 이야기다. 장흥교회엔 이 두 사건을 증언할 교인들이 여럿 생존해 있다. 그 중에도 일제말기 때 부모님을 따라 철원에 와서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을 겪으면서 ‘역사의 증인’으로 남은 장흥교회의 이금성 장로가 전하는 이야기가 진지하다.

우선 신한애국청년회 사건이다.

“삼팔선 이북이라 공산 정권 하에 들어간 철원에서 반공운동을 하는 곳은 교회 밖에 없었지요. 당시 철원제일교회 부목사로 계시던 김윤옥 목사님과 우리교회 박경룡 목사님을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이 비밀리 만든 것이 신한애국청년회입니다. 1946년 5월, 철원지방 사경회 기간 중에 조직되었는데 우리 교회 박성배 장로님이 회장이 되셨어요.

제법 조직을 갖추고 강원도 뿐 아니라 서울과 연락을 취하며 반공 투쟁을 하기로 했습니다. 무기를 들고 내무서를 습격할 계획까지 세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의 정보망이 이를 알아차리고 그 해 8월말 김윤옥 목사와 박경룡 목사, 박성배 장로 등 관련자 40여 명을 체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교회 예배당을 접수하고 십자가를 떼 낸 후 공회당으로 만들었지요.

체포된 혐의자는 대부분 장흥교회 청년들이었는데 박경룡 목사님과 이성해 집사님은 무혐의로 풀려났고 나머지 인사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안타깝게도 김윤옥 목사님과 박성배 장로님을 비롯하여 박정배, 김정필, 정창화 등은 옥중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장흥교회 뒤편 언덕에 신한애국청년회 사건과 전쟁 때 교회 청년들의 반공 투쟁을 기념하여 교인들과 주민, 군에서 합동으로 세운 기념탑이 있다. 분단시대 38선 이북, 공산주의 정권 통제 하에 살면서 비밀 ‘반공운동’을 전개하다가 희생된 기독교인들의 수난을 말없이 증언하는 기념탑 주변으로 조용히 산책하며 명상할 수 있는 오솔길을 조성해 놓았다.

다음으로 서기훈 목사의 순교 이야기다.

“신한애국청년회 사건 직후 어수선할 때 서기훈 목사님께서 부임해 오셨습니다. 1931년 철원지방 감리사님으로 계실 때 우리 교회를 잠시 맡아보신 적이 있었는데 다시 오셨을 때는 이미 연세가 65세로 은퇴를 앞둔 노인이셨습니다. 워낙 인덕이 높으셔서 교인들 뿐 아니라 공산주의자들도 그 분 말씀이면 순종하였지요. 그러던 중 전쟁이 터진 겁니다.

전쟁이 터지자 목사님은 가족을 남쪽으로 피난 보내시고 당신은 남아 계셨습니다. ‘어찌 목자가 양을 버리고 갈 수 있느냐.” 하시면서요. 그렇게 전쟁 중에 목사님은 교회를 지키셨습니다. 공산군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갈 땐 조용했습니다. 그러나 9 ․ 28수복 이후 국군이 북으로 밀로 올라가면서 치안상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전에 신한애국청년회 출신들이 무장을 하고 치안을 맡았어요. 그 때까지 도망치지 못한 ‘바닥 빨갱이’들이 여럿 있어서 치안대원들이 그들을 살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목사님께서 짐을 싸셨어요. 청년들이 놀라 찾아 갔더니, 목사님은 화난 얼굴로 ‘나는 전도자로 여기 왔다. 내가 너희들에게 예수 사랑을 가르쳤지 원수 만들고 사람 죽이라고 가르친 적은 없다. 그러니 난 가야겠다.’며 호통을 치셨어요. 결국 청년들은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중공군 개입으로 다시 한 번 전세가 역전되었잖아요? 이번에는 교인들과 우익 진영 사람들이 숨어야 했지요. 교인들이 모두 굴을 파고 숨어 지냈는데 서기훈 목사님만은 저들도 함부로 하지 못해 자유롭게 다니실 수 있었어요. 목사님은 새벽마다 교회 종을 쳐서 날이 밝았음을 알려주셨고 낮에는 방공호마다 찾아다니며 ‘오늘이 몇 월 몇 일이다.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자. 조금만 참아라.’ 하시면서 심방하셨습니다. 어떤 경우엔, ‘오늘 자네 어머님이 돌아가셨네. 동짓달 열아흐레 날일세. 잊지 말게.’ 하여 밖의 일을 알려 주셨어요. 그렇게 방공호 심방‘을 하시다가 전세가 기운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마지막 남은 우익 인사들을 끌고 북으로 갔는데, 그 때 서기훈 목사님도 한밤중에 인민군 두 사람에게 끌려 나가셨습니다.

이튿날 온 천지가 흰 눈으로 덮여 있었는데 사모님과 교인 몇 명이 눈 위에 난 발자국을 따라 이평리로 해서 사문안 골짜기까지 가서 널려 있는 시체들을 뒤지며 목사님을 찾았지만 실패하고 돌아왔습니다. 피난 가실 수 있었음에도 교인을 두고 떠날 수 없다며 교회를 지키시다가 순교를 자처하신 겁니다. 그 분은 좌익과 우익을 똑같이 내 자식처럼 사랑하신 진짜 목사님이셨습니다.”

장흥교회 마당 한쪽에 1967년 건립한 서기훈 목사 순교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전쟁 중 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나 인사차 찾아온 권오창 속장에게 서기훈 목사가 써 주었다는 7언 절구 짧은 한시가 새겨져 있다.

“死於當死非當死 生而求生非是生”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당연히 죽어야 할 때 죽는 것, 이는 참 죽음이 아니오 살아있으면서 살기를 바라는 것, 이는 참 생명 아니라.”

죽음에도 참 죽음, 그냥 죽음이 있고 생명에도 참 생명, 그냥 생명이 있으니 서기훈 목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참 생명과 참 죽음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떠났다. 그는 실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5-26)는 말씀을 살아서, 죽어서 살았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죽음 앞에서, 죽음 가운데서, 마지막 순간까지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의 길을 간 서기훈 목사의 순교 기념비 앞에서 묵상을 하고 있노라니 그 시기 한반도 곳곳에서 ‘양을 지키다 순교한’ 목사들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국교회 순교의 표상인 손양원 목사. 일제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온갖 고문과 악형을 받으면서도 ‘신앙 지조’를 지키다 해방을 맞은 ‘옥중성도’ 손양원 목사는 여수 애양원교회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공산군을 피해 여수까지 피난 내려온 목사들에게 그가 던진 질문, “양들은 어떻게 하고 오셨습니까?”

공산군이 순천까지 점령하자 피난 목회자들은 부산 방면으로 피신하기 위해 배를 한 척 마련했다. 동료 목사들의 권면과 애양원교회 교인들의 강권에 못 이겨 손양원 목사도 그 배에 타기로 했다. 그러나 그는 막상 배에 올랐다가 출발하기 직전 뭍으로 뛰어 내렸다. “교회를 두고, 양들을 두고 도저히 못 가겠소.” 그렇게 해서 교회로 돌아온 그는 공산군이 여수를 점령한 한 달 동안 여전히 제단을 지키고 교인들을 심방하며 “잘 죽자.”

“십자가를 잘 지자.” “애양원 스물 네 제직, 내 오른 손 왼손 잡고 순교하자.” 권면하였다. 그는 “예배당은 위험하니 교인 집에 숨어계시라.”는 교인들의 간곡한 부탁에도 “죽더라도 교회에서 죽을란다.” 하고 제단을 사수하며 예배당에서 기도하던 중 퇴각하는 공산군에 끌려 나가 순교의 피를 흘렸다.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끌려간 김유순 감독도 같은 경우였다. 서울은 전쟁발발 사흘 만에 공산군이 들어왔다. 한강다리마저 끊어져 미처 피난가지 못한 목회자들은 우왕좌왕했다. 서울에 남은 목회자들은 “피난 갈 것인가?” 아니면 “서울에 남을 것인가?” 의견이 나뉘었다.

“평양을 빼앗긴 것도 수치인데 서울까지 빼앗기면 어떡하겠는가? 순교의 각오로 서울을 사수하자.”는 명분론과 “전쟁은 현실이다. 정부와 군인들도 남쪽으로 피난 갔는데 민간인이 나아서 할 일이 있겠는가? 남으로 피난가자.”는 현실론의 차이였다. 둘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옳고 하나는 그른 것이 아니었다. 다만 선택의 문제였다.

그렇게 피난가지 못했던 감리교 목회자들이 냉천동 감리교신학교 안에 있던 총리원 사무실에 모였다. 거기 모인 목회자들 역시 도강파와 잔류파로 나뉘었다. 아무리 토론을 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토론 중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모임의 좌장 김유순 감독이 침묵을 깨고 한 마디 하였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그 말 한 마디에 참석자들은 스스로 “내가 누구지?” 질문하였다.

답은 하나였다. “목사지.” 거기엔 모두가 동의하였다. 잠시 후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립니다.” 그것으로 모임은 끝났다.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이리가 오는 것을 보고 양을 버리고 도망치는 ‘삯군 목자’의 길을 갈 것인지(요 10:11-15), 선택은 목사들의 몫이었다.

그렇게 해서 김유순 감독은 남기로 했고 그와 함께 박만찬, 김희운, 조상문, 방훈, 전진규, 서태원, 양주삼, 차경창, 정달웅, 전효배, 박순신 등 마지막 순간까지 제단과 양을 지켰던 ‘선한 목자들’은 북으로 끌려가 자기 목숨을 버렸다.

그렇게 장흥교회 서기훈 목사 순교기념비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참 목자의 길은 어떤 것인지?” “양을 떠날 수 없다는 선한 목자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가자 가해자가 되는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사랑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

“참 생명은 무엇이며, 참 죽음은 무엇인가?” 생각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회개의 표지석이었다. “나는 참 목사인가?” “나는 과연 양을 위해 나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가?” “양을 내 명예와 욕심의 도구로 삼는 삯군 목자는 아닌가?” 그 어느 때보다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 순교기념비였다.

승일교와 대한수도원 구국기도회

장흥교회를 나와 신철원(갈말읍)으로 가는 길을 따라 조금 달리면 철원의 대표적 관광지 고석정에 이른다. 조선시대 백정출신으로 혁명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임꺽정의 전설이 담긴 고석정은 한탄강 계곡을 배경으로 절벽 위에 세운 정자인데 경치가 참 좋다.

규모는 작지만 유원지 놀이 시설도 있고 고석정 앞쪽으로 전쟁기념 전시관이 있는데 비무장지대(DMZ) 안쪽 월정리와 땅굴 관람 신청을 여기서 접수한다. 고석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철원의 또 다른 명물, ‘승일교’가 있다.

지금은 그 옆에 새로 든든한 철근 다리를 놓아 승일교로는 차량이 왕래하지 않지만 가던 길을 멈추고 내려서서 다리 위를 걷거나 다리 밑으로 내려가 한탄강 물가에서 다리를 보는 것도 좋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라는 것은 다리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밑에서 다리 교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확하게 반으로 나뉘어 남쪽과 북쪽 모양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다리를 만든 사람들이 달랐다는 이야기다. 초등학생 때 공사 현장을 목격했던 이금성 장로의 증언이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여기 사람들은 배를 타고 한탄강을 건너 다녔어요. 그런데 해방이 되고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후 여기 다리를 놓기 시작했지요. 그 때 철원 주민 전체가 동원되었는데 어린 학생들까지 모래 짐을 날랐지요. 그렇게 북쪽에서 다리를 반쯤 놓다가 전쟁이 터진 겁니다. 휴전이 된 후 남쪽에서 남은 부분을 이은 겁니다. 김일성(金日成)이 반, 이승만(李承晩)이 반을 놓았다 해서 ‘승일교’(承日橋) 란 이름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런데 다리 입구에 있는 다리 안내판에는 설명이 다르다. 북과 남이 함께 만들었다는 내용은 없고 군인들이 다리를 놓았는데 전쟁 때 혁혁한 공을 세우고 이 지역 사단장을 역임한 박승일 장군의 이름을 따서 ‘승일교’라 했다는 것이다. 이 안내판을 군(郡)에서 세운건지 또 다른 군(軍)에서 세운건지 알 수 없지만 이 지역 주민들은 안내판 말을 믿지 않는다.

“그 때 동원되어 다리를 놓은 양반들이 아직도 눈이 퍼렇게 살아 있는데요? 역사를 저런 식으로 왜곡하면 안 되지요.”

군사정권 시절, 군이 무소불위 절대 권한을 갖고 있던 최전방에서 나온 슬픈 이야기다. 그러나 경위야 어떻든 북쪽과 남쪽 합작으로 만든 다리, 승일교는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내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언젠가 대학원 ‘북한교회사’ 수업을 마친 학생들과 함께 철원 답사를 하면서 승일교 다리 위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남과 북이 반세기 동안 반목과 갈등, 불신과 증오의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북쪽 사람들이 놓다가 중단한 것을 남쪽 사람들이 완성한 다리 위에서 기도합니다. 이 다리로 해서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하며, 이 다리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의 발길이 북으로 이어질 그 날을 이제는 허락하소서.”

승일교를 지나면 곧바로 오른쪽 산길로 대한수도원에 이른다. ‘한국 개신교 최초 수도원’으로 기록되고 있는 대한수도원은 장흥교회 역사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1940년 무렵 장흥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박경룡 목사가 기도처를 찾아다니다 이곳 한탄강 계곡에서 기도 명당자리를 발견한 것이다.

금강산에서 산기도를 하다가 은혜를 받은 박경룡 목사는 금강산 축소판 같은 순담 계곡을 발견하고 기도원을 세울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에겐 돈이 없었다. 그 때 친구 이성해 집사가 그를 만나러 왔다가 그의 말을 듣고 고향 과수원을 팔아 순담 계곡 일대를 샀다. 그 역시 금강산 산기도를 다녀온 직후였다. 일제말기라 공개적으로 기도원을 할 수 없어 ‘군마양성소’란 간판을 걸고 말 몇 마리를 사다가 풀어놓고 계곡 아래쪽에 장흥교회 교인들을 동원해 토담집을 짓고 기도원을 시작했다.

역시 금강산에서 산기도를 종종 했던 유재헌 목사가 해방직후 여기에 합류했다. 이미 전국적으로 유명한 부흥사가 되어 있었던 유재헌 목사는 수도원 책임자가 되어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회를 열었는데, 그런 식으로 원산중앙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 전진 전도사를 만났다.

논산에서 전희균 목사의 딸로 태어나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후 원산중앙교회 전도사로 봉직하던 전진 전도사는 그 때까지 ‘노래 잘 하던’ 평범한 여자 전도사였으나 유재헌 목사 부흥회를 통해 몸과 마음이 뜨거워지는 ‘올더스게잇’ 체험을 한 후 ‘불의 여인’이 되어 유재헌 목사의 수도원 운동에 참여하였다.

해방 후, 그리고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수도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전쟁으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도 있었지만 수도원을 이끌던 ‘남성’ 목회자들이 떠나간 뒤 수도원은 폐쇄 위기에 처했다. 수도원장으로 있던 유재헌 목사는 전쟁 중 납북 희생되었고 박경룡 목사와 이성해 목사는 외지로 목회하러 떠났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전진 전도사가 기도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여성의 몸으로 수도원을 지켰다. 유재헌 목사의 부탁을 받고 수도원 헌금을 전하기 위해 철원에 왔다가 수도원 살림을 맡아 물러앉게 된 것이다. 이후 대한수도원은 ‘전진 원장 시대’로 접어들었고 그가 1996년 별세하기까지 규모나 내용에서 괄목할 성장을 이룩하였다.

대한수도원은 한국 교회 영성운동사 흐름에서 북방 영맥(北方靈脈)을 잇고 있다. 한국 교회의 토착 영성은 지리산을 중심한 남방 영성과 금강산을 중심한 북방 영성으로 나눌 수 있다. 남방 영성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1930년대 ‘도암의 성자’로 불린 이세종에서 발원하여 이현필 ․ 최흥종 ․ 정인세 ․ 강순명 등에게 이어진다.

지리산 자락 화학산, 천태산 부근에서 형성된 남방 영성은 성서 중심적이고, 가부장적(家父長的)이며 수도생활에서 묵상과 노동,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데 구체적인 수도 공동체로 동광원과 귀일원이 있다.

반면 북방 영성은 그 연원을 이용도 목사에서 찾는다. 1930년 통천교회에서 목회하다가 ‘불의 은혜’를 체험한 후 신비주의 부흥운동을 이끈 이용도 목사는 금강산 산기도를 자주하였고 생애 말년 원산에서 기도와 생활 공동체 신학산(神學山)을 설립하고 수도생활을 하였다.

금강산 자락 원산은 이미 1903년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던 곳으로 한국 교회사에서 성령운동의 시발점이었다. 금강산을 닮은 한탄강 계곡에 대한수도원을 설립한 박경룡, 이성해, 유재헌 목사는 모두 금강산 산기도로 은혜를 받은 부흥사들이고, 전진 전도사 역시 원산에서 유재헌 목사 부흥회를 통해 중생의 체험을 한 후 대한수도원 운동에 합류했다. 철원은 금강산과 원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이렇게 해서 대한수도원에 이어진 북방 영성은, 남방 영성과 비교할 때, 체험 중심적이며 모성적(母性的)이고 성령의 직접적인 은사 체험을 강조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래서 대한 수도원은 좀 시끄럽다. 조용히 묵상하며 진리를 깨닫는 그런 수도원이 아니라 가슴 속에 있는 응어리를 토해내며 몸부림치는 그런 기도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수도원의 ‘도’ 자를 길 ‘道’ 자로 쓰지 않고 빌 ‘禱’ 자로 쓴다. 기도를 하더라도 통성기도, 안찰기도 같이 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기도를 주로 한다. 철야 기도회 때는 군중무(群衆舞)인 ‘성령 춤’을 추기도 한다. 지역마다 가정제단 있어 매주 화요일마다 모여 기도회를 갖는데 기도회를 인도하는 제단지기의 권위가 대단하다.

대한수도원은 주변 경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된다. 특히 사업에 실패한 사람, 건강이나 가정 문제로 실의에 빠진 사람, 나처럼 한 때 신학을 하다가 포기할까 고민하던 신학생들이 소리쳐 울며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는다는 ‘회개바위’에서 내려다보는 한탄강 계곡은 가히 금강산 못지않다. 1996년 물난리 때 소실된 것을 복원해 만든 순담 연못은 한반도 지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역시 물난리 후 다시 지은 것이지만 1940년 처음 장흥교회 교인들이 와서 지었다는 ‘창립관’ 아래 계곡의 기도 굴도 아늑하다. 기도는 언덕 위에 있는 우람한 대성전보다 담쟁이 넝쿨로 뒤덮인 석조 예배당 건물에서 드리는 것이 좋다. 옛날 예배당처럼 양쪽으로 난 문을 열고 들어가 마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들어 강단을 보면 붉은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창립 이래 변하지 않은 수도원의 표어이다.

“제단에 붙은 불을 끄지 말라.”

이 표어는 대한수도원 창설 때 유재헌 목사가 정한 것인데 80년 동안 변하지 않은 목표로 계승되고 있다. 그 표어에 따라 대한수도원 식구와 제단지기들은 매달 초하루와 보름, 두 차례 ‘구국기도회’를 개최하는데 매번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천여 명이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

기도회 주제는 ‘민족 구원’과 ‘민족 통일’이다. 구국기도회 참석자들은 유재헌 목사가 만든 복음성가들을 주로 부르는데 ‘도고자(禱告者)의 사명’이란 성가도 자주 부른다. 이 성가는 유재헌 목사가 1950년 6월 25일, 멀리 대포 소리가 들리는 중에 수도원에서 지은 것이다.

1. 도고자야 지성소로 나가 엎디자 네 한 몸에 삼천만이 메워져 있도다 제사장의 사명 받은 책임 중하다 항상 깨어 간절하게 부르짖으라 2. 육천년의 지리한 밤 다 새어가고 조금 지나 계명성이 떠오르리라 피곤해진 너의 눈에 졸음이 오니 도고자야 깨어 앉아 향을 올리라.

3. 새벽잠이 못 견디어 네가 자면은 삼천만의 네 민족도 영원 잘게다 모진 잠을 깨워 싸워 도고하면은 사랑하는 동족까지 영원 살게다 4. 너의 기름 모두 짜서 불을 피우고 피가 섞인 눈물 짜서 제단에 부어라 너의 희생 네 민족에 거름이 되어 머지않아 삼천만은 잘 살으리라.

5. 우주 안에 깊이 잠든 삼경사경에 머리에는 서리 앉고 무릎은 아프다 죽어가는 동족들을 생각하면은 피는 뛰고 가슴 터져 목이 메누나 6. 나물 캐어 주린 창자 겨우 채우고 얼은 몸은 햇볕에다 녹여가면서 이해 없는 인간들은 중상하여도 이 제단을 종신토록 지켜 가리라. 7. 살인마의 대포성은 지축을 떨고 붉은 입의 불아귀는 민족을 삼킨다

도고자야 생명 걸고 간절히 빌자 하나님은 팔을 펴서 구원하신다

그렇게 대한수도원은 자기를 희생하여 민족을 구원하는 기도의 제단으로 남아 있다. 거기서도 회개 밖에 없다. 기도를 해도, 일을 해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우리 교회와 우리 교단, 교파를 중심으로 생활했던 이기적인 신앙을 반성하고 이웃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생활하는 ‘참 신앙’의 자세를 회복할 곳이다. 특히 요즘 들어 일반사회로부터 “남은 생각지도 한고 자기만 안다.”고 비판을 받고 있는 기독교계가 통렬하게 반성할 대목이다.

지경터와 새술막에서 듣는 ‘양심 증언’

철원 답사의 마지막 코스는 김화 땅 지경터(地境垈, 지금 토성리)와 새술막(지금 학사리)이다. 지경터와 새술막은 대한수도원에서 나와 김화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해방 전까지 이곳에 교회가 있었으나 전쟁 때 파괴되고 수복 후에 세운 새 교회들이 남아있다.

지경터와 학사리는 강원도 최초 감리교회가 설립된 곳이다. 선교사 기록에 의하면 1898년 1월 남감리회 선교사 리드(C.F. Reid)가 고양읍교회 전도인 윤승근과 함께 새술막에 와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예배를 처음 인도했는데 그 날 어른 세 명, 어린 아이 1명이 세례를 받았다.

강원도에서는 첫 신앙공동체가 조직된 것이다. 여기서 인근 지경터로 복음이 퍼져 나갔다. 그래서 1900년 하디(R.A. Hardie) 선교사가 지경터를 방문했을 때 이미 그 곳 교인들이 자체 헌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새술막과 지경터는 ‘강원도 선교의 효시’로서 한국인들의 주체적 복음 수용과 자생적 교회 설립의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였다.

그러나 지경터교회는 어떤 이유인지 교회 설립 이후 그다지 발전하지 못하고 침체 상태에 빠졌다. 1890년 캐나다 터론도대학 학생YMCA 파송을 받아 의료 선교사로 내한해서 7년 동안 활동하다가 남감리회 선교부로 이적한 하디 선교사는 1900년 목사 안수를 받고 원산 선교부에 파송을 받아 강원도 북부지역 선교를 담당하였는데 3년 동안 갖은 노력을 하였음에도 선교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교회가 부진한 것에 크게 낙심하였다.

특히 지경터 교인들의 ‘실망스런’ 신앙생활에 선교사로서 한계와 실망을 느꼈다. 속으로 선교사직 사임까지 생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1903년 8월 24일부터 한 주간 원산지방 장·감 선교사 연합사경회가 열렸다. 거기서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던 하디는 선교와 목회 사역의 실패 원인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홀연히’ 깨닫는 회심체험을 하였다. 1903년 남리회 연회에 제출했던 하디의 보고서 내용이다.

“지난 1년은 내가 한국에 온 후 여러 가지 면에서 가장 힘들었던 해였습니다. 마치 사악한 세력이 나를 에워싸고 무슨 일을 하든 훼방하면서 이미 이룩한 업적까지도 붕괴시키려 달려드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애쓰고 노력해도 사역의 결과가 없었던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

내 안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점점 더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하신 말씀처럼 내게 영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내 사역의 실패 원이이었습니다.”

한계를 느낀 것이 새로운 출발이 되었다. 선교와 목회 실패의 원인을 외부 환경, 남에게서 찾으려 했던 그가 자기 안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남이 아니라 내가 문제였다! 자신의 오류와 실수를 깨달은 것이 회개의 시작이었다. 그는 문제가 한국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선교한 것과 교만했던 것을 공개적으로 자복하였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시킨 것은 선교사로서 생활이 대체로 실패했던 원인이 나의 결점과 믿음 부족, 그리고 선교비 유용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토착교회 교인들 앞에서 고통과 수치로 자백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 나는 수치와 곤혹스런 얼굴로 등장해서 나의 교만과 강퍅했던 마음, 믿음 없었음을 자백하며 개인과 회중에게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그때 비로소 거기 모였던 한국 교인들은 처음으로 참된 의미에서 죄책과 회개가 어떤 것인지 목격하였습니다.”

선교사의 회개가 한국인 교회지도자들의 회개를 끌어냈다. 그렇게 해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회개가 어떤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회개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고 기초다. 회개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구별된다.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출발점이다. 회개해야 거듭나고 거듭나야 성화(성결)를 통해 완전에 이를 수 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그렇고, 예수그리스도도 첫 메시지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라고 외쳤다.(마태 3:2, 4:17) 회개를 빼놓고 기독교 신앙을 운운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서 ‘회개운동’으로서 원산 부흥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부흥운동의 불꽃은 서울과 인천, 개성을 거쳐 평양에 이르러 한국교회의 체질과 성격을 쇄신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되었다. 그렇게 하디 선교사로 하여금 한계를 느끼게 만들어 회개에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지경터교회는 원산 부흥운동의 뇌관이 되었다.

하디가 1903년 여름 원산 부흥회를 인도한 후 지경터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했을 때 큰 은혜가 임했다. 교인들은 변하였고 교회는 부흥되었다. 당시 새술막교회를 맡아보던 윤승근 전도사도 그 때 원산까지 가서 큰 은혜를 받고 하디와 함께 김화로 돌아오면서 ‘회개 은총’을 경험하였다. 이에 대한 하디의 증언(1918년)이다.

“씨[윤승근]는 별세하기 조금 전에 원산의 첫 번 부흥회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게 말하기를 자기는 하나님께 자기의 지나간 모든 죄를 다 생각나게 하사 다 회개할 기회 주시기를 기도하는 중에 생각난 일은 한 20여 년 전 자기는 아직 예수의 복음을 들은 일이 없는 때인데 조폐국에서 일하고 있는 중 어느 월급 주는 날 한 8원 가량을 더 받은 일이 있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

이 돈을 도로 갚는 것이 마땅함을 밝히 아노라 하고 그 돈을 내게 주며 탁지부에 보내주기를 청하더라. 나는 이 돈을 보내고 그 영수증 받은 것을 아직까지 보관하노니 아마 구한국 정부에게 양심의 자책으로 돌려보낸 것은 이것이 처음이 되리라.”

이것이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열매인 ‘양심전(良心錢, consciousness money)’ 운동이다. 부흥운동을 통해 회개하고 양심을 회복한 교인들은 교회 다닌 후는 물론 믿기 전에라도 남의 것을 훔치거나 횡령하거나 해를 끼친 것이 생각나면 피해자를 찾아가 용서를 빌면서 훔친 것을 되돌려 주었다.

평양에서는 회개한 교인들이 시장의 비난장사를 찾아가 그동안 주인 몰래 훔쳤던 옷감을 되돌려 주거나 돈으로 계산해 주었고 공주에서는 멀리 떨어진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환전해서 보내려는 교인들의 행렬로 우체국 앞에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런 배상운동, 보상운동을 통해 기독교 신자 사이는 물론,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도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졌고 그것은 교회와 사회의 평화로 연결되었다.

가해자의 양심 회복이 피해자의 용서를 끌어낼 수 있다는 평화운동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다. 한국전쟁 시기 이루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진정한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길도 ‘양심 회복’에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게 회개한 후 털끝 하나 없는 깨끗한 양심으로 살기를 원했던 윤승근 전도사는 철원과 김화, 평강 일대를 돌며 전도하다가 1904년 폐결핵으로 별세하여 새술막 언덕에 묻혔다.

아쉽게도 지경터교회나 새술막교회의 흔적은 남은 것이 없다. 6,25전쟁 때 ‘철의 삼각지대’로 불리는 가장 치열했던 전장터 안에 있었으므로 이 곳 교회들은 그 때 모두 파괴되었다. 일제시대 신앙생활을 했던 교인들도 모두 사라졌고 민간인의 이주가 가능했던 1960년대가 되서야 교회가 하나 둘 들어섰으니 옛날 교회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형편이다.

다만 옛 지경터교회가 있던 자리엔 다행히 미군이 군목이 천막을 쳐서 시작한 지경리교회(장로교)가 있어 제법 큰 예배당 건물을 지었으며, 학사리로에 있던 새술막교회 자리는 이발소로 바뀌었지만 같은 동네에 김화교회(감리교)가 있어 그 곳에서 기록에 나온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그곳 학사리에서 들어야 할 마지막 이야기가 있다. 10년 전에 별세한 한영순 권사 이야기다. 그의 할아버지 한사연 목사가 김성교회 목사로 부임하면서 그도 김화 사람이 되었다. 6·25전쟁이 터지던 그 날, 김화고급인민중학교 학생이었던 그는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동아줄에 묶인 사람들이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반동분자’들이겠거니 하면서 구경삼아 따라갔는데 스무 명 남짓한 그들 속에 낯익은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할아버지 한사연 목사였다. 그가 “할아버지!” 하고 외치자 트럭으로 오르던 한사연 목사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래, 네가 증인이다. 증인이 되거라!”

강대상에서 설교할 때보다 더 큰 목소리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그 길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일제말기 김화읍교회에 부임했다가 1946년부터 김성교회에서 시무하였는데 공산주의자들과 사사건건 의견 충돌을 일으켜,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교회와 교인이 여기 있는데 어찌 떠나겠는가?” 며 교회를 지키다가 결국 전쟁이 터지던 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고 말았다.

그 때 한사연 목사 나이 75세였다. 전쟁 통에 자녀 넷 중 셋이 희생되었다. 전쟁 후 한영순 권사는 남쪽 편안한 곳에서 살 수 있었음에도 척박한 땅 김화로 다시 들어와 대서소 일을 하면서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그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증인이 되라.”는 할아버지의 유언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순교의 증언

기독교 역사는 증언의 역사이다. 기독교 역사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예언되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오순절 성령이 임함으로 사도들은 능력을 얻고 입을 열어 ‘예수를 증언’하는 것으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사도들은 그렇게 예수를 증언하다가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옥에 갇히고 돌을 맞고 칼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 증언이 순교로 연결되었다. 성경에서 ‘증인’과 ‘순교’를 의미하는 단어(martus)가 같게 된 연유다. 그렇게 해서 복음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가 되었다.

초대교회 첫 순교자 스데반으로 시작해서 야고보와 베드로, 바울, 안드레, 바돌로매, 도마 등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하나 같이 복음의 적대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2천년 기독교 역사는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죽음을 당한 순교자들의 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한국교회사도 마찬가지다. 주기철과 손양원, 김영학, 한경희, 권원호, 최인규, 최봉석, 신석구, 김유순, 박순신, 박연서, 박유연, 문준경, 이판일...... 수백 명 순교자들의 피가 일제 강점기와 전쟁 시기 이 땅을 적셨다. 철원 땅에서 만난 강종근과 서기훈, 김윤옥, 박성배, 유재헌, 한사연, 서기훈 등 순교자들의 이야기도 그 한 대목이다.

특히 전쟁 와중에서도 끝까지 양을 지키는 선한 목자의 길을 택했던 서기훈 목사의 “살더라도 참 생명을 살고, 죽더라도 참 죽음으로 죽으라.”는 유언, 그리고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던 한사연 목사가 남긴 “증인이 되어라.”는 유언은 오늘에도 무거운 교훈으로 남는다. 60대, 70대 노인 목사들이 남긴 유언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증언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대답을 요구한다. 그들은 죽었으나 지금도 말한다. 인류 역사의 첫 순교자 아벨에 대하여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하였던 성경 말씀처럼 순교자들은 살아 있는 우리에게 증언을 요구한다.

남북분단 75년, 전쟁 70년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고 남북으로 나뉘어 갈등과 불신, 증오와 대결의 높은 장벽을 쌓고 있는 한반도 현실에서, 그 대립과 분쟁의 최첨단 철원 땅에서 접하는 순교자들의 죽음은 전쟁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에게 ‘새로운 증언’을 요구한다.

“우리가 당했으니 너희가 갚아라.” “저들을 믿지 말고 철저하게 응징하라.” 보복과 응징으로 불신과 증오의 벽을 계속 쌓을 것인가? 아니면 회개와 용서를 통한 화해와 평화의 길로 나갈 것인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에 옮겨 믿음의 ‘완전한 분량’에 이르렀던(마 5:43-48) 손양원 목사와 서기훈 목사의 순교 신앙을 기리는 믿음의 후손이라면 순교자 바울의 ‘십자가 증언’을 귀담아 들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5-18)

오늘 우리는 ‘이 둘’을 남과 북으로 읽어, 십자가의 근본 가치인 화평과 화목을 통한 한 몸의 평안, 그 평화가 한반도에서 구현되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노력할 뿐이다. 생각이 다르고 노선이 다르면 무조건 반대하고 배척했던 이기적 편당심을 회개하면서. 그것이 70년 전에 일어났던 전쟁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의 전망이다.

자료 제공 한복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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