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북한에서 남한까지 머나먼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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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 북한에서 남한까지 머나먼 길,
  • 박동현기자
  • 승인 2016.01.28 2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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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라오스 베트남 태국 등의 한국대사관을 통해 ....
▲ 북한 이탈- 입국경로

남소망(가명)양은 20대 초반이며 남한에서는 부모에게 용돈 타 쓰며 대학에 다닐 나이다. 태어난 고향은 북한의 양강도 000군이며, 남소망양의 이름과 자기소개서 및 "개인적인 정보"를 보호 할 필요가 있어서 편집했습니다. 스토리는 Fact 입니다. 탈북민은 비슷한 스토리, 비슷한 경로로 북한을 이탈하며 한국에 입국하고 있습니다. 2016년 1월 현재 약 3만여 명에 이르며, 국내 입국루트인 대성공사와 하나원을 거치지 않은 경우도 일부 있으며, "하나원수료 통계" 치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박동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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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기자가 만난 한 소녀의 탈북에서 입국까지의 소토리 입니다. 

저는 교사 부모님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소학교, 고등중학교(중고학재) 과정을 마치고, 2014년 3월에 남한에 혼자 왔습니다. 제 아버지는 고등학교 청년지도원으로 근무하셨고, 어머니는 영어와 러시아를 가르쳤습니다. 제가 참 존경하는 두 분은 늘 맡은 일에 성실하셨고, 겉보다는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저희 5남매를 가르쳤습니다.

부모님 말씀은 제가 성장하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주눅 들지 않고 자신감을 잃지 않는 원동력이 되어주었습니다. 또한, 지금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제 삶의 모토로 내세우고 살고 있습니다.

제가 12살 때 아버지는 간암이라는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이 걱정 할 가봐 티를 안내니까, 저희형제 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약값이랑 약초들 구하러 다니는 동안, 저는 4명의 동생들을 보살피면서 병석의 아버지를 돌봤습니다. 정성으로 간호하면 병이 꼭 나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결국 아버지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참 많이 울고 가슴 아파도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고 가차(북한어) 없이 가정에 닥친 경제적인 고난으로 장마당 식당에서 도우미로 일했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면 맏딸인 제가 가장이라는 책임감이 컸습니다. 엄마 혼자 힘드니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대를 되새기며, 공부도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교 기간을 쟁쟁(당당)하게 보내고 졸업학년이 되었을 때었습니다. 부모님처럼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저의 욕심 일뿐,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대학교를 가는 대신 돈을 버는 일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한동네 사는 이웃 아주머니를 통해 중국에서 한 달만 일하면 적지 않은 돈을 벌수 있다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북한에서 한창 열매, 씨앗 밀수를 많이 할 때었는데, 그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중국과 북한의 사이에 있는 산에 미리 준비된 장소가 있다면서 거기서 한 달 동안 씨앗, 열매들이 섞여있는 것 분리작업하면 된다고 했으며 끝나면 중국 돈으로 500위안 준다고 했습니다.

그 돈이면 우리가족이 더 이상 배고프지 않아도 되고, 아직도 뇌물이 통하는 북한 사회에서 대학에 갈수 있지 않을가 하는 희망에 저는 그 아주머니의 제안을 받아 들였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렸지만 동의 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동의하지 않을 것은 알고 있었고 거의 통보식 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오직 가족을 위해서 2011년 12월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 북한 고향 마을

그 아주머니 외에 브로커 한 명과 저처럼 일하러 간다는 언니 한 명 이렇게 4명이 길을 떠났습니다. 대부분 강을 건너간다고 소문으로 들어왔었는데 저는 백두산을 넘어서 중국 장백산 방면으로 산길을 헤쳤습니다. 겨울인데다가 북한에서 제일 추운 백두산을 넘어 간다는 것은 정말 춥고,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동네 아줌마의 안내로 하루 종일 걸었지만 눈이 많이 오고 발자국이 다 지워져서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주 오는 길도 아닌데다가 국경경비대를 피해 밤에만 다니고, 눈이 많이 와서 발자국까지 지워졌으니 저와 일행은 시급히 인가를 찾는 데에 몰입했습니다. 목적지를 찾는 것도 급하지만, 날이 어두워지고 음식은 하루 먹을 량 밖에 없는데다가 물병에 넣은 물도 얼어버렸기 때문에 먼저 인가부터 찾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과 나무밖에 없는 산속에서 길을 잃고 얼어 죽지 않기 위해 불을 피우고, 1분이라도 잠들면 다 얼어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부지런히 나뭇가지를 주우면서 날 밝기를 기다렸습니다. 다음날 서로 의지하며 같은 방향으로 계속가면 무언가 있겠지 하는 억지로 6시간 걸은 결과 백두산 인근에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사는 집을 발견했습니다.

무작정 도와달라고 사정하고 그 집에 들어갔더니 고맙게 받아주셨습니다. 제가 그 때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몰랐는데 발이 감각이 무디고, 신발을 벗으니 무슨 냉장고에 넣어둔 생선쪼가리처럼 얼음이 삐직 삐직 나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민간(요법)에서 동상에 걸리면 눈으로 비비고 소금주머니에 발을 담그고 콩 자루에 발을 담근다고, 노부부가 정성으로 간호해주었습니다.

참으려고 애써 봐도 비명소리가 나오고 제가 엉엉 소리 내어 우니까 제 일행들과 노부부는 차라리 아픈 만큼 소리 내어 울라고 문을 닫고 나갔습니다. 근처에 병원도 없고 병원 가려면 다시 시내로 나가야되는 상황이라 민간요법으로 참아야만 하는 것이 너무 서럽고, 뼈 속까지 통증이 느껴져서 울다가 지쳐서 잠들다 싶이 했습니다.

동시에 북한에서는 김정일 사망 후에 중국국경경비가 더 강해지고 개미 한 마리도 이동 못하게 금지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두 발 다 얼어버린 상태로 다시 떠날 수 없게 되고 여러 가지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그 노부부에게 부탁하고 한 달 넘게 머물면서 치료 받았습니다.

김정일 사망으로 뒤숭숭한 분위기에 감시는 더 심해졌지만 떠나려고 마음먹은 이상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회복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걸 알았지만 2012년 1월 겨우 걸을 수 있을 때 다시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제가 아픈 발을 끌고 중국이라는 곳에 도착했을 때 저는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에 마주쳤습니다. 부자처럼 보이는 조선족 부부가 마중 나와 있고, 저와 같이 온 언니를 안내하던 아주머니는 너희들에게 저 부부를 따라 가라고 했습니다. 제가 같이 안가냐고 되묻자 그 아주머니는 “아직도 모르겠냐”고, 니들은 선택권이 없다고, 저 부부를 안 따라가면 중국공안에 신고할 거라면서, 너네 집 가난한데 입하나 덜면 손해는 아닐거라 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는 북한쪽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순간 무섭고 화나고 억울해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배고프고 춥고 아픈 발로 어디 도망 갈수 없었습니다. 조선족이라 말투가 많이 이상하긴 했지만 너무 무서워 말라고 부인이 우리를 안정시키고는 차에 태운 후 빵과 물을 건넸습니다. 저는 사기당해서 팔려왔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도 배고픔에 그 빵을 덥석 받아먹었습니다. “우릴 어디 데려가나요?” 물어봤지만 너무 걱정 말라고 하면서 불빛이 가득한 중국 도시를 가로질러 달렸습니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지만 처음 보는 환한 도시를 구경하다가 따뜻한 차안에서 잠간 졸았다가 눈뜨니까 어떤 건물 앞에서 내려주었습니다.

이제부터 니들이 살집이라고 하면서 따라 오라고 했습니다. 조심조심 따라갔는데 거기에는 4명의 오빠 언니들이 기숙사 형식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조선족 부부는 싼값으로 북한 사람들을 그렇게 구해서는 잘 먹여주고 생활에 지장 없이 지내게 해주는 대가로 식당에서 잡일들을 시켰습니다.

이런 생활을 하는데 저의 동의 같은 것은 필요 없었고 오직 도망가도 잡힌다고, 불만 있으면 공안에 신고해서 다시 집에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북송된 언니도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때 기회를 엿보다가 도망칠 생각밖에 없었고, 예상치도 못했지만 여기서 못 버티면 북송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설거지, 청소 등 제가 맡은 일들을 열심히 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생각으로 버티면서 거의 1년 반 남짓하게 식당에서 일했습니다. 제가 지내던 곳은 연변지역이었는데 식당에 오는 손님 대부분이 조선족이거나 한국인 여행객이었습니다. 기숙사처럼 한 집에서 밥 먹고 같이 생활하지만 언니 오빠들은 서로 마음을 꼭 닫아 매고 얘기도 잘 안했습니다. 그 이유는 서로 다른 곳에서 왔고, 나처럼 믿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상처받고, 마음열고 우리 같이 도망가자고 말했다가 그 사장 부부 귀에 들어갈까 서로 의심하고 믿지 못했습니다.

북한 고향 마을의 다른모습. 근처에 숙박시설과 몇 대의 자가용도 보임(당간부용?) 

배부르게 밥도 잘 먹고 북한에 비하면 정말 좋은 생활수준이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보고 싶은 가족을 못보고, 자유가 전혀 없이 매인 생활을 하는 것이 하루하루가 의미가 없고 지루해서 너무 싫었습니다.

오랜 기간 같이 지내면서 저보다 나이 많은 오빠 언니들에게 맨날 힘들다고 울고 가족이 그립다고 울면서 어느덧 친해지기 시작했고, 서로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거의 일 년 동 엄마 곁을 처음 떠나서 겪는 생활이 너무 힘들고 충격적인 일들이 한꺼번에 많이 일어나고 그런 여러 가지 이유로 우울증에 시달린 적도 있습니다.

그 식당에 일하면서 한국어(북한말과 40% 정도 다름)도 많이 배울 수 있었고 한국드라마도 많이 보면서 여길 벗어나면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쯤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식당에 자주 드나들었다는 한국인이 저와 같이 지내던 언니에게 핸드폰 번호를 몰래 적어주면서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다섯은 머리 맞대고 고민 끝에 연락해서 여길 도망갈 수 있게 부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언니가 그때 우리들의 상황을 잘 설명 드리고 간절하게 부탁한 이후에 한 달 넘게 지나서 연락이 왔는데 그분은 한국에서 현직 목사이고 금전적인 도움은 못주지만 안전하게 중국을 벗어나 한국으로 가게 해줄 수 있는 브로커를 소개해주겠다고 제안해왔습니다.

우리는 간절함에 선뜻 받아들였고 몇 달 동안 도망갈 계획을 세밀하게 세운다음 새벽에 그 사장부부가 안 오는 날을 골라 브로커를 만나러 떠났습니다. 가진 돈도 없었으나 입을 옷이랑 먹을 것은 좀 챙겼습니다.

약속 장소에서 브로커를 만나고 안내를 받았는데 기숙사에 하나 있던 핸드폰을 가져왔더니 위치추적 당한다고 브로커가 버리라고 했습니다. 2013년 8월에 중국을 떠났습니다. 중국 공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브로커가 시키는 대로 신분증 검사할 때는 자는척하고, 거의9박 10일 동안 버스와 오토바이, 배, 트럭 갈아타면서 중국, 베트남 라오스 이런 나라들 국경을 넘었습니다.

라오스에 도착했을 때는 전화로 브로커를 소개해준 목사님이 마중 나오셔서 잘 왔다고 무사히 오기를 기도 많이 했다고 얘기했습니다. “기도”, 단어가 생소하긴 했지만 맘속으로 누군가에게 하늘을 향해 위험할 때마다 무서울 때마다 간절히 바랬던 것 그게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고마웠지만 어눌해서 고맙다고 인사도 못 드리고, 브로커 들의 안내로 라오스 대사관에 들어갔습니다.

한국으로 가기위해 모인 북한에서 바로오신 분들도 있고, 중국에 살다 오신 분들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사관 한국인 직원들이 실시하는 대사관 규율 안내도 받고 건물 끝에 설치되어 있는 도서관에서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대사관 직원이 한국에서는 영어는 필수로 다 알아야한다고 영어공부 열심히 하라고 했습니다.

라오스 대사관에서 한 달반 넘게 지내면서 “한국말투”도 많이 배우고 그렇게 언니오빠들이랑 같이 지내다가 대사관직원들 안내를 받으며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자유로워진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하고 이런 기분 느낄 수 있게 도와준 목사님께도 감사하면서 인천에 도착했습니다.

북한과 비교할 수 없이 깨끗하고 건물들이 정말 높이 솟아있었습니다. 대성공사(국정원)이라는 곳에서 조사받고, 떨렸지만 다른 사람들도 다 견디니까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견뎠습니다.

북한에서 오면 다 거치는 그런 절차들을 밟고 하나원이라는 시설로 안내받아가며 이동했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고, 한국에서는 20살에 학교(고등) 졸업한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북한에서 포기했던 대학교를 다시 가고 싶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원에서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하나원 졸업 후 2014년 3월에 대안학교 중에 00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대학교 입시에 필요한 학업에 매진했습니다.00학교는 미국에서 오신 선교사 부부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열정과 북한학생들을 통일되었을 때 미래의 리더로 키우기 위한 비전을 가지고 세운 학교입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큐티와 수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면서 기도제목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또 북한을 위해,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법을 배웠고, 00 학교와 동시에 양재 온누리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대학교진학을 위해서는 면접 볼 때 자신 있게 얘기 할 수 있는 발표력과 시사문제가 나와도 풀어나갈 수 있는 글쓰기 같은 것들과 특히 외국에서 오신 선생님들 밑에서 영어를 중심으로 준비해왔습니다.

저는 북한에 있을 때 부모님처럼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는데, 제가 그렇게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를 잃고 나서부터 아픈 사람을 보면 치료해주고 싶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아버지가 생각나서 환자를 더 애틋하게 대하고 정성스럽게 치료해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국에 와서 한동안 갑자기 바뀐 환경에 적응을 못하고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친절하게 안내 도와주시던 원무과 선생님이 있는데 그분과 얘기 많이 나누면서 앞으로 계속 사회가 발전해도 국민건강이 우선이기 때문에 의료계통을 공부하면 취직에서도 영향력이 있을 것 라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들께도 상담 받으면서 제가 이일을 잘할 수 있을지, 하고 싶다는 욕망만으로 될 수 있을지 저에게 맞는지 아닌지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학과를 정했습니다. 제가 지원한 학과는 00 대학교 의료경영학과입니다.00대학교는 의료보건산업부분에서 많이 발전한 학교이고 의료 경영학과에서는 병원경영, 회계 특히 요즘 다문화가족이나, 북한이탈주민, 외국인노동자, 그의 자녀들 같은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계층들을 위해서 경영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보험지식들도 쌓고, 북한과 남한이 통일 되었을 때 필요로 하는 전문지식을 갖춘 의료경영인을 키우는 곳입니다.

의료경영학과 뿐 아니라 복수전공으로 의료공학을 듣고 싶습니다. 그 지식을 바탕으로 통일 되었을 때 발전되지 못한 북한병원의 의료기구들을 수리하고 제가 직접 다룰 수 있는 기구들을 설치할 수 있다면 더 건강한 통일시대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사회체제 속에서 살았고, 또 남한의 사회에 대해서 앞으로 몸으로 체험하며 배워나간다면, 북한과 남한과의 차이나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장학생으로 적극 추천해준데 대해서도 정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00 교회의 장학생으로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저에게 너무 과분하고 감사합니다. 00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믿는 형제자매님들과도 많이 만나고 싶습니다. 그 속에서 힘 들 때나 기쁠 때나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제가 받고 있는 사랑 나누며 살겠습니다. 대학입시 할 때 자기 소개서를 써봤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써야할지 몰라서 많이 서툽니다... 이해해주시고 잘 봐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2016기에 합격하였음. 남소망 올림 (사진 출처 : 북한 주소를 구굴어스로 찾고 사진도 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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