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노고단/ 왕시루봉 일대 선교사들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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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노고단/ 왕시루봉 일대 선교사들 유적지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0.07.22 2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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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에겐 풍토병에 대한 항체가 부족했다. 따라서 800m 이상 고도 지역은 병원균 서식이 어려웠으므로 격리공간이 필요했다. 이를 여름철 휴양공간으로도 사용했다.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초교파적인 선교 사업을 논의했고, 레이놀즈 선교사 같은 이는 한글 신약성경 개역작업을 이곳에서 진행했다
기자는 평신도대학원 동기들과 오래 전에 이곳을 방문했다. 

구례 지리산 왕시루 봉 일대에는 10여 체의 각기 다른 형태의 낡은 집이 흩어져 있다. 사람이 살지도 않고 관리가 안 되어 집이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쇠줄로 집 뒤의 참나무에 묶어 놓은 집도 있다. 가끔 교계 뉴스에 나오지만, 이 지역 산주인은 서울대학교로 되어 있다. 일제가 해방 후 귀국하면서 국립서울대학교에 기증 했다는 것이다.(왕시루봉 등산로에 세원진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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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은 6.25 이후에 건축한 것이며, 거리가 좀 떨어진 노고단에는 돌 벽만 남은 한국선교 초기선교사 휴양시설이 있다. 전쟁 중에 북한군의 은둔지로 알려지자 미 공군 폭격기가 폭파하여 현재는 석조건물 벽 일부만 남겨져 있다.

1921년 조선의 열악한 환경에 처한 서구의 선교사들은 풍토병/전염병 병으로부터 건강을 지키고 영적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한 격리공간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지리산 노고단에 수양관을 설립한다. 교통이 불편(가마/걷기 등)한 지리산 높은 곳을 택한 이유는 해발 800m 이상에서는 전염병이 약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이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 시절 노고단에는 1930년대까지 60여동의 건물이 들어섰다. 노고단 일대가 도쿄제국대학 부지였고, 선교사들은 그들과 10년 임대계약을 맺어 건립했다. 녹스 선교사는 숲 속에 마련된 오두막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사색할 수 있으며 마음에 끌리는 대로 캠프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선교사들에겐 풍토병에 대한 항체가 부족했다. 따라서 800m 이상 고도 지역은 병원균 서식이 어려웠으므로 격리공간이 필요했다. 이를 여름철 휴양공간으로도 사용했다.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초교파적인 선교 사업을 논의했고, 레이놀즈 선교사 같은 이는 한글 신약성경 개역작업을 이곳에서 진행했다.

동시에 노고단 수양관은 조선팔도에 흩어진 초교파 선교사들이 휴가 기간 모여 선교정보와 어려움을 나누는 자리이기도 했다. 한편 노고단 수양관 건립은 조선인 노동력으로 이뤄졌다. 지게로 건축자재를 져 날라야 했다. 수고에 의한 임금이 지급됐다.

1935년 조선인에게 신사참배 강요 문제로 일본총독부와 미국 남장로회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또 일본의 진주만 폭격으로 미-일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자 1940년 11월 다수 선교사가 미국 정부가 보낸 마리포사호를 타고 귀국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고단 수양관도 사람이 살지 않게 되면서 폐쇄되었다.

그리고 1945년 미국이 투하한 원폭으로 일본의 믹구에 항복한다. 광복 후 이 선교사 휴양지는 적산가옥(敵産家屋])은 본래 ‘자기 나라의 영토나 점령지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 또는 적국인의 재산’을 뜻하나,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간 뒤 남겨놓고 간 집이나 건물을 지칭한다.) 으로 분류돼 국가 소유가 되었다.

노고단 수양관은 여-순사건과 6.25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좌익 빨치산의 근거지가 됐고 휴전 후까지 빨치산 소탕작전이 이어지면서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양관 건물과 주변 환경은 미군의 폭격으로 철저히 파괴됐다.

이후 선교사 들은 대체 수양관이 필요했다. 동영상 사진 촬영 박동현 기자

왕시루봉 수양관은 6,25 전쟁 직후 선교지로 되돌아온 린튼과 하퍼 선교사 등이 여러 검토 끝에 최적지로 보고 건축에 나섰다. 구례 토지교회를 베이스캠프 삼아 건축자재를 왕시루봉으로 날랐다. 구례 토지면민에게 몇 년간의 공사는 좋은 일자리이기도 했다.

그러한 수양관은 2003년 사용목적인 ‘난치병 환자 치료 및 요양’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이에 한국교계가 보존위원회를 조직해 지켜냈다. 이제는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국가가 보존하고 교계가 위탁 관리하는 방안 등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2013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꼭 지켜야 할 자연·문화유산’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현재 건축양식이 다른 12채의 오두막이 남아 있다. 그 높은 고지에 샘이 솟고 물을 저장하는 연못 같은 저주지도 있다 연못 옆에는 다 낡은 벤치도 2개가 있었다. 가뭄에도 견딜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지리산 선교유적지와 린튼家 3대. 보존 위해 백방으로 뛰는 외 증손 “국립공원 안이라 관리 어려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인요한(58·) 소장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 벨(1868∼1925)의 외증손자다. ‘내 고향은 전라도 내 영혼은 한국인’이란 저서에서도 알 수 있듯 뼛속 깊이 한국인이다.

그는 요즘도 지리산 왕시루봉 선교유적지 보존을 위해 백방으로 뛴다. 수시로 이곳에 들러 상태를 살핀다. 목조 교회와 주택은 열쇠로 잠가 놓지 않으면 바스러질 만큼 낡았다. 보수가 필요하지만 국립공원 안이므로 쉽지가 않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 휴 린튼(한국명 인휴·1926∼1984) 선교사와 함께 이곳에서 추억을 쌓았다. 휴 린튼은 도서에 600여 교회를 개척했으며 젊은 시절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했다. 별명이 ‘순천의 검정고무신’이었다. 전남 고흥 간척사업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소천했다. 인 소장은 “아버지가 더 오래 사셨으면 선교유적지가 제대로 보존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할아버지 월리엄 린튼(1891∼1960)은 1922년 유진 벨 선교사의 딸 샬레와 결혼했다. 한남대를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린튼가 3대는 지리산 선교유적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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