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단편들 서울의 옛모습. 오세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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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단편들 서울의 옛모습. 오세열 교수
  • 박동현
  • 승인 2021.02.25 17:4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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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은 500여년 넘게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종각에 걸린 종은 하루 두 번 정기적으로 타종했다. 그리고 도성내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긴급하게 치게 된다. 밤 10시에 28번 치는 종은 도성의 문이 닫히는 신호이고, 새벽 4시에 33번 치는 종소리는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신호다.
현재 복원되어 남겨져 있는 서울 성벽 
복원되어 남겨져 있는 현재의 서울 성벽 

지금부터 600년 전, 인구 20만 명의 한성은 남산, 북악산, 낙산, 인왕산 등의 내사산(內四山)에 의해 작은 원을 그리며 둘러 쌓여있었다. 그 작은 원을 둘러싸는 큰 원에는 관악산, 북한산, 용마산, 덕양산 등의 외사산(外四山)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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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사대문 안에는 종각을 제외하면 대부분 초가집이었고 그 외는 과수원과 무밭, 배추밭, 파밭, 수박밭 등이 주거지역보다 더 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숭례문에서 까치발을 하고 둘러보면 끝없이 펼쳐진 초가집이 바다를 이루는 가운데 동대문이 빤히 보였다.

한성의 중심가를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북촌과 남촌의 촌락이 옹기종기 들어서 있었다. 청계천은 원래 자연하천이었는데 여름 장마철이 되면 도심의 불어난 물이 남산에 가로막혀 한강으로 빠져 나가지 못하고 항시 범람하여 홍수피해를 가져왔다.

이를 막기위해 태종은 대규모 준설공사를 시작하여 광교로부터 동대문에 이르는 인공하천인 청계천을 건조했다. 그 결과 장마 때 불어난 물은 중랑천을 거쳐 한강으로 빠져나가게 되었다. 1392년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2년 후 개경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순성의 전통은 일제강점기(1915년) 도시계획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파괴된 성곽과 함께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광복 후 한양도성은 부분 보수와 개축을 하였고 1975년부터 종합적인 도성 복원사업을 시작했고, 최근의 도성 재정비 및 복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며 다시금 관심을 받게 됩니다. 한양도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과 더불어 순성의 전통 또한 되살아나고 있는데 조선시대에 성곽을 돌며 경치를 구경하던 순성(巡城) 출처: <a data-cke-saved-href=https://600hyds.tistory.com/18 [2016 한양도성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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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성의 전통은 일제강점기(1915년) 도시계획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파괴된 성곽과 함께 사라지다시피 했습니다. 광복 후 한양도성은 부분 보수와 개축을 하였고 1975년부터 종합적인 도성 복원사업을 시작했고, 최근의 도성 재정비 및 복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며 다시금 관심을 받게 됩니다. 한양도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과 더불어 순성의 전통 또한 되살아나고 있는데 조선시대에 성곽을 돌며 경치를 구경하던 순성(巡城) 출처: https://600hyds.tistory.com/18 [2016 한양도성문화제]

그 후 한성은 500여년 넘게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종각에 걸린 종은 하루 두 번 정기적으로 타종했다. 그리고 도성내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긴급하게 치게 된다. 밤 10시에 28번 치는 종은 도성의 문이 닫히는 신호이고, 새벽 4시에 33번 치는 종소리는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신호다.

날이 저물면 거리의 사람들은 하나 둘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간다. 상점은 가게문을 닫고 장사꾼들과 행상들은 각자 목판을 들고 사라진다.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저녁시간이 지나면 어두운 거리에는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한성의 큰 고개로 불리는 만리재를 중심으로 왼쪽은 용산, 오른쪽은 마포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피부색으로 마포사람과 왕십리 사람을 구별했다고 한다. 마포사람은 얼굴이 까맣고 왕십리사람은 목덜미가 까맣게 탔다. 마포사람은 서쪽에서 해를 안고 아침부터 새우젓 지게를 지고 성안으로 들어간 연고로 얼굴이 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왕십리사람은 채소밭에서 거둔 채소를 수레에 싣고 해를 등진 채 도성 안으로 갔으니 목덜미가 타는 것은 어쩔수 없었을 것이다. 용산지역에는 주로 유기제품을 만드는 장인과 도제들이 몰려 살고 있었다. 이들은 놋그릇을 만들고 각종 옹기와 기와를 구워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서울의 옛모습

온종일 매캐하고 자욱한 잿빛연기 속에서 열심히 작업에 몰두한다. 한강 나루터주변에는 얼음 창고가 늘어서 있다. 서빙고와 동빙고나루터에는 항상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겨울철이면 한강상류에서 얼음을 채취해 여름철에 비싸게 내다파는 상인들이 자리하고 있다.

필자 오세열 교수는 Midwest 대학원 리더십교수며 성신여대 명예교수, 목회학 박사(D.Min),목사, 경영학박사(고대)이다.<br>
필자 오세열 교수는 Midwest 대학원 리더십교수며 성신여대 명예교수, 목회학 박사(D.Min),목사, 경영학박사(고대)이다.

세종은 친형인 양녕대군에게 항상 짐을 지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왕위세습은 장자우선원칙인데 이를 어기고 삼남인 자신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매일 얼음 한덩이를 양녕대군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일반 평민은 감히 누릴 수 없는 특전이었다.

입춘 전 한강은 120에서 150센티 두께로 얼음이 언다. 이 얼음을 떼어내어 서빙고와 동빙고의 얼음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봄과 여름에 사용한다.

동빙고 얼음은 궁중제사 때 사용하고 서빙고 얼음은 궁중의 대소사 때 사용된다. 신라시대에는 석빙고가 이러한 역할을 했다.

마포나루는 새우젓과 소금으로 유명하고, 한성에 필요한 곡물과 어물류를 공급하던 가장 중요한 포구였다. 전국의 배들이 황포돛대를 달고 드나들었고 한강변을 따라 어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루일과가 끝나면 종일 고된 일에 지쳐있던 일꾼들은 주막집과 선술집에 삼삼오오 모여들어 시끌벅적하게 막걸리를 들이키는 모습이 일상사였다. 최근까지 남아있던 ‘마포대포집’은 추억을 회상케 한다. 역사의 뒤안길로 안개가 사라지듯 시나브로 스러져가는 서울의 풍경을 추억의 한 공간에서 더듬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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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천 2021-02-26 11:21:28
목멱산(남산) 봉수대에 봉화가 피어오르면
한양장안이 한바탕 야단법석 난리가일고
이웅평 비행기가 서울상공에 선회할때는
지하철을 제외한 모든차량은멈추고 사람들은
방공호 대피소로~ 서울살이 고달퍼도 자식새끼
학업에 지장줄까 견디고 버텨왔건만~~♥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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