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뉴노멀’은 교회의 ‘노멀’이 될 수 없다.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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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뉴노멀’은 교회의 ‘노멀’이 될 수 없다. 손봉호 고신대 석좌교수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1.06.25 12: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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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 문화가 정상으로 정착될지는 유동적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비대면 인간관계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2000년이 넘도록 대면 예배와 대면 교제가 정상이었고, 그 때문에 무수한 핍박도 받았으며 그런 핍박은 지금도 중국, 북한 같은 곳에서는 계속되 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 변화를 방관하고 따르기 만 할 수는 없다.
필자 손봉호 교수

자동차, 인터넷, 스마트 폰 등 새로운 과학기술의 보급과 민주주의, 보편교육, 보편복지 등의 제도적 변화는 우리 일상생활의 모습을 많이 바꿔 놓았다. ‘코로나 19’라는 대재앙도 그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아마도 비대면 인간관계와 재택근무, 전자상거래, 온라인 강의 등 여기서 파생되는 변화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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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코로나19 감염확산을 막기 위하여 어쩔수 없이 요구되는 것이므로 지금은 불편하고 바람직하지 않고 따라서 ‘비정상적’(abnormal)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이 어느정도 지속되어 개인에게는 습관, 사회에서는 관습으로 정착되면 ‘새정상’(new normal)으로 인정되다가 ‘정상’(normal)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변화가 실제로 일어날지, 그 정도가 어느 수준이 될지는 알 수가 없다. 비대면 관계에 대한 경험이 너무 나빠서 대면 관계를 더 선호하는 반작용도 일어날 수도 있다. 마스크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폐지한 이스라엘(기고 당시 상황)에는 사람들이 옛날처럼 다시모여 함께 즐기고 있다.

그러므로 비대면 문화가 정상으로 정착될지는 유동적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비대면 인간관계가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2000년이 넘도록 대면 예배와 대면 교제가 정상이었고, 그 때문에 무수한 핍박도 받았으며 그런 핍박은 지금도 중국, 북한 같은 곳에서는 계속되 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이 변화를 방관하고 따르기 만 할 수는 없다.

비대면 문화가 과연 바람직하며 성경적인가에 대해서 먼저 한 번 따져보아야 하고, 바람직하지 않으면 저항해야 한다. ‘정상’(normal)이란 본래 주어진 ‘규범’(norm)에 맞는것을 뜻했다. 그러나 문화가 세속화함에 따라 종교, 형이상학, 영원, 이성, 원칙 등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고, 이제는 주어진 ‘규범’이 아니라 ‘다수가 하는 것’, ‘평균적인 것’이 ‘정상적인것’ (normal)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풍조에 동조하고 적응해야 할 것인가? 성경의 하나님은 관념이 아니라 ‘인격적’(personal) 이고 그런 점에서 기독교는 모든 종교 가운데서 독특하다. ‘인격’(persona)이란 말은 그리스어로 ‘얼굴’ (πρόσωπον, prosopon)이란 단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부버(Martin Buber)의 분류를 따르자면,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는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다. ‘그것’은 혼자서도 생각할 수 있지만, 인격적인 ‘너’는 ‘얼굴과 얼굴’로 만나야 한다.

그러한 하나님은 신학적 명상과 논증의 대상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인격적인 믿음, 감사, 찬양, 기도의 대상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비록 물리적이지는 않지만, 원칙적으로 대면적이다. 물론 혼자서도 찬양하고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도들이 같이 모여서 예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면 예배라야 참 예배라고 주장할 근 거는 없다.

그러나 비대면 예배는 오직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위하여 불가피한 경우에만 한시적으로 허용되어야지 결코 정상적인 것으로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

예배보다 더 대면적으로 필요한 것은 성도의 교제다. ‘성도의 교제’는 사도신경에 들어 있을 만큼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다. 물론 ‘교제’는 단순히 사람들끼리 만나서 대화하고 사귀는 것 이상인 영적이고 신비로운 연합이다. 그러나 영적이라 하여 실제적인 만남을 배제해서도 안 된다.

독창보다 합창에서 우리는 더 크게 감격할 수 있고 함께 봉사해야 더 활발하고 효율적이 될 수 있다. 다른 성도의 삶에서 감동과 교훈을 얻으며 다른 성도들의 감시와 격려로 신앙 생활은 규모를 갖추고 힘을 얻는다.

성도는 가족과 같이 사랑 실천의 대상인 동시에 사랑의 주체다, 만약 교인들이 같이 모이지 않고 서로 만나서 교제하지 않았더라면 교회는 지금까지 존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 못지않게 성도의 교제는 ‘나와 그것’ 아니라 원칙적으로 ‘나와 너’의 관계로 이뤄지고, 그 것은 대면적이다.

사실 인간의 본성이 사회적이고, 대면관계가 사회형성의 기본이다. 만약 대면관계가 없었다면 우선 언어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언어가 없었다면 사고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비대면적인 접촉이 없지 않고 불가능하지도 않지만, 그것은 대면적 관계를 전제로 한 임시방편이고 예외일 뿐 결코 대면관계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벌이나 개미의 집단적인 활동은 개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능력을 발휘한다고 한다

(swarm intelligence). 사람도 대면해서 평화롭게 대화하고 활동하면 개개인이 가지지 못하거나 발휘하지 못한 능력까지 발휘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도 대면적일 때 확실하게 형성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교회에서는 지금의 비대면 관계를 ‘코로나19’ 때문에 생겨난 불가피한 비정상으로 취급 해야지 ‘뉴노멀’로 자리 잡도록 해서는 안 된다. 비록 비대면 관계가 세상의 ‘뉴노멀’로 정착되더라도, 비록 어느 정도의 조정은 불가결하겠지만, 교회는 끝까지 대면교제의 정답고 멋진 섬으로 남아 있어야 하고, 그렇게 될 때 오히려 교회는 세상이 부러워하는 색다른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이는 일 을 그만 두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여야”(히 10:25) 할 것이다.           

글쓴이 손봉호 교수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명예 이사장이다. 서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네덜란드 자유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외대, 서울대 교수를 거쳐 동덕여대 총장과 세종문화회관 이사장을 역임했다. 1996년 도산인상, 1998년 국민훈장 모란장, 2018년 서울대 사회봉사상 수상.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고신대 석좌교수, 기아대책 이사장으로도 섬 기고 있다.

FAITH & LIFE (신앙과 삶 신국원 편집장) 편집장의 말

뉴노멀을 성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샬롬, 이번 호는 뉴노멀 시대에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 을 주제로 꾸렸습니다. '시선'에선 코로나로 생겨난 뉴노멀이 가져온 새로운 풍조를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않아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특히 비대면 상황이 예배와 성도의 교제에 있어 정상인 듯이 고착될 위험 에 대해 경계할 것을 권고합니다.

'특집'에서 김태황 교수님은 팬데믹과 디지털 전환이 맞물려 온라인 소비의 급증 현상의 장단점을 진단 합니다. 소비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가능해진 상황 속에서 소비자 주체성을 하나님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재확인하고 회복되어야 할 필요를 지적합니다.

김경민 대표님은 급변한 현실에 기민한 대응을 강조하는 경영 트렌드와 달리 본질과 사명에 집중하는 기업이 여전히 신뢰를 받고 있음을 밝힙니다. 본질을 지킴에는 ‘래디컬’하되 비본질에서는 ‘애자일’한 유연성을 가지라고 권합니다. 최우성 박사님은 시공간을 초월한 가상세계인 메타버스의 도래가 신앙생활 에 미칠 영향을 살핍니다. 무조건 비판이나 외면이 아니라 바른 이해에 기초한 신앙의 도구로 사용할 성숙한 분별력을 갖출 것을 주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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