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냐 돈이냐. 신영선(극작가 및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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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냐 돈이냐. 신영선(극작가 및 연출가)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1.07.28 12: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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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이 다섯 명인 날도 있었고, 주말에도 30명을 넘기지 못 했다. 이리저리 노력해 보았지만 결국 수백만 원의 적자를 피할 수 없었다. 코로나 시국 자영업자의 손해치고는 매우 약소하다. 그러나 “주의 손이 코로나에 걸 려 짧아졌는가?”라고 반농담처럼 자문해볼 수는 있 을 것이다.
돈 장미꽃잎 

‘야, 요즘 힘들지?’ 공연을 끝 낸지 넉 달이나 지난 어느 금요일 밤에 걸려온 전화였다. 연극 연출을 전공 했지만, 졸업 후 사업을 택한 사람, 나의 첫 연출작의 배우와 스태프들을 위해 30만 원어치 정도의 고기를 산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아직 연극을 하는 것이 고맙고 연출을 잘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적자가 없기를 바라는 내 희망에는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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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하는 일을 선택했고, 그것이 예술이기 때문에 돈 문제로 힘들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30만 원어치라고 생각되는 주정을 들어준 뒤 상냥하게 통화를 종결지었다. 그가 윤영하던 이벤트업체가 폐업했거나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닐까 오래 전 꿈에 미련이 남았을 수도 있다. 자신보다 더 힘들 것이 분명한 사람을 찾아서 상대적인 위안을 얻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상대를 잘못 선택한 그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한다. 20세기 이후 연극은 언제나 사양산업이었고, 내 처지가 특별히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에술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종종 이런 이중 잣대에 부딪힌다. 명목상으로는 고상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인정하지만, 그들의 숙련 노동에 대한 인건비는 누구도 지불하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하여 부업을 하는 동안 평생을 갈고 닦고 고민해도 모자란 전문기술과 작업의 영역은 점점 멀어진다. 어렵게 만든 작품의 질은 떨어지고 관객은 더욱 연극을 볼 동기를 잃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세무서에서 사업자 등록을 할 때 나는 ‘믿음의 결단’을 했다. 예술적 이상이나 주님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목표가 아니라 돈에 대해서, 출연자와 스태프들의 사례비에 우선 순서를 두되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분배 할 것,

사비를 제작비로 쓰지 않을 것, 불가능해 보였지만, 나는 몇 년 간 그 원칙을 지켰다. 아니, 위로부터 지킴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돈을 써여 할 일에 스스로의 노동력을 갈아 넣긴 했지만, 나름 선방이라 자부했다. 그러나 몇 달전 공공기금을 지원받는 프로잭트가 무대에 올라 가든날, 사회적 거리두기는 2,5단계가 되었고 예약 취소와 환불요구가 잇따랐다.

관객이 다섯 명인 날도 있었고, 주말에도 30명을 넘기지 못 했다. 이리저리 노력해 보았지만 결국 수백만 원의 적자를 피할 수 없었다. 코로나 시국 자영업자의 손해치고는 매우 약소하다. 그러나 “주의 손이 코로나에 걸 려 짧아졌는가?”라고 반농담처럼 자문해볼 수는 있 을 것이다.

나는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는 사람이고, 직원이 하나도 없는 면세사업자 및 극단의 대표이며, 평생 기독교 연극을 하겠다고 서원한 순진해 빠진 모태신앙 인이었다. 몇몇 선교단체와 단기선교 경험에서 “주를 신뢰하면 나 하나는 굶어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밀어붙인 일이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딱 죽지 않을 만큼’이다. 지금도 딱히 노후를 염려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이다. 작가가 가장 힘이 있는 장르는 TV 드라마지만, 고지식한 그리스도인인 나는 대중의 취향에 맞출 능력이 없다.

필자 신영선 연출가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하자니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공공연히 말씀하신 예수는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런 이야기를 담은 뭔가를 만들라고 돈을 주는 곳은 없다. 설상가상으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들은 관객들은 눈이 높아졌고 그들을 만족시킬만한 멋진 것들은 상당한 제작비를 들여야 만들 수 있다.

기독교 계통에서 제작비를 댈 자금이 있는 기관들은 자신들의 행사를 그럴싸하게 꾸며주고 그들의 업적이나 이념을 선전해주길 바란다. ‘예술’ 영역에서 가장 미묘한 부분이 이 지점인데 예술가가 고민한 바를 형상화한 ‘작업’과 클라이언트의 욕망을 구현한 ‘선전’의 경계선이다.

그런 면에서 월급 받으며 매주 교회 칸타타를 찍어낸 바흐는 행복한 노동자였다. 바흐의 교회음악은 루터교회의 ‘선전’이자 최상급의 종교예술이니 그의 천부적 재능과 엄청 난 노동량을 감안하더라도 21세기의 ‘그리스도인+연극인’보다는 훨씬 나은 처지가 아닌가. 내게는 극소수 개인 외에 작업과 신앙을 공유할 수 있는 그룹이 없다.

자본과 권력과 신념이 일치할 수 있었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어떤 일이 ‘업’이 되려면 그것을 사 주는 시장이 있어야 한다. 신념과 이상에 동의하는 이들의 그룹이 ‘후원’하는 영역 역시 시장이다. 현대의 친절한 후원자들은 과거의 귀족과 종교 권력이라는 의뢰인보다는 부드럽지만, 불특정다수인 그들의 기대와 요구사항에 부응하는 것은 훨씬 더 미묘한 줄 타기를 요한다.

사방이 막힌 뒤 올려다볼 곳은 하늘뿐인가 싶다가도 그 역시 종교로의 도피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시대에 기적은 희귀하며 있다 해도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온갖 번잡한 일을 잠시 멈추고 듣는 일로 돌아간다. 우리 시대의 고통과 갈망에 귀를 기울이고 그 사이로 더 모호하게 들려오는 ‘다른’ 목소리를 구분해 내려고 신경을 모으는 수밖에 없다.

이 세상 안에 있으나 오래 듣고 있으면 분명히 구분되는 목소리, 듣는 이가 현실을 거슬러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하는 그 목소 리. 우리 시대의 결핍과 ‘다른’ 목소리가 교차하는 지점이 믿는 사람이 일하는 자리이다. 언어를 찾고 형태 를 만드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다음 작업은 적자 없이 언어와 형태를 갖추어 보여드릴 수 있기를 바랄 뿐 이다.

필자 신영선은 극작가 및 연출가이다. 서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동(同)대 학원에서 러시아 문학 전공으로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와 총신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으며, 경희대학교 학술연구교수이다. 제6회 옥랑희곡상, 제32회 기독교문화대상, 제12회와 제13회 대한민국오페라대상 창작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다. <레르몬토프 희곡전집>을 번역했으며 <퇴근길 인문학 수업:연결 편>의 한 부분을 맡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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