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 박정희를 살려준 백선엽의 過과 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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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흔적, 박정희를 살려준 백선엽의 過과 功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1.11.02 12: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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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은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 되었다. 백선엽의 이러한 過로 인해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다. 중국의 모택동은 功7過3으로 평가받고있다. 6천만명을 학살하여 기네스북에 오른 過가 있지만 국부로 추앙받는 功이 있어 천안문광장의 5층 높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미군은 백선엽을 ‘가장 걸출한 야전 사령관’ 또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한국 지휘관’으로 평가했다. 미국은 백선엽을 미군의 최고 파트너로 인정했고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
한국군 첫 대장 백선엽 장군

평양 인근 마을에서 근근이 농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백선엽의 가정은 극도로 가난했다. 부친은 백선엽이 일곱 살 때 젊은 아내와 삼남매를 남겨두고 가출했다. 백선엽은 그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유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독서와 사색으로 내실을 다지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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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은 기독교를 일찌감치 받아들였다. 수재들만 다닌다는 평양사범학교를 마친 뒤 백선엽은 교사의 길 대신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다른 동급생들이 외출하거나 휴가시즌에 술집을 전전할 때 백선엽은 간단히 끼니만 때우고 온종일 서점에 파묻혀 병서를 탐독했다.

군관학교를 졸업한 백선엽은 소위로 임관한 후 흑룡강성 가목사라는 곳에서 본격적인 군인생활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백선엽은 만주에서 5년간의 군생활을 청산하고 두만강을 건넜다. 백선엽은 1945년 12월 29일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했다.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돈은 단돈 500원이었다. 워낙 말수가 적고 사교적이지 않은 성품 때문에 아는 사람도 없었고 그를 반겨줄 사람도 없었다. 어쨌든 평양출신으로 제 할 일만 몰두하는 성격의 외톨이이자 탐구형인 백선엽은 서울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그 후 만주군관학교 선배인 정일권과 김백일 등과 함께 대한민국 군문에 들어섰다.

미군이 주도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군대의 창설 멤버가 되었다. 그 당시 대한민국은 정식으로 출범하지 못했던 시기였고, 좌익과 우익의 다툼이 격렬해지면서 사회의 치안이 위협받고 있었다.

백선엽은 부산의 5연대 중대장, 대대장을 거친 후 서울로 올라와 정보국장 보직을 맡게 되었다. 좌익과의 대결은 백선엽에게 운명처럼 다가왔고 좌익척결의 칼자루를 손에 쥐게 되었다. 여순반란사건은 여수와 순천의 관공서를 장악한 남로당이 좌익계 장병들과 합세하여 우익인사들을 참혹하게 살상한 사건이다.

백선엽의 첫 과제는 여순반란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숙군작업이었다. 만약 이 시점에서 대한민국 군대가 내부에 숨어들어온 좌익을 걸러내지 못했다면, 김일성의 6•25남침을 결코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남로당을 이끌었던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여러 차례 공언한 것이 있었다.

“우리 인민군대가 남침을 시작하자 마자 남한 내부에서는 수많은 봉기가 일어나 우리를 맞이할 것”이라고 했다. 그 가운데 핵심은 대한민국 군대 내부에 숨은 좌익의 발호였다. 따라서 군대 내부의 좌익을 솎아내는 숙군 작업은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의 명운이 걸린 아주 중대한 조치였다. 그 작업을 백선엽이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백선엽의 정보국 요원들의 대대적인 숙군작업과정에서 박정희소령이 걸려들었다.

사진 왼쪽 끝 백선엽 장군 왼쪽에서 세번째 박정희

백선엽과 박정희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책이라는 혐의를 받고 단심 군사재판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후 백선엽의 정보국 지하감옥에서 10일 후 사형이 집행되는 운명에 처해 있었다.

박정희는 남로당 군사책의 신분이면서도 이를 숨기고 같은 계열의 남로당 조직이 일으킨 여순(여수-순천)반란사건에 동조한 혐의를 받고 있다.

어느 날 김안일 정보과장이 백선엽국장을 찾아왔다. 김안일 과장은 박정희소령과 육사동기였다. 박정희 소령이 곧 처형장으로 끌려가는데 마지막으로 백선엽을 한 번 뵙게 해 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백선엽으로서는 박정희를 잘 알지 못하는 사이였지만, 이를 허락했다. 곧이어 야위어 핼쓱해진 얼굴에다 계급장이 없는 군복을 입고 수갑을 찬,  초라한 모습의 박정희가 그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후 박정희는 ‘한번 살려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의 눈가에는 눈물이 핑그르르 도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아무 말이 없었지만 자신의 감정을 모질게 짓누르고 있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사형수 박정희. 그는 백선엽과의 면담이 실패할 경우 10여일 뒤 수색의 처형장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해야 할 상황이었다.

이때 백선엽의 입에서는 매우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래요, 그렇게 해보도록 하지요.” 나중에 “박정희를 풀어줄 명분이 있어야 했던 것이 아닙니까” 라는 질문에 그는 “참 불쌍해 보이는 걸 어떻게 해”라고 답했다.

실상 박정희는 혐의점이 많았지만, 실제로는 그가 남로당 군사책으로 활동한 전력은 별로 없었다. 백선엽은 상부에 보고하고 허락을 받았다. 박정희는 사형을 면한 후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된 후 집행정지로 강제 예편되었다.

박정희는 감옥에서 풀려날 때 백선엽에게 “감사합니다”라고 꾸벅 인사를했다. 그 후 갈 때 없는 박정희에게 군무원으로 일하도록 배려하고 봉급은 자신의 정보국장 기밀비에서 지급하도록 했다. 당시 박정희는 어느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고, 계급은 소령에 불과 했다. 그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주한미군이 주관하는 백선엽 예비역 대장 생일파티가 열린 21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에서 백 장군이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사진 조선일보)

모든 위인은 功과 過가 있다. 지금까지 백선엽의 功을 중심으로 서술했다. 하지만 그의 잘못도 분명히 있다. 백선엽은 조선독립을 위해 일본과 싸우고 있었던 조선의용군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 제국이 만주국에 세운 간도특설대에서 "헌병" 중위로 복무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 국군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서 3년간 근무했다. 일제는 조선인으로 하여금 조선인을 토벌하도록 하는 간교한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을 세웠다.

백선엽은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 되었다. 백선엽의 이러한 過로 인해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다. 중국의 모택동은 功7過3으로 평가받고있다. 6천만명을 학살하여 기네스북에 오른 過가 있지만 국부로 추앙받는 功이 있어 천안문광장의 5층 높이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박정희와 백선엽 둘다 過 보다는 功 이 많은 인물이라는 데 공감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백선엽은 대한민국을 공산주의로부터 구해낸 영웅이었다. 백선엽은 대한민국국군 창설과 6•25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국군 1사단장이라는 전선 지휘관에서 시작해 1군단장, 2군단장,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총지휘했던 야전전투사령관, 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했다.

그 과정을 면밀히 지켜본 미군은 백선엽을 ‘가장 걸출한 야전 사령관’ 또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한국 지휘관’으로 평가했다. 미국은 백선엽을 미군의 최고 파트너로 인정했고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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