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의 한국 사회에서의 적응. 김광호 전도사 (장신대 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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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민의 한국 사회에서의 적응. 김광호 전도사 (장신대 신학대학원)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1.12.13 0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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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시즌에 어머니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도착하여 대문을 본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9살짜리 조카가 철대문에 “할머니 보고 싶어요”라는 글을 써놓고 할머니를 기다리며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국에 있는 여성들과 자녀들의 이야기이다. 중국에는 이렇게 10만 명이 넘는 탈북민들이 있다.
필자 김광호 전도사(장신대 신대원) 

Ⅰ. 들어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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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세워지기까지는 누군가의 섬김과 가르침과 실제 섬기는 사랑이 있다. 그 사랑이 감동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리까지 가게 한다.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사랑이다. 소명의 자리에서 사명의 길을 가는 나에게는 탈북과정에도 또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도 항상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천사와 같은 멘토가 있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나는 이 글에서 탈북하여 중국에서 나그네로 살던 삶과 한국에서의 신앙생활을 말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탈북민들의 상황을 알리고 한국에 온 탈북민들에게 왜 신앙생활이 필요하며, 어떤 것이 필요한지,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Ⅱ. 나는 고난의 행군 시기 탈북하였다.

2021년 4월 17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제8차 당대회에서 "나는 우리 당중앙위원회로부터 시작해서 각급 당 조직들, 전당의 세포비서들이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을 결심했습니다.“라고 공식적으로 고난의 행군을 천명하였다. 이 고난의 행군은 내가 북한에서 학교 다니던 1992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북한은 공장 기업소가 멈추기 시작했고,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매달 배급해줘야 하는 식량 공급이 줄기 시작했다. 이때로부터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들은 통일부의 2021년 9월 말 기준 통계로 34,800명이다.

3만 명이 넘는 탈북민이 왔지만 탈북한 동기는 다양하다. 국가적인 요인이 제일 많겠지만, 대부분 고난의 행군 여파로 인한 식량난으로 먹거리를 찾아 떠나고 가정 및 개인적 문제, 혹은 정치적 문제로 탈북하는 분들도 있다. 우리 가족은 가정 신분 문제로 가족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

나는 홀어머니 품에서 위로 누나의 사랑을 받으며, 외아들로 곱게 자랐다. 92년에 가족 탈북을 했다가 북송되었고, 97년에 2차로 탈북하였다. 누나는 우리가 중국에서 잡혔을 때 북송되지 않고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죽은 다음 달 북송되어 나오다 보니 8년형을 받은 누나가 어디로 보내졌는지 모른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누나의 이름을 부르면 식사하다가도 눈물을 흘린다. 아침이면 성경을 필사하면서 오매불망 딸을 만나기를 기대하며 기도한다.

Ⅲ. 중국에서 탈북생활

1. 중국에 있는 탈북민 여성과 자녀들

누나는 북송된 후 8년형을 판결 받았는데 가족에게 어느 감옥으로 갔는지도 알려주지 않아서 면회 한번 하지 못하였다. 나는 97년에 누나의 아들을 데리고 어머님을 모시고 재탈북에 성공하여 중국에서 10년을 살았다.

어머니와 조카와 나는 중국에 왔으나 국적이 없이 도망자요 나그네로 살았다. 조카는 국적이 없어서 공부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손자를 공부시키기 위해 자진하여 시집을 갔다. 그러나 어머니와 사는 한족은 농사꾼이며, 공장 경비 아저씨였다. 어머니는 가난한 경비 아저씨와 살면서 손자는 공부시킬 수 있으나 생활비가 없어서 식당에서 일해야 했다. 조카는 한족 아저씨와 공장 경비실에서 놀다가 저녁이면 대문 앞에 나와 할머니를 기다렸다.

나는 그 시즌에 어머니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도착하여 대문을 본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9살짜리 조카가 철대문에 “할머니 보고 싶어요”라는 글을 써놓고 할머니를 기다리며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국에 있는 여성들과 자녀들의 이야기이다. 중국에는 이렇게 10만 명이 넘는 탈북민들이 있다.

한복협은 탈북인 성도 학생 목회자 등 18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2. 유리잔 같은 탈북민의 마음

보통 탈북민들은 중국이나 제삼국을 거쳐서 한국에 입국한다. 그 과정에서 무국적자로서 나그네 생활과 도망자의 삶을 경험하며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고 성격이 날카로워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중국에서 탈북민이란 이유로 인권이 무시되고, 보호받을 수 없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가 마음을 살짝만 건드려도 폭력적이고 위협적으로 대응을 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마치도 툭 치면 깨지는 유리잔 같다.

물론 중국에서 사는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나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강한 긴장과 품은 소망을 이루어야만 하는 간절한 갈망이 마음을 날카롭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중국에서의 삶을 기억하며 탈북민들의 고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Ⅳ. 한국에서 탈북민으로서 삶

한국 도착하였을 때

나는 2007년 5월에 한국에 입국하였다. 한국에 도착하여 첫 번째로 놀란 것은 인천공항 화장실의 깨끗함과 화려함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하나원에서 꽃동네에 가서 한국의 복지에 놀랐다. 세 번째로 놀란 것은 2008년 수입 소고기 광우병 때문에 광화문에서 촛불시위를 하는 것과 대통령을 함부로 비판하고 욕하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네 번째로는 한국에 교회가 그렇게 많은 것에 놀랐다. 한국의 환경과 언어의 자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 종교의 자유에 놀란 것이다.

2. 한국에서 꿈과 현실

나는 북한에서는 세계를 돌아보고 싶은 꿈을 꾸었고, 한국에 와서도 큰 빌딩을 사서 부동산 업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사업을 하여 부자가 되고 싶었다. 부자가 되면 중국에서 팔려서 인권이 무시된 탈북 여성들을 돕고 싶었고, 우리 조카와 같은 탈북 여성들의 자녀들을 돕고 싶었다.

내가 이 말을 지키기 위해 잊지 않으려고 국정원 조사관에게 말하였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꿈과 현실은 다르다. 새로운 문화 적응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한국에서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 차별받는 질문과 상황들이 우리의 정착에 소외감을 주었다. 내가 하나원을 나와서 먼저 했던 것이 중국에 남아있는 조카와 어머님을 모셔오는 일이다. 그래서 돈도 벌어야 했고, 아내랑 함께 한국 사회에 정착해야 하였다.

3. 북한 문화에서 오는 영향

정착하며 본 한국의 문화는 먼저 설명하고 나중에 결정하고 행동하는 수평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우리가 겪어온 것은 당이 결정하고 우리는 따르며 행동하는 수직적인 문화이다. 나는 이 문화 차이를 극복하느라 힘들었다. 북한에서 어린 시절을 뼛속까지 ‘내 운명의 주인은 나 자신이다, 내 운명을 헤쳐나가는 힘도 나 자신이다’는 주체사상 이론이 국민을 눈멀게 하여 혼자 결정하고, 연합을 모르고, 사랑을 모르게 했다.

한국에 와서 나는 한 친구의 인도로 교회 가게 되었고 그 교회에서 나는 세례를 받았고, 한 할머니 선교사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나는 지금까지 쭉 신학대학 4년, 신대원 3년, 일반석사 과정을 1년 차 공부하고 있다.

4. 할머니 선교사님의 사랑

처음 할머니 선교사님을 만났을 때 나는 전형적인 북한식 가부장적 남자였다. 그러나 그런 남자였어도 손자처럼, 가족 같이 사랑하는 할머니 선교사님의 사랑은 나를 변하게 하였다. 아내가 교회 가는 날 아이를 업고 기저귀 가방을 쥐고 가도 나는 앞에서 먼저 걸어가던 사람이다.

어른들과 식사할 때도 나는 숟가락 같은 것을 놓는다거나 하는 예의를 몰랐다. 어른들과 함께 문을 나서면서도 먼저 나가 버린다. 이렇게 나는 외아들로 자라서 사랑만 받고 사랑을 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탈북민으로 한국에 와서 사랑이 무엇인지 들어보지도 말해보지도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가족처럼 사랑하니 변하기 시작하였다.

5. 나는 할머니 통해 기도를 배웠다.

할머니 선교사님은 먼저 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성경 말씀을 가르쳤다. 나는 할머니 모습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어떤 분인 것을 배웠다. 두 번째로 할머니는 나에게 예배와 기도가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주었다. 할머니는 예배에 목숨을 걸었다. 할머니 방은 주어진 하나님의 임무를 가지고 천사와 씨름하는 장소였고, 기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하나님의 승리가 있는 방이었다.

세 번째로 할머니는 가족이 되어 주셨다. 할머니는 마치 학부모처럼 내 친구들과 가족을 초대해서 거의 매일 같이 식사를 해주셨고, 집에 올 시간이 되면 기다리시곤 하셨다. 할머니는 이렇게 가족이 되어 주셨다. 하나님의 사람 한 사람이 영향력이 나에게 인생 전체 삶의 방식을 바꾸게 하였다.

전에는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던 내가 이제는 내가 만난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그분의 의미와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하나님의 사역에 동역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사명의 길을 가고 있다. 할머니는 나에게 제자로서 멘토였고, 예배자로서 멘토였고, 가족으로서 멘토였다.

Ⅴ. 한국 정착에서의 애환

1. 한국 처음 3년

한국에 정착하는 것은 외로움과의 싸움이다. 하나원을 수료하고 삼 년은 정말 뭐가 뭔지 몰라서 수없이 방황하며 다닌다. 알려고 노력하고, 수많은 정보 앞에 선택이 어려워 모든 사람이 흔들린다. 그러다 조금씩 하나하나 알기 시작하고 한국 정착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할 때는 이미 3년이 지나서이다. 그리고 나는 예수전도단 제자훈련을 받고 내가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알고 소명과 사명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를 발견한 것이 대단한 발전이지만 성격은 여전히 다뤄지지 못하였다. 그 상태로 나는 신학교까지 가게 되었다.

2. 다뤄져야 할 성품

탈북민 남자들은 자존심이 세다. 무시하면 어쩔 줄을 모른다. 그래서 나도 한때는 방황하였다. 내가 처음 한국에 와서 심하게 우울하며 방황하였을 때는 처음 한국에 와서 힘들어서가 아니고 이미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한참 신학을 하고 있으며, 전도사로 훈련할 때이다.

전도사로서 훈련을 받으며 제일 힘든 것이 성품이 다뤄지는 것이다. 나의 일상에서의 생활에서 성격이 다뤄져야 한다. 밖에서는 인내가 되는데 집에 와서는 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먼저 상의하고 함께 나누고 일을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북한에서처럼 먼저 선포하고 당위성을 이야기하고 해결하려 하니 옆에 사람들이 힘들었다. 북한식으로 일하다 보면 금방 다뤄지지 않은 성품이 나온다. 그리하여 성품이 다뤄질 때까지 교회 안에서 사역이 힘들었다. 이것은 여전히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래서 꼭 성품 훈련이 필요했다.

3. 공부하면서 힘들었던 것

한국에 31살에 와서 35살에 검정고시 보고 신학교를 가서 공부하였다. 첫째로 제일 힘들었던 것은 외래어다. 두 번째로 글을 읽는 습관이 되어있지 않아서 책을 읽으면 이해되지 않고 하여 힘들었고, 세 번째는 리포트 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 이렇게 8년을 공부하고 있지만 지금도 여전히 책 읽는 것 힘들다. 그러나 지금은 할만하다. 나 같은 학생이 있다면 책을 읽는 독서 모임, 혹은 연구방법론 같은 것을 가르칠 필요 있다.

4. 재정관과 법에 대한 무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족이 있다 보니 재정적 문제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자존심 상해서 돈 없어 그런단 말은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성질부릴 때도 많다. 아내가 재정관리를 잘하지 못하였다면 나는 거지가 되었을 것이다. 돈을 저축하는 습관, 그리고 수입과 지출을 관리하는 습관, 등 재정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돈을 너무 쓸 줄 모르는 것이 문제지만 재정 무개념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법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심지어 교통사고 나도 그냥 법을 알았다면 그래도 도움이 되었겠는데 모르고 당하는 탈북민들이 많다. 현재 법에 대한 인식 부족하다 보니 탈북민들이 범죄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5. 관계

사역자가 되어 더 힘들었다. 북한에서처럼 날따라 앞으로는 되는데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신뢰하고 같이 만들어가며, 내 시간과 마음과 지혜를 함께 하나님 나라 섬겨가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훈련하느라 힘들었다. 어딜 가든지 그곳에 리더에게만 잘하려는 잘못된 습관들이 사역에서 나타난 것이다.

또한 사역자들 속에서는 자기 사역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으로 사역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사역의 욕심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지나친 경쟁력에서 오는 것이다. 북한 문화의 잔재다. 그래서 관계가 엉망이 되어가는 사역자들을 종종 볼 때마다 안타깝다.

6. 연합사역

신학교 북한선교 동아리 회원 전도사(탈북민 전도사 포함)들이 여름방학에 자비로 탈북청소년들을 위한 캠프를 섬겼다. 이 캠프를 2019년부터 올해까지 3년 차 진행하는데 코로나 시기 진행하는 캠프라 정부 지침도 지켜야 하고, 탈북청소년들에게 양질의 캠프를 섬기는 일이 쉽지 않다. 제일 힘들었던 것이 동역자들의 동요이다. 이를 위해 한 사람 한 사람을 설득하는데 인내가 필요했다.

나의 성격을 내려놓고, 주님 주시는 믿음을 지키는 것이 나에게 어려웠다. 믿음을 지키는 것은 주님 주신 마음과 사역의 당위성을 끊임없이 설득하는 것이 힘들었다. 거기에 탈북민 전도사들이 참여가 저조하다. 이는 탈북민 전도사들이 관심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교회와 함께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사회적응이다.

7. 다양한 개척 경험

나는 한국에 와서 할머니 선교사님과 함께 개척교회를 경험하였고, 대안학교 개척을 경험하였고, 신학교들에서 북한선교 동아리 활동을 통해 학생 신분으로서 북한선교 활동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탈북민이 없는 교회에서 7년을 사역자로서 경험하고 현재는 성민교회(통합)에서 통일선교부를 담당하고 있다. 탈북민들에게 교회에 대한 경험은 필수이다. 교회를 모르면 선교도 잘할 수 없다. 성민교회는 부족한 것을 알지만 많은 섬김과 이해로 섬겨주고 있다. 이를 통해 전임들의 역할을 배운다. 좋은 경험이 아닐 수 없다.

Ⅵ. 결론 :

1.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

문제투성인 탈북청년이 하나님의 사역의 동역자로 세워지기까지 뒤에는 스승이 있었다. 먼저는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인 멘토들의 삶을 통해서 나는 보고 배운다. 나의 선생님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으며, 섬김, 기도, 예배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비를 가르치셨다. 기도하는 죄를 범치 않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도하시길 원하시는지 묻고 사는 성령의 삶을 가르치셨다.

교회는 나에게 가족공동체가 무엇인지 알게 하였으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하나님 나라 이뤄가는 가족공동체를 체험하게 하였다. 나에게는 선생님들과 교회의 끊임없는 관심과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인해 오늘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 탈북민들을 사역자로 세우기

한 탈북민은 3년 동안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노가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다. 신학을 했지만, 교회를 배울 수 있는 현장이 없고, 신학교들에는 북한선교를 경험할 장이 없다. 그래서 탈북민들은 교회를 경험할 수 있는 장을 열어 교회와 목회를 배울 수 있게 하고, 신학교 목회자 후보생들이 북한선교의 경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1 교회 1 탈북민 사역자 세우기 운동을 한다면 북한선교가 열린다고 확신한다.

3. 현재 탈북민 사역자 상황

현재 48개의 탈북민이 개척한 교회가 있다. 사역자로 활동하는 사역자는 160명 정도가 된다. 이들이 한국교회의 북한선교를 주도할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도와야 한다.

이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지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사랑과 예수님의 도우심과 성령의 권능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탈북민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한국의 질서와 법을 모르고 있는 것과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바라보다가 넘어질 때마다 함께 해줄 공동체와 멘토가 필요하다.

한국교회를 몰라서 가려는 엄두도 못 내는 탈북민 전도사들이 일반교회 전도사로 도전할 수 있게 교회의 문턱을 확 낮추고 교회 질서와 사역을 배울 수 있는 공동체와 하나 되는 훈련할 교회 공동체가 필요하다.

탈북민 사역자들이 북한 복음화와 탈북민 다음 세대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세우며, 선교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여 진행할 수 있게 한국교회가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4. 탈북청소년과 민족 디아스포라 다음 세대 사역

나도 이런 멘토와 교회가 있어서 지금 ‘하트브릿지’라는 이름으로 탈북청소년 캠프를 섬기고 있다. ‘하트브릿지’는 비영리 NGO단체이며, 신학교 북한선교동아리들과 연대하며 함께 북한 탈북민 청소년 교육 캠프를 섬긴다. 이 캠프에 탈북민 및 민족 디아스포라(러시아 고려인, 중국 조선족, 일본 재일동포) 자녀들을 초대하여 복음 전파와 참가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비전을 심어주어 민족 복음화를 위해 다가올 통일을 준비하는 단체이다.

이는 북한을 위해 기도한 선진들의 기도 응답이며, 북한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이다. 이 모든 영광을 나를 부르시고 북한을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트브릿지 탈북청소년 캠프 영상은 아래 유튜브(링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channel/UCeoJQRuBodK87JimqxCaB7g 탈북민의 한국 사회에서의 적응.ㅅ신학생ㅎ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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