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다시 가고 싶은 크로아티아
상태바
(여행) 다시 가고 싶은 크로아티아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4.04.19 09: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펼쳐진 좁고 긴 해안선에 위치한다. 육지 쪽으로는 산지가 계속되며, 해발 412m의 스르지(Srđ) 산이 도시를 굽어보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성곽을 한바퀴 돌면서 성안 주택과  반대면 바다를 볼수있다.왼편 뒤쪽 성루는 상당히 높다. 왼쪽 중앙 사각 건물옆에 성곽에 오르는 계단이 있다.

문화적으로 유럽 남쪽에 포함되는 북아프리카 모로코부터 북유럽 스웨덴까지 5~7회 여행을 하면서, 덴마크나 스위스 보다는 크로아티아는 한 번 더 가고 싶은 아름다운 나라로 기억되었다. 로마처럼, 중세 유적과 건축물들이 잦는 지진에도 남아있었다. 맛좋은 과일들이 저렴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Like Us on Facebook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 연안에있는 관광도시. 행정구역상으로 두브로브니크-네레트바 주(Dubrovnik-Neretva County)에 속한다. 고딕,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시가지와 그곳을 둘러싼 성벽의 경관으로 유명하다.

남북으로 긴 형태의 크로아티아 남쪽에 있는 두브로브니크는 관광도시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일반적으로 라구사(Ragusa)라고 불렸다. 라구사는 구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플라차 대로를 기준으로 바다 쪽을 이르던 말로, 원래 섬에 가까웠던 이곳에는 로마계 주민들이 거주했다. 슬라브계 주민들이 거주지를 형성한 육지 방면의 이름은 두브로브니크였다.

저의 등 뒤로 스르지(Srđ) 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두브로브니크
스르지(Srđ) 산에서 저의 뒤로 내려다 보이는 두브로브니크

어원에서도 양측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데, 라구사는 돌을 뜻하는 라틴어 Lausa에서, 두브로브니크는 떡갈나무를 뜻하는 크로아티아어 Dubrava에서 왔다. 1차 대전 이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외래어의 영향을 받은 지명인 라구사 대신 크로아티아어에서 나온 두브로브니크를 택했다.

크로아티아는 아드리아 해를 따라 펼쳐진 좁고 긴 해안선에 위치한다. 육지 쪽으로는 산지가 계속되며, 해발 412m의 스르지(Srđ) 산이 도시를 굽어보고 있다.

두브로브니크 앞바다에는 로크룸 섬이, 북서쪽에는 엘라피티 군도가 있다. 이 일대의 기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 전 계절에 걸쳐 따뜻한 날씨를 보이며 맑은 날이 연중 240일 이상이다.(일조량이 부족하여 일광욕을 하는 유럽과 비교된다)

강수량은 여름에 적고 겨울에 많다.알프스-히말라야 지진대가 지나가는 곳으로 지진이 잦다. 지진 피해를 입은 기록이 숱하게 남아 있으며, 1667년에는 규모 10으로 추정되는 기록적인 대지진으로 도시가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크로아티아는 높고 낮은 폭포가 많았다.

1979년 몬테네그로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진도 7의 피해를 받아 1,071곳의 건물이 손상되었는데, 이 중 대부분은 문화재에 해당했다. 1995년과 1996년에도 지진이 발생했다. 1996년 도시 북서쪽 20km 지점에서 규모 6의 지진이 발생, 두브로브니크로 통하는 도로가 차단되었다.

역사는 7세기 후반 라구사를 건설한 사람들은 아바르와 슬라브 등의 이민족들에게 약탈당한 도시를 뒤로 하고 새 거주지를 찾던 인근 로마 식민시 거주민들이었다. 이들은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요새를 건설했다.

시간이 지나 라구사인들은 좁은 해협 건너 스르지 산기슭에 살던 슬라브계 크로아티아인과 차츰 동화되기 시작해, 나중에는 해협을 메워 대로를 건설한 뒤 성벽도 그 너머로 확장하였다.동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던 866년에는 한창 세력을 뻗치던 아글라브 왕조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15개월 동안 공격을 버티던 라구사는 황제 바실리오스 1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바실리오스 1세는 선단을 보내 라구사를 구원했다.라구사는 동로마 제국에 이어 베네치아 공화국과 헝가리 왕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다. 도시는 일찍이 중요한 무역 거점으로 성장하여 라구사의 상인들은 이탈리아와 발칸은 물론 영국까지 돌아다니며 상업 행위를 했다.

구글 항공지도 이탈리아 건너편에 해안따라 크로아니티가 있다. 두브로브니크는 국토 하단에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에도 라구사 출신 선원이 끼어 있었다. 1358년 자다르 협약 이후 시작된 헝가리 지배 당시 라구사는 금전을 바치는 대신 상당한 자치권을 위임받아 공화국 체제로 전환했다. 도시의 책임자는 렉터(rector)[2]라고 불렸다.

상인 공화국 라구사의 부는 날로 늘어나 15세기에는 국고에 7백만 두카트를 보유할 정도였다. 전성기의 라구사는 4만 인구에 3백 척이 넘는 선단을 보유한 부유한 도시였다.

라구사는 비교적 자유로운 이념을 가진 도시로도 유명했다. 비슷한 시기 유대인을 추방한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라구사는 쫓겨 온 유대인들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다. 1389년 오스만 베이국과 기독교 연합군이 격돌한 코소보 전투에서 패하고 도망친 세르비아 왕족도 받아들인 적이 있다.

여기에 분노한 오스만에 대한 라구사의 반응은 당신네가 도망쳤어도 받아 줬어. 라구사는 이러한 이념과 충분한 재원을 바탕으로 각종 사회 제도를 정비했다.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보건, 교육, 요양 부문에서 공공 서비스를 제공했다. 건축에도 많은 예산을 투자해 성벽을 보강하고 도로와 급수 시설 등을 정비했다. 필레 게이트 바로 안에 있는 오노포리오 급수대도 이 시기 만들어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