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요청이 도를 넘으면 편법에 눈이 간다. 정장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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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요청이 도를 넘으면 편법에 눈이 간다. 정장복 교수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8.01.23 14: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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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장복 전 교수

설교의 세계를 유심히 살펴보면 매우 우려되는 부분이 많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설교를 듣는 사람과 설교를 하는 사람의 관심과 견해가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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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를 하는 사람은 한편의 설교를 완성하기까지 평온을 유자하기가 힘들다.

설교 본문의 선택에서부터 설교를 마치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한다. 설교의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 되지 못할 때 설교자의 심기는 불편해지고 당황하게 된다.  설교를 하고 돌아서면 다음의 설교준비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미완성의 설교원고를 가지고 단에 서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도 인간이 마음대로 조작하여 설교할 수 없다는 기본 울타리가 처져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운반(運搬)해야 하는 엄격한 룰(rule)을 지켜야한다.

그래서 설교는 목회자의 가장 무거운 멍에이다. 이 무거운 멍에는 목회의 다양한 의무를 함께 수행해야 함으로 그 무게가 날로 막중해진다. 이 멍에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한 설교자들은 건강에 이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러한 설교자의 고충에 비례하여 설교의 파트너인 평신도들의 관심과 기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무엇보다도 설교자의 고통을 이해하면서 설교를 듣는 평신도들이 그리 많지 않다. 마치 설교자에게는 말씀의 생수가 언제나 솟아나는 것처럼 착각을 한다.

언제나 설교자의 입에서는 자신을 감동시키는 ‘은혜의 말씀’이 터져 나오리라 생각한다. 나의 감성을 움직여 울고 웃게 만들어 주기를 기대한다. 거기에 더하여 신앙의 연륜이 깊은 평신도는 설교의 내용과 전개를 유심히 살핀다.

설교 준비의 정도가 성실한지를 들여다본다. 뿐만 아니라 설교의 내용이 본문에 충실한지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판단을 나열하고 있는지 싸늘한 눈으로 살펴본다. 심지어 설교 전달의 형태까지 눈여겨 보는 자칭 설교평론가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설교자의 준비부족을 지적할 뿐 애정어린 원인분석은 드물다. 힘이 빠진 상태로 설교를 하면 아쉬운 생각은 하면서도 그 건강에 이상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설교의 파트너들인 평신도들이 설교자의 고뇌를 파악하고 그를 도와 건전한 설교가 나오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설교를 무겁게 생각하고 설교 요청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사소한 사연을 가지고 목사의 심방이나 상담을 요청하여 설교자의 시간을 빼앗은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평신도들이 이러한 항목만이라도 고려하여 설교사역을 도와 줄 수 있다면 설교자는 설교사역에 더 많은 정성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신도들로부터 이러한 배려가 없거나 협조의 마음들이 보이지 않으면서 그 많은 설교마다 감동의 설교를 기대한다면 설교자는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경우에 따라 어찌할 수 없이 편법에 눈을 돌리기 쉽다.

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설교자의 편법 또는 요령이란 남의 설교를 통째 복사하여 그대로 들고 단에 서는 경우이다. 또는 여러 설교의 부분들을 가져와 짜깁기를 하고 싶은 시도이다.

거기에 더하여 자신의 설교를 ‘재탕’하려는 유혹이다. 어떤 교회에서는 이러한 편법을 활용한 설교자들과 결별하는 사례가 종종 발생하는 요즈음이다. 

어느 날 어느 교회의 중직자가 자기 교회의 목사의 설교문과 인터넷에 뜬 특정 목사의 설교문을 가지고 와서 이렇게 남의 설교를 ‘도용’해도 되는지를 물을 때 필자는 설교학 교수로서 그 순간 몹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교자가 편법을 동원했을 때 찾아 든 다음과 같은 부작용에 우리 설교자와 평신도는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먼저는, 무엇보다도 설교자가 편법을 시도했을 때는 양심의 두근거림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횟수가 잦아지면 양심의 소리는 들이지 않고 상습화되어 생명력이 없는 설교가 이어진다.

설교자가 말씀의 메시지를 직접 듣고 설교를 작성하는 능력이 소멸되어 설교발전의 길이 막힌다. 설교열정이 없어지고 설교가 환희의 사역이 되지 못하고 환멸의 사역으로 변할 가능성이 많다. 말씀에서 메시지를 듣고 보면서 명상하고 성령님의 섭시(讘示-속삭여 보여주심)와 만남을 이룩하지 못한다.

 설교자의 앞에 있는 회중의 현장과 동떨어진 설교를 하게 됨으로써 말씀의 현장화가 이룩되지 못한다. 끝으로, 설교는 주어진 시간을 메꾸는데 급급하게 됨으로 설교가 자연적으로 형식화되는 경향으로 변질된다. 그리고 설교자는 자신의 능력의 한계에 대한 좌절감과 ‘회칠한 무덤’의 주역으로 삶을 이어가게 된다. (평신도 신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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