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 6일전쟁. 1967년 6월 5일부터 6월 10일까지 아랍연맹과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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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6일전쟁. 1967년 6월 5일부터 6월 10일까지 아랍연맹과 이스라엘.
  • 박동현기자
  • 승인 2015.09.12 1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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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1967년 6월 5일에 공군기를 출동시켜 이집트 공군기지를 맹폭격하여 170분에 걸친 폭격 끝에 이집트 전투기 300 대를 파괴했고 6월 6일에는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전투기 416대를 파괴,
▲ 동영상 캡처, 모슈아렌스/ 전 이스라엘 국방장관

<동영상> 우측 하단을 클릭하여 전체화면으로 볼수 있습니다. 10분 12분 21분을 눈여겨 보십시오 어떻게 이집트가 이끄는 아랍연합군과 싸워 6일만에 이집트를 박살내고 종전에 합의 했을 까요? 현대전에 선지자의 예언이 언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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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중동 전쟁(第3次 中東 戰爭)은 1967년 6월 5일부터 6월 10일까지 발발한 아랍연맹과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이다. 이스라엘 측에서는 6일 전쟁(六日戰爭), 아랍 세계 측에서는 6월 전쟁(六月戰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수에즈 전쟁 이후의 중동 분쟁은 1964년 5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가 결성되어 아랍 국가들이 그 대표권을 승인함으로써 새로운 양상으로 확대된다. PLO는 그 헌장에서 이스라엘 말살과 팔레스타인 국가 건국이라는 '팔레스타인 대의(大義)'를 규정, 이집트·시리아 등 아랍 국가의 지원하에 1950년대부터 활동해 왔던 알파타(Al-Fatah)와 팔레스타인 해방군(PLA) 등의 무장조직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무차별 테러 공격을 자행했다.

▲ 화면갭처

1967년 6월5일 이스라엘은 PLO의 테러에 대한 응징과 아랍 국가의 공격 시도에 대한 자위를 명분으로 항공기에 의한 공중기습공격과 시나이 반도에 대한 대공세를 전개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당시 이스라엘이 국내의 경제적 위기를 외부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돌파구를 찾고자 한 저의가 깔려 있었다고 지적된다.(역자주: 다양한 분석이 있다)

전쟁은 시리아·요르단으로 확대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예정된 계획대로 승승장구, 개전 4일 만에 시나이 반도, 요르단 강 서안 지구, 골란고원 등을 점령하였다. 6월 6일 UN(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의 정전 결의안을 양측이 수락함으로써 6월 10일 정전이 성립되었다.(이집트는 사전에 전승 장담 홍보전을 펼쳤지만 자국의 수백 대의 전폭기들은 이륙 한 번 못하고 고철이되었다)

아래는 2000여 년간 국가(국토, 국민, 주권)로써 존재 하지 않았던 신생 이스라엘이 1948년 탄생하며서 만들어진 역사다. 중동 지역 분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 문제, 석유 자원을 둘러싼 강대국의 개입, 쿠르드족 문제, 이슬람교 내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 등으로 인해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 중 중동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이 원인이 되어, 이스라엘 건국을 막으려던 1차 중동 전쟁 이후 모두 4차례의 큰 전쟁을 치렀으나, 번번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전쟁은 끝났고, 이스라엘은 건국 당시보다 더 확장된 영토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여파로 1970년대부터 세계는 이슬람계 테러 집단의 계속되는 테러를 겪게 되었으며, 전쟁이 끝났어도 평화는 정착되지 않아 아직도 중동은 불안한 정세 속에 있다.

제1차 중동 전쟁 (1948년)

▲ 화면탭처

1차 중동 전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이로 인한 팔레스타인 문제로 아랍의 연합군과 이스라엘 간에 벌어졌다. 5월 16일에 이집트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했고 전 아랍이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 아랍 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이에 이스라엘 민간인들은 부족한 무기지만 정신력으로 싸웠고 20일 넘게 일어난 전투 끝에 결국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지켜내 1948년 6월 11일 스웨덴의 중재로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미국(유태계 미국인 영향력)의 지원으로 현대적인 전투 군대로 변한 이스라엘군은 모세 다얀 장군의 지휘 아래 이집트 카이로, 요르단 암만, 시리아 다마스쿠스를 폭격해 승리를 거두면서 1949년 2월에 평화 조약 조인으로 제1차 중동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전쟁을 이스라엘 독립 전쟁이라고도 불린다.(특징은 이스라엘이 공격하여 상대국을 파괴 한 뒤 평화조약을 맺는다)

제2차 중동 전쟁 (1956년)

"수에즈 위기"라고도 한다. 1952년 7월에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쫓아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나세르는 소련과 친선 관계를 유지했고 미국과 영국이 아스완 댐 건설 지원 요청을 거절하자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하며 수에즈 운하를 점령해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반발해 공군을 동원해 수에즈를 폭격했고 이스라엘도 동맹을 맺고 이집트 시나이 반도를 침공했다. 하지만 이 전쟁이 자칫 세계 대전으로 번질 위험이 있어서 미국과 소련이 압력을 가했고, 유엔 총회 결의에 따라 3국 군대가 철수하면서 끝이 났다. 아랍권에서는 "삼국 침략"이라고도 부른다.

제3차 중동 전쟁 (1967년) 6일전쟁= 1967년 6월5일-

제2차 중동전쟁 후 1964년경부터 아랍 게릴라의 활동이 시작되어, 게릴라의 기지가 된 시리아에 대해 이스라엘은 1967년 4월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에 대해 붕괴에 직면한 아랍의 결속강화를 이스라엘과의 대결에서 회복하려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는 대군을 시나이반도에 투입, 유엔 긴급군의 철수를 요청하고 아카바만(灣)의 봉쇄를 선언하였다. 6월 5일 이집트-이스라엘 간에 전투가 개시되었고, 전란은 시리아 ·요르단으로 확대, 전면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스라엘은 6월 5일에 이스라엘 공군기를 출동시켜 이집트 공군기지를 맹폭격하여 170분에 걸친 폭격 끝에 이집트 전투기 300 대를 파괴했고 6월 6일에는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전투기 416대를 파괴해 아랍측 공군력을 괴멸시킨 이스라엘군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4일 만에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였으며, 요르단강 서안(西岸)지역, 시리아 국경의 골란고원을 공략하였다. 국제연합 안전보장 이사회는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하였고,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이 실현되었다. 또한 안전보장이사회는 그해 11월 중동분쟁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결의 242호를 채택하였다 (1967년 6월5일과6일 양일간 적국의 전투기 700 여 대를 파과 한다는 것은 컴퓨터 게임 같으나 Fact 다. 이스라엘기 격추된 기록이 없다) 

제4차 중동 전쟁 (1973년)

▲ 화면캡처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의 기습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됐다. 이 날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축제일인 욤키푸르(사죄의 날) 이었다. 많은 병사들이 사죄의 날 휴가를 떠난 이때 이집트군의 병력은 75만, 탱크 3,200대, 소련제 미사일(SA-6) 까지 총동원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병력은 이집트군의 3분의 1도 안 됐고 무기들도 이집트군의 절반도 안 됐다. 개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17개 여단이 전멸되었다. 시리아 역시 소련제 무기를 앞세우며 이스라엘 영내로 진격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승리가 코앞이었으나, 이때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대적 지원을 해주었다.

이 전쟁에서 소련이 35억 달러를 아랍국에, 미국이 22억 달러를 이스라엘에 쏟아부었다. 미국은 30일간 포위됐던 이스라엘에 군수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무려 5,566번의 비행 수송작전을 펼쳤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반격에 나섰고 비교적 허약한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집중포격했다. 골란 고원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시리아 군 탱크 867대, 차량 3,000대 이상을 파괴했다. 욤키푸르에 일어난 전쟁이라서 욤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아랍(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은 2014년에도 전투를 벌였다)  자료출처 : 위키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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