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영상/글> 교만한 지성보다는 겸손한 마음이.. 9월 20일 본문: 고린도전서 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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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글> 교만한 지성보다는 겸손한 마음이.. 9월 20일 본문: 고린도전서 8:1~13
  • 박동현기자
  • 승인 2015.09.3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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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에게 상처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만나교회 김병삼목사
▲ 김병삼목사

지식은 교만을, 사랑은 덕을 여기에서도 사도 바울은 아주 실제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아주 선교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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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우리 자신의 신앙에 익숙해지면 ‘익숙함’과 ‘지식’이 기준이 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평신도들이나 초신자들에게서 발생하기보다는 뭔가를 좀 안다는 지적 교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8장부터 16장까지는 당시 고린도 교회가 안고 있었던 실제적인 문제들을 다루는데, 그중의 첫 번째가 ‘우상 제물’에 관계된 논쟁입니다. 본문 1절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무슨 말인가요? 조금 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는데, 성경에 관한 지식과 믿음의 경험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믿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랜 신앙생활로 신앙의 경험과 신앙생활이 능숙해질 수 있으나 그것이 믿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본질에서 겸손함과 자기 포기를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들어가는 순간, 아니 자신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믿음을 기준으로 삼는 순간 교만이 찾아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그 믿음을 끝까지 간직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느냐, ‘믿음’을 자랑하며 누군가를 핍박하는 사람이 되느냐? ‘지성’이 겸손하게 나타나느냐, 아니면 ‘지성’이 교만하게 나타나느냐? 자신의 믿음과 지성에 ‘확신’은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말입니다. 자신의 확신을 버릴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확신 때문에 상대를 힘들게 하기보다는 덕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은 늘 누군가를 정죄하는 데 사용됩니다.

당시 초대교회 안에는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의 문제만을 가지고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서 사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은 교회의 문제가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 없는 지식’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인간의 최초의 죄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것, 그리고 불순종의 결과로 인간이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있는 욕망이 무엇입니까? 모든 인류의 문제를 지식으로,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 없는 지식이 얼마나 큰 재앙으로 인류에게 되돌아오는지 우리는 경험합니다.

나 자신이 확신하는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지식’이 교만하다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지식이 ‘진리’처럼 자리를 잡을 때입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신의 주장이 강한 사람들은 절대로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즘 이런 표현을 종종 사용합니다. ‘지식의 저주’ 혹은 ‘지식의 오류’ 적절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지난해 심장 스턴트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심장에 있는 관상 동맥이 그렇게 막혀 있는데 전조 증상이 없었느냐고 묻습니다. 저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 스스로 지식의 저주 속에 빠졌던 것이죠.

어느 주일 아침 갑자기 가슴과 어깨 쪽으로 극심한 통증이 와서 설교를 못 할 뻔 했습니다.
그런데 심장의 문제가 생겼다는 생각보다는, 제가 가진 질병들 때문에 일어난 현상으로 생각하고 안정제를 먹었습니다. 그리고 30분쯤 지나서 통증이 사라지고 난 후에 설교하고 며칠을 지냈던 것입니다. 만약 저에게 이전의 병증이 없었다면 통증이 왔을 때 심각하게 의심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죠.

사실 우리 인간의 지식이라는 것이, 대부분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요? 우리가 배운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진리로 알았던 지식의 진리가 얼마나 바뀌어왔는지를 경험하지 않습니까? 결국, 지식이란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지식의 한계일 뿐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하죠.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가장 큰 적이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은 과거의 것으로 머물러야 하는데, 현재에도 그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지식의 오류와 교만이 신앙생활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상 제물에 대한 지식을 진리로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교회의 문제, 그리고 사람들이 받는 상처에 대하여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4절과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두 절을 비교해 보면 사도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진리인 것은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우리에게 진리인 것이 진리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우상에 드려진 제물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리 금으로 치장하고 특별하게 생긴 나무나 돌에 절한다고 해도, 천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절하고, 음식을 차려 놓는다 해도 우리는 별로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 음식에 어떤 영적인 능력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군목 시절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곳에 서부전선에서 가장 높은 산이 있습니다. ‘감악산’인데, 대전의 계룡산처럼 온갖 잡신과 우상숭배가 난무하는 곳입니다. 제가 군종 활동을 하던 그 지역에 진지 보수공사를 하고 막사를 다시 짓는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산을 드나들던 무속인들의 출입을 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군부대로 항의가 이어졌고, 막사를 짓기 위해 산 정상에 있는 옹달샘을 시멘트로 막아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무속인이 찾아와 소대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옹달샘은 이 산에 있는 신령의 숨구멍인데, 그것을 틀어막으면 사람이 앞으로 열 명이 죽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소대장과 부대원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밤에 근무를 서다 귀신을 보았다는 소문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날부터 사람이 죽기 시작합니다. 감악산 주변에서 교통사고가 나기도 하고. 그런데 그러한 인명사고는 늘 일어나던 일이었다는 것이죠.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늘 있는 일입니다. 아마도 10명이 죽을 때까지 그 부대원들은 다 공포에 떨 것입니다. 신앙이 깊었던 당시 사단장은 군목인 저에게 그 부대의 공사현장에 올라가서 가장 큰 성황당과 나무를 베어버리고 태워버리라고 했습니다. 제가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고 나무를 자르려는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괜히 손을 댔다가 어떤 재앙이 내릴지 모른다는 무서움에 아무도 나서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저 혼자 나무를 자르고 잘린 가지와 걸쳐놓은 성황당의 천 조각들을 태우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벌써 25년이 지났습니다. 아마 그 산 주위에 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저에게 그 부대원들이 참 우매하게 보였습니다. 서울대학을 나온 소대장이 헛것을 보고 다리를 다쳐 붕대를 감고 있었던 모습도 너무나 한심스럽게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으면 우상 숭배하는 것이 참 우스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에 절하고 공포에 떠는 것이 어떻게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기괴하게 생긴 자연의 형상물조차도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매한 지식 때문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이 그냥 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그 제물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 선택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2절의 말씀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자유함이 없는 사람에게는 죄의식이 들어갑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 올무가 됩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나오는 ‘양심’이란 말은 ‘아는 것’이라는 의미인데, 신약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양심은 우리 행동이 용인되거나 정죄를 받는 마음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양심은 우리가 아는 지식에 근거합니다. 중요한 것인 이 지식이 세상 것에 근거하는가, 아니면 영적인 것을 따르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영적 지식이 많아지면 훨씬 더 양심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 즉 영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 양심을 가지게 될까요? 대부분 사람은 자신들이 살던 세상의 습관과 관습의 틀로 인해 소위 양심의 가책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 가책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순간 죄책감으로 인해 죄인이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부분을 ‘약하고 더러워지느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약한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양심이 쉽게 더러워지고’(7절) ‘쉽게 상처받으며’(12절), ‘쉽게 실족합니다’(13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이 강한 성도들이 약한 성도들에게 양보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약한 성도들에게 해가 되거나 피해가 될 만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양보는 성숙한 사람, 더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물론 약한 자가 하는 것을 다 내버려 두어 제멋대로 하도록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한 것은 사실이나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덕을 세우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보면 철저하게 목회적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신학대학을 다니던 시절입니다. 하루도 데모가 끊이지 않던 시절, 신학대학을 포함한 모든 대학생은 나라를 염려하며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때지요. 그리고 눈앞에서 학우들이 매를 맞거나 잡혀가는 일을 보면서, 이념의 문제를 떠나 뭔가 잘못되어간다는 생각을 했죠. 저도 학교에 다니며 데모도 해보고 학내 문제로 한 주간 단식투쟁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소위 ‘운동권’과 멀어지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하는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단지 제 경험입니다)

술과 담배 그리고 조금은 상스러운 말들과 투쟁의 언어들이 민주화 운동을 대변하는 것처럼 여기며. 아직도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면 ‘깨어지지 않은’ 지성으로,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나라를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젊은이’로 매도하는 모습이 저에게는 참 힘들었습니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깨어있는 지성이 있듯이, 데모하지 않아도 학문을 가지고 이바지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말입니다.

메시지 성경을 보면 조금 더 쉽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 그런 교만한 지성보다는 겸손한 마음이 우리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됩니다. … 어떤 사람들은 우상이라는 것은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 하나님 한분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아주 정확하게 말합니다. … 엄밀하게 따지자면,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느 고기와 똑같습니다. … 그러나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 참된 앎은 그렇게 무신경한 것이 아닙니다. …

여러분 가운데는 평생 동안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어 왔고, 그 고기 속에 악한 것이 들어 있어서 여러분 안에서도 악한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조건 아래서 형성된 상상력과 양심이라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자신의 자유를 부주의하게 행사한 나머지, 아직 과거의 틀과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동료 신자들을 길에서 벗어나게 할까 봐 마음을 쓰십니다. 사도 바울이 염려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파하는 것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본문 11~13절을 보세요.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여러분의 동료에게 상처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거리낌 없이 행해지는 식사는, 이 약한 사람들을 희생시켜도 될 만큼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도 사도 바울의 목회적 관점이 와 닿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참 안타까운 것이 ‘상처’받는 교인들입니다. 설교할 때는 “상처를 준다고 다 받느냐? 받은 상처를 돌려주라!”고 말하지만 사실, 무의식중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는 이 부분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제가 경험했던 일입니다. 어떤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분당에서 만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조금은 당황스러운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식당주인이 목사님이라고 인사하는 상황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맥주와 와인을 주문하는 목사님 때문에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맥주와 와인이 사람의 신앙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당에서 목회하는 저에게 그리고 저를 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다닐 수 있는 식당에서 말입니다.

그분의 눈빛은 “뭐 이런 것이 문제가 된다고.”라고 말하고 있었죠. 그것을 먹고 안 먹고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그분의 태도의 문제가 아니었을까요?
첫 번째 배려가 부족한 부분은 같이 식사하는 상대방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과 전통에서 목사가 식사하며 술을 먹는 상황이 자연스럽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는 목사를 볼 수도 있는 교인들에 대한 배려의 부족이었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술을 먹는 목회자의 모습 때문에 설교가 은혜가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신념과 지식을 내세우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독선과 교만이 아닐까요?” 요즘처럼 지적 교만이 팽배한 때가 없는 듯합니다. 아니, 누구든지 자신의 지적 교만을 펼칠 수 있는 장이 있기 때문인 듯합니다. 바로 저도 그중의 한 사람이고, 또 제가 사용하는 SNS가 그 중요한 수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혹 자신의 ‘익숙함’을 지성이라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자신과 익숙하지 않은 것을 모두 ‘반지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이러한 반지성적 행동은 때로 자신의 ‘지성’을 자랑하려는 교만의 모습은 아닌지 역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성’보다 더 소중한 것은 ‘존중’과 겸손한 마음이 아닐까요?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할 때, “그 지적이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것인지 상대방을 위한 것인지”는 자신만 모를 뿐 모두에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조언하고 싶을 때, 내 생각과 다를 때는 조금 더 생각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식의 교만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말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 십자가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았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비판은커녕 실망할 자격도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어떤 지식과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인격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인격은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지식은 올무와 멍에일 뿐입니다. 또한, 믿음은 있으나 지식이 없으면 독선과 방종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게 하는가? 그런데 이 결단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참 어려운 문제인데, 최근에 교인 중에 이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장사하는데 주일에 문을 열어야 할까요? 닫아야 할까요?” “안식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쉬는 것일까요?” “‘일’이라고 하는 것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서 제가 주일에 설교하고 사역을 하는 것은 ‘일’일까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일까요?

주일에 우리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또 개인 사업을 하는 사람들이 문을 여는 것은 일이고, 크리스천 배우가 주일에 공연하는 것은 일이 아닐까요?
오늘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이 문제에 대해 적용해 볼까요? 어떤 사람은 주일에 일하든지 안 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는 일을 통해 충분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일에 돈을 쓰는 일이 하나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돈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을 쓰면서 마음이 개운치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문제는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느냐입니다. 주일에 일하느냐 안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의 신앙에 의하면 율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을 더한 지식이라는 말입니다. 안식일에 밀을 까불러 먹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보면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되묻습니다. “안식일이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이냐?”

어떤 사람에게는 안식일에 쉬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일 수 있습니다. 결국, 그 날을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가장 영광스럽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기준이 아닐까요? 기준이 무엇일까요? 당신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결단입니다.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으로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음이 인격적이라는 것은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믿는 것”보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분의 위엄 앞에서 인격적인가? 그리고 그분의 자녀들에게 인격적인가”를 묻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인격적’이라는 것은 상대방을 염려하고 배려하며 누군가에게 유익이 되는 일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 때, ‘자신의 자유’를 누구를 위해 쓸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믿음은 교만한 지성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교만이라는 것과 그 교만은 하나님께서 꺾으신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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