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5월30-6월3일, 빌리그레함목사 초청 여의도 광장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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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5월30-6월3일, 빌리그레함목사 초청 여의도 광장 집회
  • 박동현기자
  • 승인 2016.06.18 23: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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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목사는 개회사를 통해 “이 역사적인 한국 대회를 계기로 5천만 우리 겨레가 서로 사랑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통일된 나라를 건설하게 성령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자”
▲ 빌리그레함목사 통역 김장환목사

2016년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인 1973년 5월 나는 20대 중반의 청년이었고 연애 중이었다. 면목동에 거주하며 면목교회에 출석하며 여성 의상실을 경영 했었다 현재도 변함없이 있는 상가 빌딩에서 가장 연소자 사업주 였다. 가게문을 닫거나 여는 것은 내가 결정 할 수 있었다. 빌리그레함목사가 한국에 온다는 뉴스를 기독교방송(CBS)라디오를 통해 들으면서 참석을 계획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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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지하철이 없었으나 시내 버스는 있었다 몇 번을 환승하며 여의도 광장에 갔고 직접 빌리 그레함목사의 설교를 김장원목사 통역으로 들었다. 설교보다 통역이 더 잘한다고 평가 할 정도로 김장환목사의 통역은 빌리의 감정 까지 완벽하게 전달 해 주었었다.  

1970년 대는 한국의 교회가 급속히 성장한 시기였다. 아파트 상가에 교회가 복수로 입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교인이 늘어 나고 예배당이 필요 했었다. 이런 발전은 교파를 초월한 대형 집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었다. 1970년대 첫 대형 집회는 1973년 (5월30-6월3일) 미국의 저명한 부흥사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 초청 여의도 광장 부흥 성회였다. 이 대회는 특히 초교파적인 대 집회로서 여기에 동참한 교파만 해도 17개 교단이 넘었다.

▲ 1973년 여의도 광장 집회 당시 사진

대회가 여의도 광장에서 열리기 전에 각 지방에서 예비 대회가 열렸으며 지방 대회에 연인원 1백20만 여 명이 동원되었고, 결신자만도 1만6천7백3명이로 집계 되었다.

본 대회는 5월 30일 오후부터 6월3일까지 12만 평의 여의도 광장(현 공원포함)에서 51만6천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대회장 한경직 목사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6천여 명의 연합성가대가 ‘오직 소망은 그리스도'를 합창하면서 비롯된 대회에서 빌리 그래함목사는 “50여 개 국을 순방 집회했으나 한국의 집회는 2천 년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역사적인 전도의 첫 날이며 한국 어느 곳에서나 영적인 감동을 일으키고 있다”라고 역설했다. 설교를 마치고 결신자는 일어나라고 하자 2만여 명이 일어나 첫날부터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5천 만을 그리스도에게'라는 대회 표어 아래 첫날 집회에서 한경직 목사는 개회사를 통해 “이 역사적인 한국 대회를 계기로 5천만 우리 겨레가 서로 사랑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통일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성령의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자”고 힘 있게 외쳤다.

빌리 그래함 목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하고 성경을 선물하였으며, 정신적인 강대국을 영도하는 박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자고 제의하여 약 3분간 한국민과 박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였다. 이 대회를 통해 얻어진 결신자는 약 3만7천 명으로 집계되었다.

▲ 1973년 여의도광장 집회, 순복음교회당 건축모습이 보이고 현재의 빙딩숲은 빈자리였다. 

빌리 그레함 목사(1918년 11월 7일생) 는 미국의 침례교 목사이다.(통역김장원목사도 침례교단) 그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이후 미국 대통령들의 영적인 조언자였다. 그레함은 역사상 존재했던 개신교도 중에서 전 세계의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한 목회자였다. 그의 측근에 따르면, 1993년 한 해 동안 25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빌리 그레함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인 구세주로 받아들였다. 라디오 청취와 텔레비전 시청을 포함해서 빌리 그레함의 생애 동안 그의 설교를 들은 청중은 22억 명에 달한다.

Franklin Graham 의 아들로 태어났다. 7살이 되던 해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플로리다 성서신학교(Florida Bible Institute)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다. 휘튼대학교(Wheaton College)에 진학하였다. 1943년에 대학생시절 만난 루스 매큐벨(Ruth Mc Cue Bell)과 결혼했다. 그들은 Virginia (Gigi) Graham Foreman; Anne Graham Lotz; Ruth Dienert; Franklin Graham, and Ned Graham의 5명의 아이들을 가졌다. 빌리그레함 목사는 2016년 현재 생존해 있으며, 향연98세 이다. 

1950년대 복음주의 성격의 기독교잡지인 크리스처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를 창간. 1973년 서울 여의도집회를 주도하는 등 해외선교를 활발히 하였는데, 이외에도 1958년 서울운동장에서 이승만 대통령 등 당시 정부 요인이 참관한 가운데 집회를 개최하였으며 1984년 한국 선교 100주년 기념대회에서도 여의도를 방문하여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1992년과 1994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도 했다.

빌리 그레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성경은 하나님의 무오류한 말씀임을 주장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 복음주의자이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를 신복음주의운동을 통해 개혁하고자 하였으며, 로마 가톨릭교회 및 진보적 그리스도인들과도 기꺼이 대화를 하였다.(취재원 인터넷 검색으로 당시 자료 찾아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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