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 먹는 김영삼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93년 2월, 각료들과의 오찬에서 즐겨 먹던 칼국수를 먹는 모습. 연합뉴스 DB >> dohh@yna.co.kr
22일 서거한 김영삼(YS)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으로 국정을 이끌던 문민정부(1993∼1998년) 시대는 군부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고 문민화의 길을 정착시키기 위해 질풍노도처럼 개혁 정책이 단행되던 시기였습니다. YS 재임 시절 추진된 공직자 재산공개, 하나회 해체와 정치 군부 숙정, 역사 바로세우기 등 정치개혁과 1995년 지방자치제 확대 실시를 비롯 사회문화·제도 개혁, 금융실명제 등 경제개혁 조치와 남북관계 및 한일관계 등을 'YS시대'의 정책들로 9차례로 나눠 되돌아봤습니다.>
(서울=연합뉴스) 홍정규 기자 = 1993년 2월27일 청와대. 취임 사흘째를 맞은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엄숙한 표정으로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입을 뗐다.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일가 재산을 공개했다. 17억7천822만6천70원이었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후 대통령으로서 내딛은 첫발은 자신의 재산을 숨김없이 공개한 것이었다. 청와대 주 메뉴로 칼국수가 나오고, 국무회의나 각종 회담 자리에서도 칼국수가 베풀어진 '칼국수 정치'는 개혁의 상징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강력한 사정(司正) 드라이브를 걸었다.
'성역없는 사정'과 '중단없는 개혁'을 천명한 김 전 대통령은 당시 한국 사회가 "썩어도 너무 썩었다"는 판단 아래 '신(新) 한국 건설'을 기치로 내걸면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절부터 취임 즉시 '사정 한파'가 몰아칠 것을 예고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공직자 재산공개로, 현재까지 입법·사법·행정부 고위공직자들의 재산변동 내역이 매년 공개되는 시발점이 됐다.
첫 재산공개는 김 전 대통령이 자신의 재산을 공개하면서 법적 근거 없이 이뤄졌다. 그러자 대통령의 '솔선수범'에 밀려 국회의원, 고위공무원, 군 장성, 판·검사 등이 재산을 공개했다. 그 후폭풍은 만만치 않았다. 전·현직 국회의장이 부정축재 의혹이 드러나 정계를 떠나거나 물러났고, 일부 장·차관이 해임되는가 하면, 정치인과 고위 관료들의 부동산 투기 정황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과정에서 김 대통령이 임명한 초대 내각 각료들이 재산공개의 유탄을 맞아 낙마하기도 했다. 이들은 김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계속된 '개발독재' 시대에서 여당 고위직이나 경제부처 또는 국토개발 담당 부처에 몸 담으면서 각종 정보를 사재 축적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비판을 한몸에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토지와 건물 등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이 고통이 되도록 하겠다"고까지 했다.
한달여에 걸친 고위 공직자들의 '고해성사'에 이어 공직자윤리법이 개정됐다. 이에 따라 재산을 공개하고, 이를 거부하거나 허위 등록할 경우 처벌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은 공직자 재산공개를 시작으로 감사원을 동원해 청와대,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검찰 등 사정기관에 대한 사정을 벌인 데 이어 이들 사정기관을 동원해 사회 지도층 비리를 포함한 사회 각 분야에 대한 '총체적 사정'에 나섰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환부 하나를 찾아내 도려내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한다. 32년 권위주의 시대가 만든 '한국병'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실감한다"고 일갈했다.
정치권, 관료, 금융권, 군, 사이비 언론 등을 망라해 재산 해외도피, 불법 호화생활 등을 저인망 식으로 훑어 각종 부조리를 뿌리 뽑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정 태풍'은 이에 대한 저항과 피로감을 불러 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 전 대통령은 "너무 급히 달려도 위험하지만 달리다가 멈추면 쓰러진다"고 말한 것처럼 사정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역풍도 맞았다. 정권 말기에 가선 정작 자신의 차남인 현철씨가 알선수재·조세포탈 혐의로 구속수감되는 등 김 전 대통령이 사정의 기치로 내건 '윗물 맑기 운동'의 취지가 무색해지기도 했다. 또 자신의 최측근이자 '개혁 실세'로 불렸던 최형우 당시 민자당 사무총장이 아들의 대입 부정으로 물러나면서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비아냥을 받았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최 사무총장이 물러나자 "우째 이런 일이…"라고 안타까움을 표시, 한동안 장안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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