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들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대망(大望)을 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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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대망(大望)을 품어라.’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0.04.26 0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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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소년들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대망(大望, 큰 뜻)을 품으라. 돈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사리사욕의 확장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명성(名聲)이라는 허망한 꿈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떠한 유능한 인간으로서 살 것인가 하는 대망을 품으라.”
윌리엄 클라크 박사(Dr. William Smith Clark, 1825~1886) 동상

[1] ‘Boys, be ambitious!’(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영어 문구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누가 한 말일까? 클라크 박사라고 기억 할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맞다. 이 문구에 얽힌 일화는 다음과 같다. 1876년, 일본 정부가 농업학교를 만들어 달라고 미국 메사추세츠 농과대학장이었던 윌리엄 클라크 박사(Dr. William Smith Clark, 1825~1886)를 초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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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금의 북해도 대학교의 전신인 북해도 농학교의 교두(敎頭, 현 총장)로 특별 초청한 것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그는 1876년 8월, 성경을 마흔 권이나 가지고 왔는데, 세관에서 안 된다고 입국을 막아섰다.

클라크 박사는, “그렇다면 나는 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며 강경한 태도로 돌아가려 했다. 당황한 세관원이 상부에 보고하자, 특별 초청한 VIP니 무조건 통관시키라는 특별 지시가 왔다.

[3] 성경을 가지고 북해도 농학교에 부임한 클라크 박사는 일본에서 식물학뿐만 아니라 자연 과학 일반을 영어로 가르쳤다. 또한 성경을 배부하고 기독교에 대해 가르쳤다. 이후 학생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의 맹세’에 차례차례로 서명하고 기독교 신앙에 들어갈 결심을 했다.

그렇게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청년들에게 깊은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애정으로 지도하다가, 1877년 5월, 9개월 만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클라크 박사가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 고별인사로 남긴 마지막 말이 있었다.

[4] 그게 바로 오늘의 명언과 관련된 문구이다. 사실 ‘Boys, be ambitious!’(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란 문장은 성경적으로 볼 때 세속적인 냄새가 풍겨나는 내용이다. ‘야망’이나 ‘야심’ 등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물질주의나 번영주의와 맞아떨어지는 용어들 아니던가! 그래서 이 말이 교회 안에서 회자되기보다는 영어 교과서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독실한 크리스찬인 클라크 박사가 어찌 이런 비성경적인 용어를 사용했을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5] 놀랍게도, 이 말은 클라크 박사가 일본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남긴 바로 그 명언이 아니었다는 점에 충격을 받는다. 클라크 박사가 남기고 간 문장은 다음과 같다. ‘Boys, be Ambitious for Christ!’
‘소년들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대망(大望)을 품어라.’

그런데 일본의 모든 글들에는 ‘for Christ’라는 문구가 빠졌다. 신도(神道)가 국교나 다름없는 나라이니, 이를 빼어버리고 ‘be ambitious’란 말을 반복하여 대체해버린 것이다.

[6] 아래 그림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문장을 보면, ‘for Christ’ 라는 문구가 있어야만 말이 된다.
그가 말한 원래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Boys, be ambitious (for Christ). Be ambitious Not for money or for selfish aggrandizement, Not for that evanescent thing which men call fame. Be ambitious for Christ that attainment of all that a man ought to be.”

[7]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소년들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대망(大望, 큰 뜻)을 품으라. 돈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사리사욕의 확장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명성(名聲)이라는 허망한 꿈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떠한 유능한 인간으로서 살 것인가 하는 대망을 품으라.”

[8] ‘Boys, be Ambitious for Christ!’ ‘소년들아, 그리스도를 위하여 대망(大望)을 품어라.’‘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말이다. 이 대목에서 창세기 13장의 상황이 떠오르는 건 어쩐 일일까? 적용에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본문은 아브라함과 롯의 대조적인 선택에 대해서 소개하는 내용이다.

[9] 두 사람의 짐승들을 먹이기에 너무 좁은 공간에 동거했기 때문에 결국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헤어지기로 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선택의 우선권을 가질 수 있는 연장자였지만 조카에게 그 권한을 양보한다. 그러자 롯은 두 말 없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해서 동쪽으로 떠나면서 비로소 두 사람은 이별을 한다. 진작 헤어졌어야 했을 것을... 

롯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선택(의 양보)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10] 롯은 마침내 소돔성에까지 접근해서 거기서 정착하여 살다가 소돔성이 불바다가 될 때 두 딸과 함께 가까스로 도망쳐 나오는 신세가 되고 만다. 롯이 자기가 선택한 곳으로 떠나자마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게 하신 뒤 그 모든 지역을 선물로 약속하셨다.

순간의 선택이 어찌 보면 영원을 좌우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차이를 가져온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11절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1] 원어에 맞게 새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롯이 ‘자기를 위하여’(ל֣וֹ, for himself, YLT)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롯은 ‘자기를 위하여’ 선택을 하고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럼 아브라함은 어땠을까? 18절은 이렇게 말한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לַֽיהוָֽה, for Yahweh)) 제단을 쌓았더라.” 롯과 달리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위하여’ 예배를 드리고 산 사람이었다.

[12] 윌리엄 클라크처럼 아브라함처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멋지게 잘 살아보자. 

신성욱 교수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이다.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공부했음

University of Pretoria에서 공부했음

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음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언어학 전공, 계명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과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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