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사회와의 선교적 대면. 신국원(총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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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 사회와의 선교적 대면. 신국원(총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0.07.16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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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가 팽창하는 이면에 세계를 단일시장으로 만드려는 자본주의가 새로운 글로벌 이데올로기로 부상한 것은 역설적이다. 맥루한(Marshal McLuhan)의 주장처럼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된 “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는 근대성의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 이미지 출처 : 구글

지난 세기 후반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글로벌 다원주의(多元主義) 문화는 전세계의 사회적 환경을 크게 바꾸어 놓고 있다. 그 변화는 인류가 지금껏 경험한 어떤 것보다 넓고 깊을 뿐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기에 성격을 규정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글로벌 다원주의 상황은 기독교 입장에선 생소한 도전은 아닐 수 있다.(다원주의 : 개인이나 여러 집단이 기본으로 삼는 원칙이나 목적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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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이래 수많은 문화들과 시대정신 속에서 복음을 전하며 비슷한 상황을 무수히 겪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세계관이 충돌하며 각축을 벌이는 지금이야 말로 그 경험을 통해 축적된 지혜가 빛을 발할 때이다.

이 글의 목적은 우리시대의 다원주의를 대처함에 그 지혜를 새롭게 되살려 내는 것이 관건이라 보고 근래에 부상한 “선교적 교회론”이 이에 기여할 수 있음을 밝히는데 있다.

(1) 글로벌 다원주의 문화와 기독교

지난 세기 후반에 본격화된 글로벌 다원주의 문화 밑에는 오랜 역사적 상황이 깔려있다. 물론 직접적 원인은 근대 계몽주의의 실패다. 16세기 종교개혁 후 유럽에선 신구교파들이 백년 넘게 무력으로 충돌하는 전례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계몽사상은 중립적이라 믿었던 이성을 삶의 공통적 토대로 삼아 평화를 담보하려던 야심찬 기획이었다. 하지만 이성 역시 신앙 못지 않게 독단적일 뿐 아니라 모든 특수성과 다양성에 대해 억압적인 것으로 드러나면서 다원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 세력을 확장하는 빌미가 되었다.

교통통신의 급속한 발전으로 지리적 경계가 무너지면서 한 사회 안에 여러 문화와 관습이 뒤섞이는 일은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른바 문화혼종현상은 선진국의 대도시뿐 아니라 오지의 원시부족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로 인해 세계 어디서나 전통적 사회문화의 구심력이 약화되면서 다원주의가 선택이 아니라 강요되는 분위기이다.

이처럼 다원주의가 팽창하는 이면에 세계를 단일시장으로 만드려는 자본주의가 새로운 글로벌 이데올로기로 부상한 것은 역설적이다. 맥루한(Marshal McLuhan)의 주장처럼 지구가 하나의 마을이 된 “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는 근대성의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벌(Hedly Bull)이 말하는 “신중세”(New Medievalism)일수도 있다.

이 세계화의 근본동인은 경제이다. 정치적이기보다 경제적 문화적 요소가 강하다. 다양성이 본질이며 생명인 문화마저 획일화되는 중이다. 예를 들어 지역 문화 중 돈이 될만 한 것은 가차 없이 글로벌 문화상품으로 바뀌고 있다. 다양성이 본질이며 생명인 문화마저 획일화되는 중이다. 포스트모던은 이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볼 수 있다.

세계는 지금 자본주의 경제와 대중문화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압박과 이에 맞서 정체성을 지키려는 다양한 집단들의 저항 사이에서 몸살을 앓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미디어가 이끄는 보편주의 문화가 전통적이고 특수한 모든 것에 위협이 되므로 전통 문화와 종교는 지역주의와 파편화로 저항한다. (Thomas Friedman) 특히  9.11 사태 이후 현실화되고 있는 바 헌팅톤과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는 “문화충돌”이나 헌터(David Hunter)나 크래프트(Peter Kraft)가 말하는 “문화 전쟁”이 그것이다.

한편 기독교 공동체는 지난 2천년 간 전세계 다양한 문화 속에 복음 증거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왔다. 교회의 출발점에 일어난 오순절 사건은 선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주었다. 방언은 모든 언어를 하나의 통일된 언어로 바꾸는 기적이 아니었다.

십자가 구원의 진리가 다양한 언어와 문화 적응을 통해 만방에 소통될 일에 대한 예고였다. 초대교회가 유대의 벽을 넘어 이방 그리스-로마 문화를 거쳐 열방으로 나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현재 기독교는 “2천개가 넘는 다양한 언어집단”의 신앙이다. 기독교가 품은 역사적, 문화적 다양성은 실로 엄청나다. 기독교 신앙이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 다양한 언어와 문화의 옷을 입을 수 있음은 역사적으로 실증되었다. 한국교회도 백여년의 짧은 역사 속에 세계교회가 거친 과정을 압축적으로 통과하며 다양한 문화적응을 겪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와 공산주의 핍박, 초대 정부의 정치적 후원, 특히 경제부흥에 힘입은 선교열풍은 식민지 개척과 행보를 같이 했던 서구의 선교와 닮았다. 지금은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소통단절, 보수성, 독단과 획일성, 도덕적 실패가 복음전파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뼈아프게 경험하는 중이다.

이 경험은 교회가 특정 이념이나 정치경제 프로젝트에 편승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가르쳐주었다. 반면에 다양한 공동체가 공적광장에서 목소리를 낼 기회가 많아진 지금 고립의 위험이 무엇인지도 알게한다. 결국 현 상황 속에서 관건은 다원주의 시대정신에 함몰되지 않으면서도 확신을 독단적이지 않은 태도로 설득력있게 공적 영역에 제시할 능력이 있느냐이다.

(2) 다원주의 담론의 한계

다원주의 사회에선 특정 이해집단의 권익을 도모하는 “정체성 정치”가 난무한다. 인권이 사람이면 누구나 누려햐 할 보편적 권리가 아니라 여성, 흑인, 동성애자 같은 특수 이해집단의 정치적 권익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야기되는 혼란과 갈등을 극복하려는 것이 오늘날 사회연구의 핵심과제이다. 거기에는 이성적 통일성의 회복을 꾀하는 신계몽주의로부터 오히려 그 분산과 긴장을 고취하려는 포스트모니즘에 이르는 다양한 제안들이 망라되어 있다.

물론 핵심 관심사는 차이를 넘어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특히 공적영역만큼은 중립지대로 만들어 구성원 모두에게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방안을 제시하려 애쓴다. 주류 담론들에는 대체로 진리는 고정불변의 실재가 아니고 삶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실용주의가 깔려있다.

종교뿐 아니라 철학도 개별 신앙이나 이론을 객관적 진리인냥 설파하거나 입증하려는 노력 대신에 공동체가 함께 살아갈 방안 모색에 협력해야만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자연히 독단의 근원으로 지목되는 모든 종교나 형이상학이 공적담론에서 배제돼야 할 것이라는데 일치한다.

예를 들어 존 롤즈의 정의론은 “선에 대한 옅은” 의식의 증진을 통해 민주사회의 존속을 담보하려는 기획이다. 시민사회가 “가능한 적은 수의 원칙들에 대한 합의”와 ”옅은 도덕”(thin morality)에 서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로버트 우스노우도 같은 생각이다. 종교는 물론이고 특정 형이상학과 윤리에 기초한 깊고 “두터운” 이론은 이제 환영받지 못한다.

마이클 노박은 한 사회의 중심인 성소는 비워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그곳이 경외심을 품은 자유로운 양심을 통해 접근해야 할 초월의 장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공적 광장은 벌거벗은 공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리차드 노이하우스는 이를 보다 세속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비록 모든 가치를 똑같이 옳다 보거나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차이들에 대해 관대한 “순한 상대주의”(mild relativism)가 다원주의적 민주사회의 바람직한 기초라는데 동의한다. 미디어는 정세도가 높은 “뜨거운 의사소통”이 아니라 찬 것이어야 한다는 마샬 맥루한의 주장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공적광장이 이들의 주장처럼 결코 빈 공간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데 있다. 빈 공공의 성소는 “채워지기를 간청”하는 불안정한 과도기일 뿐이다. 그 진공은 흔히 공적 삶에 대한 통제권을 보유하고 있는 주체인 국가나 기업과 미디어에 의해 채워지기 일쑤다. 이럴 경우 벌거벗은 광장은 이들의 독무대가 되고 만다. 다원주의가 자칫 “새로운 전체주의의 전주곡”이 될 수 있다는 우려는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제로 “배타주의적 종교의 악령”을 내쫓아 깨끗이 청소된 광장은 처음보다 더한 일곱 귀신을 불러들인다. 롤즈의 정의론은 무지의 베일에 쌓인 익명의 무인종, 탈-역사, 탈-성별화된 추상적 존재를 이상적 시민으로 그려내는 환타지이다.

현실의 공적 광장은 결코 비어 있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그곳은 언제부터인가 인종, 계급, 성적 취향의 권익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개인과 집단들의 문화전쟁터가 되고 말았다.

다수결을 토대로 하는 민주사회가 흔히 소수에 대해 관용적이지 않기에 다원주의는 매력적으로 비친다. 하지만 상대주의적 다원주의 이념 아래 다양한 집단의 공존은 다원주의를 위한 다원주의요, “모자이크의 광기” 또는 “비전 없는 공존”일 뿐이라는 비판의 소리가 높다. “다양성의 과도한 배양은 심한 불관용”으로 떨어지곤 한다. 

실제로 “다양성의 과도한 배양은 심한 불관용”으로 떨어지곤 한다. 다원주의가 “관용과 지적 겸손”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주 드러난다. 다원주의도 사실은 하나의 독단적 도그마다. 이점은 유독 기독교에 대해 배타적인 세속화 사회의 태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관용이 기독교에 대한 불관용을 정당화하는데 쓰이는 아이러니도 마찬가지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런 상황에 맞서 앞에서 언급한 학자들과 견해를 달리 오히려 정세도가 높은 “뜨거운 의사소통”을 통해 복음을 천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교회내에 침투한 다원주의와 치유방안

다원주의는 교회에도 침투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첫째, 다원주의는 전통적 선교를 원칙상 불가능하게 만들거나 극도로 약화시킨다. 기독교 진리에 반하는 사상이나 삶의 방식에 대해 지나치게 관용적 태도를 취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종교가 같은 신과 구원에 이르는 다른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다원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다른 종교들에도 진리가 있지만 기독교가 가장 완전하다고 하는 포괄주의도 복음의 유일성과 선교 열정을 침식하기는 마찬가지다.

교회에 들어온 다원주의는 여러 형태와 수준으로 나타났다.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작은 진리들을 나누어 가지고 있으므로 독단을 버리고 타종교의 진리를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 하나이다. 타 종교에도 진리가 있지만 기독교가 가장 완전하다고 하는 포괄주의도 있다.

비교적 근래에는 이제껏 타종교를 개종의 대상으로 여겼다면 이제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므로 상호이해와 공존을 위한 “세계종교간의 대화의 필요성” 주장이 대세이다. 지구촌의 사회문화환경에서는 종교간의 이해와 평화공존이 필수적 덕목이 되었을 뿐 아니라 상호 이해를 통해서 서로를 더 잘알게 되고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주장이다. 보다 대중적 차원에서는 교회를 소비자적 자세로 고르는 태도도 다원주의의 영향의 일면이다.

둘째, 다원주의만 아니라 모든 다양성 자체가 문제인냥 무조건 배격하는 태도는 또 다른 패착을 가져온다.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몰이해나 배타적 태도는 소통을 방해해 결국 선교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초래하게 만든다. 이런 모습은 자주 세상 여론으로 하여금 종교가 원인이된 분쟁들을 나열하며 왜 종교간 관용이 필수적인 덕목인지를 강변하며 압박할 빌미를 제공한다.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이런 상황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지만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할 때가 많다. 보다 일반적으로는 기회주의적으로 일관성 없이 행동함으로 스스로 신앙적 정체성을 훼손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예 사적으로는 신앙 진리를 계시로 믿고, 공적으로는 심미적 의견이나 잠정적 이론인듯 행동하라는 소심한 권고가 압박에서 벗어날 지혜인냥 제시되기도 한다. 이 모두가 다원주의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대비가 부족한데서 비롯되는 일이다.

다원주의 문화의 압박은 흔히 기독교인들을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로 갈라 놓는다. 전자는 신앙을 순수하게 지키려는 열정이 있고 후자는 관용과 문화적응에 강한 나름의 장점이 있다. 문제는 서로 약점만을 부각시켜 다투기 시작할 때다.

이런 적전분열의 우매은 다원주의를 대처는 고사하고 세상의 비난과 조롱을 초래할 뿐이다. 다원주의에 대한 바른 대처는 관용이 다원주의 이념에 함몰되거나 정통이 “오만과 반계몽주의”로 전락하지 않는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데 있다. 보수적 교만이 정통의 위험이라면 진보의 함정은 무모한 방만함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뿌리인 칼빈주의 전통은 비교적 그 균형감각을 갖추고 있는 역사적 실례이다. 이 전통은 일반은총론이나 영역주권사상 같은 다원주의를 대처하는데 유용한 자원들을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 당시부터 다른 개신교파에 비해 여러 나라에 분포한 탓에 다문화적 적응의 경험이 풍부한 것도 유리한 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전통은 역사를 어거스틴을 따라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하지만 문화적 다양성을 세계관의 대립과 확실히 구분하여 창조에 내재된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모든 환원주의나 전체주의를 거부한다.

동시에 상대주의나 무정부주의를 반대하고 창조질서에 기초한 사회문화적 비전을 제시한다. 나아가 사회와 문화의 분화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삶의 영역과 조직체의 다원성을 옹호했다. 이는 공과 사의 분리 같은 이원론을 야기하지 않으면서도 가정, 학교, 예술, 경제 등 삶의 다양한 영역들 사이의 분립과 주권을 보장하는 통찰이다.

이 사회문화적 비전은 근대 이성주의적 토대주의의 문제점을 꿰뚫어 비판함에 있어 포스트모더니즘보다 선구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삶의 비전 즉 세계관의 다양성이 종교적 뿌리에서 비롯됨을 밝힌 것은 더 중요한 기여다.

삶의 다양한 영역들이 고유한 본질과 독립된 주권을 가질 뿐 아니라 종교적 비전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통찰은 거기서 나온다. 나아가 이에 따라 학문이 이성적 탐구라는 공통적 본질에도 불구하고 왜 유물론과 유신론적 방향으로 분열을 일으키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근래에 들어와 개혁주의 세계관 진영에서는 다원주의 문화에 대처하려는 노력이 활발하다. 자연히 이 문제를 씨름하는데 도움을 줄 통찰도 많이 개발되었다. 우선 창조질서의 객관적 존재에 대한 확신에 근거하여 다원주의 문제를 다룰 독특한 이론적-실천적 토대가 상당부분 구축되었다. 예를 들어 삶의 구조적 다양성 분석이나 비토대주의적 인식론은 삶의 다원적 성격을 바로 이해할 이론적 토대이다.

그것은 다원주의 사회 내에서 우리들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밝혀내고 나아가 이를 구현하기 위한 실천적 방안을 논의할 기초가 된다. 물론 일반은총론 같은 고전적 교리도 다른 세계관과 이념을 가진 이들과의 건설적 대화를 위해 필요한 열린 태도를 갖출 신학적-철학적 기반이 된다.

(4) 선교적 대면의 교훈

개혁주의 사회문화적 비전은 선교적 관점으로 강화될 때 다원주의 사회에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다. 선교적 관점이란 창조로부터 완성에 이르는 하나님의 역사를 종말론적 시야에서 바라보는 보편사적 시각이다. 거기엔 우리가 아직 종료되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의 비전을 따라 나가고 있다는 역사의식이 함축되어 있다.

이는 기독교인들도 지금은 다른 세계관들과의 경쟁속에 종말을 향해 나아갈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의 발로이기도 하다. 이 관점은 자신의 삶에 있어 확실성이란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런 한계 인식은 독단을 방지하고 다른 종교와 세계관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림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개혁주의 전통은 시민적 교양의 폭을 보다 넓힐 필요가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이 점에서 역시 선교적 관점은 도움이 된다. 선교적 정체성의 회복을 회복한다 해도 기독교가 더 이상 서구사회에서조차 주도적인 위치에 있지 않기 상황은 여전히 어렵다.

오늘의 사회를 지배하는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복음에 신실한 선교적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특히 공적인 장에 나가면 압박과 고난은 더욱 커진다. 하지만 신앙을 개인적인 일로 만드는 것은 복음의 우주적 범위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것이 바로 서구교회가 지난 수세기 동안 범한 실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남기신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는 공적이며 우주적(communal and cosmic)인 삶 속에서의 증인의 소명을 회복해야 한다.

이 관점에는 또한 우리는 증인일 뿐 판관이 아니라는 인식이 들어있다. 복음과 역사에 대한 이해와 증언도 개인적이며 실존적인 한계가 있음도 인정한다. 증인의 의무는 주어진 상황속에서 받은 메시지를 이해하여 신실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초대교회는 복음의 보편성을 확고히 주장하지만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통해서 강요하려 하지 않았던 사실을 중시한다. 사실 그럴 상황도 아니고 힘도 없었다. 성육신의 정신을 따라 낮은 섬김의 자세를 견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제국을 정복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선교적 관점은 오늘날 우리는 초대교회가 보여준 이 분명한 모범을 망각한 것이 아닌지 돌아보게 만든다. 반-기독교적 정서가 높아져가는 현실 앞에 승리주의 환상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닐까 반성케 한다. 왜 패배주의로 위축될 필요가 없음도 알게 한다.

다원주의의 도전 앞에 방어적인 태도로 뒷걸음쳐서는 안될 이유도 가르쳐준다. 왜 사회문화적 책임을 버리고 개인적 영성에 몰입하는 퇴행을 택하는 일은 하면 안되는지도 알려준다. 교회는 지난 이천년간 다원주의 상황에 주저 없이 들어가 정면돌파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소수지만 탁월한 통찰과 자신감을 갖췄던  대안 공동체의 선교적 비전이 오늘의 상황 속에서도 회복해야 한다.

한국의 문화적 토양은 샤머니즘에서 진보까지 수천년간 누적된 종교다원주의 역사이다. 이제는 글로벌 다민족 다문화 다인종 사회로 나가는 중이다. 서구교회가 스스로를 “사회적 소수”로 의식한다면 한국교회는 더욱 그렇다. 오랜 기독교전통의 유산은 고사하고 이성주의 전통도 없는 상태에서 민주화 이래 사회문화적 헤게모니는 진보쪽에 쏠려있다. 다양한 문화와 상황 속에 축적된 역사적 기독교의 자산과 지혜를 배워야 할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다양한 세계관이 난무하는 상황일수록 기독교 학문의 사명이 중요하다. 기독교 학문은 신학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구원의 진리가 세상문화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기 위해서는 복음진리에 입각한 “적절한 자신감”과 다원주의 사회에 걸맞는 “탁월한 예절”과 더불어 “지적 세련됨”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오늘날 다원주의 분위기로 인해 신앙과 학문의 대립이 크게 완화되었고 기독교 학문의 위상도 높아졌다. 이런 의미에서 다원주의는 위기이자 기회이다.

요란한 정체성 정치의 문화전쟁이 벌어지는 포스트모던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다른 세계관을 지닌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선한 영향을 미치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지금이야 말로 기독 지성인들이 전시대 개혁주의자들이 보여준 “지적 상상력과 영적 용기”를 계승해야 한다. 그들이 보여준 특별한 관용, 겸손, 개방성 같은 사회적 덕목과 시민적 교양도 더욱 두텁게 갖추어야 한다. 이 지적 도덕적 덕목이 우리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샬롬의 문화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CMR

신국원 교수는 총신대학교 신학과 명예교수와 한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 대학교의 초빙교수, 삼일교회 협동목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포스트모더니즘》, 《니고데모의 안경》, 《지금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꿈꾸고 있는가》(공저) 등이 있다.

출처 : 기독경영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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