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2천년사 다큐> 1-2 (역사에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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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2천년사 다큐> 1-2 (역사에서 배우다)
  • 박동현기자
  • 승인 2016.03.21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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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232년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이단자 색출명령을 국가에 일임한다는 칙령을 반포하고 색출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화형에 처했다
▲ 종교재판

13기 중반, 로마교회는 서 유럽이 야만인들로부터 해방을 적극 도왔다 기독교는 전례 없는 눈부신 성장을 했다 그러나 교회가 종교 재판을 시작과면서 성장의 뒤안길에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 했다 종교재판은 도를 넘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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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법정, 스페인 이단법정에서 화형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이단자들. 지옥불이 삼키는 그림이 있는 고깔모자와 죄수 이름이 적힌 삼베가운을 걸치고 있다

사회질서 유지위한 시대적 산물, 2000년 3월 1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구성원들의 지나간 역사적 과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하는 화해의 예식을 거행했다. 교황은 이러한 과오 반성을 위해 97년부터 대희년 준비위원회 안에 역사신학위원회를 두고 소위 종교재판 등의 문제와 관련해 연구하도록 했고 97년 10월에는 종교재판과 관련한 국제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종교재판이라는 말은 라틴어 인퀴지시오(Inquisitio)의 오역이다. 인퀴지시오는 찾다, 조사하다, 물어보다 라는 뜻을 지닌 인퀴레레(inquirere)라는 동사의 명사형으로 조사, 탐문, 심문을 뜻한다. 따라서 이단에 대한 조사가 원래 목적인 「이단심문」이 제대로 된 말이지만 세속권력과의 관계 등 다양한 상황 속에서 파생된 여러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한자권 안에서 종교재판으로 오용된 것이다.

시대적 배경과 원인, 중세 교회는 클뤼니 개혁과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 등으로 교황의 권위와 세력이 계속 성장해 마침내 세속 왕권에 우위적이며 지배적인 세력이 됐다. 가톨릭교회는 유럽사회의 보편적 질서의 원리가 된 것이다. 이는 당시 교회 내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그리스도교 진리를 벗어난 다른 진리란 용납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회 안정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교회의 통일을 해치는 것은 곧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공공의 적」이었다. 따라서 교회의 적은 국가의 적이었다는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연유로 이단색출에는 교회가 이단자에 대한 박해를 금지시킬 정도로 국가가 더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교회 권력이 정점에 이르기 시작하면서 심한 동요와 혼란이 일어난다. 교회의 부와 권위적 자세, 성직 수도자들의 타락, 십자군 전쟁, 자의식이 강한 시민계급의 성장, 새로운 사상의 대두 등은 기존 제도교회에 대한 반감과 함께 새로운 신심운동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청빈운동 사상은 클뤼니와 그레고리오의 개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도적 청빈사상을 강조하고 직접 성서를 읽으며 실천하려는 신심운동이었다.

그러나 성서를 읽고 해석하려는 열의는 대단했지만 체계적으로 갖추어진 교육제도와 지도자 없는 잘못된 탐구로 이단적이고 반교회적으로 빠질 위험이 농후했다. 이런 부작용 때문에 제3차 라테란 공의회는 개인의 성서 소유와 번역을 금지하기도 했다.

새로운 신심운동이 이교적으로 흐르면서 오랫동안 이어져온 미신적 종교들과 민간신앙 요소가 얽히면서 반교회적 사상이 빈번히 속출했다. 11세기부터 발생된 이러한 이단들은 점차 자신들의 세력 확장에 걸림돌이 되는 교회에 대해 반대 입장을 보이면서 거칠어지고 반성직, 반제도적으로 세력화하면서 정치적 투쟁을 일삼아 사회적 혼란을 조성했다.

이는 기존의 그리스도교 위에 성립된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교회와 국가의 불안요인이 됐다.

교회는 진리와 정통성의 수호를 위해, 국가는 사회질서 안정을 위해 이들을 색출하고 처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범죄자 처벌법은 「고소에 의한 처벌제도」로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만 할 수 있었으므로 이단 색출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더 컸다.

심문제도에 의한 이단색출은 12~13세기에 로마법을 연구한 결과였다. 로마의 기본적인 재판제도는 고소에 의한 재판이었으나 황제를 시해하려는 경우는 중대한 범죄로 간주해 심문에 의한 재판절차를 사용했다. 이는 고소가 없어도 사법관들이 범죄자를 찾아내고 처벌할 수 있는 정보를 수집해 혐의자를 심문하는 제도였다.

국가와 교회는 황제에 대한 시해가 중대한 범죄이듯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하느님에 대한 범죄인 이단도 반역죄로 간주한 것이다. 이단 심문제도는 유죄 입증에 필요한 증거를 얻기 위한 제도였지만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한 심문관이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판결을 내리기 쉬웠다.

증인이 없을 경우 자백 외에는 더욱 입증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단을 조사하되 박해를 반대하던 교회는 1254년 인노첸시오 4세 때에 이르러 비극적인 고문이 도입됐는데 고문 사용은 처음에는 엄격했으나 이단색출에 대한 강박관념 등으로 갈수록 무자비해졌으며 이윽고 이단탄압의 결정판이랄 수 있는 마녀사냥이라는 씻을 수 없는 과오을 불러왔다.

처벌과 성립과정, 이단심문 법정은 처음부터 가혹한 처벌이나 체형은 인정하지 않았고 보통 파문과 수도원 감금 등 정신적 형벌이 주를 이루었으나 이단 운동이 만연되자 점차 강화돼 투옥, 재산몰수, 화인(火印), 국외추방에 이어 사형까지 시행됐다. 사형이 본격화된 것은 12세기 들면서 카타리파의 강력한 대두 때문이었다. 이는 교회통일을 저해하는 수준을 넘어 유럽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을 뒤흔드는 무정부주의적 반란의 위험요소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단심문 제도는 이단근절을 위한 노력의 여러 단계를 거쳐 성립돼 왔는데 1183년 루치오 3세 교황과 적발왕 프리드리히 황제는 이단자에 관한 협약을 맺어 이단자들과 보호자는 파문직후 국외추방을 선고해야하고 세속 당국은 주교들의 지시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어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은 교회소송법에 이단심문 절차를 만들어 당국은 직무상 이단자들이 고소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찾아야한다고 했다.

이때까지도 사형은 언급되지 않았다. 프레드리히 2세는 1220년 황제대관식에 즈음해 이단억압을 위해 세속군대를 사용했고 1224년 그레고리오 9세와 공동으로 이단에 관한 법령을 반포했는데, 여기서 세속당국은 주교가 인도한 이단자들을 감금하고 이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사형에 처함으로써 처음으로 사형이 명문화됐다.

어 1232년 프리드리히 2세 황제는 이단자 색출명령을 국가에 일임한다는 칙령을 반포하고 색출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화형에 처했다. 프레드리히는 이단색출을 명목으로 정적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교황을 견제하면서 유럽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프레드리히의 이러한 정치적 야심과 무자비한 이단자 박해를 파악한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1233년 이단색출과 심문을 교황청이 맡을 것을 주장하면서 이단심문관 임무를 주로 도미니코 수도회에 일임하면서 소위 종교재판소라 불리는 「이단심문을 위한 특별 상설 법정」을 설치했다. 이 이단 법정은 1542년 바오로 3세에 의해 이단 심문 최고기구인 「이단심문성성」으로 이어졌고 1588년 교리성성으로 바뀌어졌다가 현재는 신앙교리성으로 변모했다.

이처럼 이단심문제도는 그 시대의 역사적 정황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역사 진행 과정 안에서 집행의 지나침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상처받고 특히 고문 도입이후로 잔인함과 비인간적 행위로 인한 교회역사의 어두운 한 단면임은 틀림없고 변명할 수 없는 과오이다. 이런 혼란은 종교개혁자 루터를 탄생 시킨 이유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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