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의 스위스 근위대 후예들> 생명을 버리고 지킨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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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청의 스위스 근위대 후예들> 생명을 버리고 지킨 약속
  • 박동현기자
  • 승인 2016.04.13 1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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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교훈, 그 흔적을 현장에서 보다.
▲ 로마 바다칸 시티, 교황청의 근위대(스위스 용병 후예) 2016년 3월 11일 현장 촬영 박동현기자

527년 5월 6일 교황령(嶺)의 수도 로마를 침략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이끈 신성로마제국군 가운데 일부가 통제에서 벗어나 로마 시내에서 무차별적으로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카를 5세와 프랑스와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그리고 교황령으로 구성된 코냑 동맹(1526-1529) 간의 대결구도에서 카를 5세가 결정적인 승기를 잡았음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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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클레멘스 7세는 국가 간 힘의 균형을 맞추고 합스부르크 왕조 통치하의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프랑스 왕국을 지원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 군대를 몰아내는데 성공했지만, 병사들은 돈을 지급받지 못하였다. 부르봉 공작 샤를 3세와 프랑스 컨스터블이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군 34,000명은 교황령의 수도 로마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하여 샤를 3세 휘하의 스페인 군사 중 6,000명을 제외하고, 게오르크 폰 프룬즈베르크 휘하의 란츠크네흐트 14,000명과 파브리치오 마라말도, 스키라 콜론나, 루이지 곤차가, 페란테 1세 곤차가, 오라녜 공작 필베르트 등이 지휘한 일부 이탈리아 보병 연대는 로마를 향해 진군하였다.

특히 독일인 병사들은 마르틴 루터의 사상에 심취한 루터파 프로테스탄티교도들로서 종교적인 이유로 교황령의 수도인 로마를 반드시 점령하겠다는 결의에 차있었으며, 그 밖에도 부유한 도시인 로마를 약탈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은 병사들도 있었다. 이들의 행군 중에 수많은 산적들도 합류하였다.

1527년 4월 20일 피렌체에서 교황의 가문인 메디치 가문에 대항하는 봉기가 발생하자 메디치 가문 일족은 이들을 피해 아레초로 망명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는 길을 따라 아쿠아펜덴테와 산로렌초알레그로테를 점령하였으며, 5월 5일 비테르보와 론칠리오네마저 점령하고 로마 성벽에 다다랐다.

헴스케르크가 그린 로마 약탈.

로마를 지키는 병력은 신성 로마 제국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다. 당시 로마를 지키고 있었던 병력은 렌초 디 체리가 이끄는 5,000명의 군인과 교황의 스위스 근위대뿐이었다. 도시를 감싼 성벽은 단단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군은 훌륭한 포병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샤를 공작은 포위된 도시와 동맹군 사이에 끼이게 될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도시를 서둘러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5월 6일 신성 로마 제국 군대는 잔니콜로와 바티칸 언덕 쪽에 있는 성벽들을 공격하였다. 샤를 공작은 벤베누토 첼리니가 쏜 총을 맞고 치명상을 입었다. 샤를 공작은 병사들에게 자신의 부상을 숨기기 위하여 하얀 망토를 걸쳤는데, 본래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적들에게 그의 신분을 노출시키는 꼴이 되고 말았다.

신성 로마 제국의 지휘관 가운데 가장 존경받은 지휘관이었던 샤를 공작의 죽음은 곧 병사들의 규율이 무너지는 결과를 야기했으며, 이들은 같은 날 로마의 성벽을 함락시키는데 성공했다. 전사한 샤를 공작을 대신해 샬롱의 필리베르트가 군대의 총지휘권자가 되었지만, 샤를 공작과 같은 인기를 누리지도 두려움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바로 이 즈음에 스위스 근위대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 중의 하나가 일어나게 된다.

신성 로마 제국군이 로마에 몰려들자 교황청에서 고용한 각 나라의 용병들은 싸움을 피하고 도망치다시피 하였다. 때문에 로마 교황청에 남은병력이라곤 스위스 근위대 뿐이였는데 스위스 근위대는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신성 로마 제국 군대를 맞아 싸우다가 거의 전멸하다시피했다.

이 전투로 당시 스위스 근위대 500명 중 189명만 남은상황이 되었으며 이들도 교황이 성 배드로 대성당까지 피산하는 과정에서 신성 로마 제국간의 전투에 의해 겨우 42명만이 살아남게된다. 이에 클레맨스 7세는 이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갈것을 권고했지만 이들은 충성의 서약을 깨뜨릴 수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교황을 위해 싸울것이며 오히려 클레맨스 7세에게 피신할것을 당부하였고 이들은 성 배드로 대성당 근처에 몰려오는 신성 로마 제국군과의 싸움에서 모두 전사하게 된다.

이러한 스위스 근위병들의 시간을 버는 희생덕분에 동안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바티칸에서 산탄젤로 성까지 이어진 비밀 통로인 파세토 디 보르고를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교황청은 오직 스위스 근위대만을 고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약 1,000여명에 달하는 교황군 병사들에 대한 잔혹한 공개 처형이 이루어진 직후에 본격적으로 로마에 대한 약탈 행위가 전개되었다. 성당과 수도원은 물론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들의 저택이 대거 약탈되고 파괴되었다. 심지어 신성 로마 제국과 친분이 있었던 추기경들도 폭도로 돌변한 병사들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거액의 금전을 어쩔 수 없이 갖다 바쳐야 했다.

5월 8일경, 클레멘스 7세와 적대 관계였던 폼페오 콜론나 추기경이 로마로 입성하였다. 콜론나 추기경의 소작농들이 그 뒤를 따랐는데, 이들은 과거 교황군에 의해 약탈당했던 것에 앙심을 품고 보복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로마의 비참한 상황을 목격한 콜론나 추기경은 연민을 느끼고 자신의 저택에서 수많은 로마 시민을 접대하였다.

3일간의 참화 이후 필리베르트는 병사들에게 약탈을 금하였지만 이를 따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한편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에 계속 칩거 중이었다. 6월 1일 프란체스코 마리아 1세 델라 로베레와 살루초의 미켈레 안토니오가 로마 북부 몬테로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웠던 이들은 광폭한 신성 로마 제국군과의 전투에서 쉽게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6월 6일 클레멘스 7세는 항복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에 파르마와 치비타베키아, 모데나를 양도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신변을 보장받는 대가로 400,000 두카트의 몸값을 지불하라는 조건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행한 것은 후자뿐이었다. 시기스몬도 말라테스타가 리미니로 돌아갈 즈음 베네치아는 체르비아와 라벤나를 획득하기 위해 그의 상황을 이용하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로마 약탈 소식을 접하고 무척 당황하여 당장 중지할 것을 지시하였지만, 자신에게 대항했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군대와 도시를 잃고 산탄젤로 성에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카를 5세는 로마 약탈에 부분적으로는 책임이 있는데, 이는 그가 클레멘스 7세를 개인적으로 만나 자신의 요구사항을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군대에게 자율성을 부과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를 언짢게 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와의 어떠한 충돌도 피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떠한 주저함과 조건 없이 클레멘스 7세는 울트레흐트 교구의 세속 재산을 합스부르크 왕가에 양도한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는 곧 르네상스 시대의 종국을 의미했으며 아울러 교황에 대한 신망을 떨어뜨렸다. 또한 카를 5세가 종교개혁 문제에 있어서 마르틴 루터와 손을 맞잡은 독일 영주들에 대해 자유롭게 책벌을 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께서는 교황 때문에 루터를 핍박한 황제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루터를 통해 교황을 파괴하도록 손을 쓰셨다.”(LW 49:169)라고 언급하였다.

한편, 로마 약탈 당시 용맹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스위스 근위병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5월 6일은 스위스 근위대에 새로 입대한 신입병들은 충성 서약을 맹세한다.

글 출처 : 위키백과와 현장에서 가이드 설명 메모 참고. 사진 박동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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