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NOT SUCCESS, BUT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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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NOT SUCCESS, BUT SERVICE)”
  • 박동현기자
  • 승인 2017.04.05 22: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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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인 미국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는 불쌍한 나환자들을 위해 모두 사용했던 천사였다. 그녀가 조선에서의 사랑과 헌신의 생애를 마친 날은 1934년 6월 26일 새벽 4시였다.
▲ 서서평, 엘리자베스 셰핑 Elizabeth Johanna Shepping

조선을 위해 헌신한 서서평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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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조선에는 2만 여명이 넘는 한센병(나환자)자 들이 있었다. 갈 곳 없는 나환자들을 돌 본 사람들은 평신도 선교사였던 포사잇과 윌슨 그리고 ‘엘리자벳 쉐핑(Elizabeth Shepping, 한국명: 서서평)’ 선교사였다.

서서평 선교사는 나환자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가르쳐 주었으며, 고아 13명을 자신의 딸과 아들로 입양하고 한센병자의 자녀를 아들(요셉)로 삼아 함께 살았다.

서양여성이 구두 한 켤레 없이 검정고무신을 신고 다니기도 했다는 서서평 선교사, 고국인 미국에서 보내오는 생활비는 불쌍한 나환자들을 위해 모두 사용했던 천사였다. 그녀가 조선에서의 사랑과 헌신의 생애를 마친 날은 1934년 6월 26일 새벽 4시였다.

장례식은 광주(전남) 최초로 사회장으로 치뤄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슬퍼했다. 운구는 이일학교(한일장신대 전신) 제자들이 맡았고 그 뒤에는 양딸들과 아들, 수백 명의 거지, 나병환자들이 뒤 따랐다. '어머니! 어머니!' 하고 목 놓아 우는 그들의 통곡소리에 조객들은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 서서평 선교사가 1922년에 세운 광주 이일성경학교의 1930년 졸업반 사진

성녀로 추앙받는 테레사 수녀가 인도 콜카타에 가기 18년 전, 조선 땅 광주에는 이미 성녀 서서평이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 조선에서 22년간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고,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조선인의 친구’가 아니라 그저 ‘조선인’으로 살았던 사람, 가난하고 병든 이웃 나환자들을 죽기까지 섬겼던 그 사람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왔다.

‘서서평’이라는 우리말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1880~1984) 그녀는 광주기독병원 간호사였다.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나 9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어 1912년 3월, 32세 나이로 평신도선교사로 조선에 파송되었다.

호남신대 동산 서서평묘비, 남택률 목사 페이스북에서 옮김

신분은 간호사였지만, 그녀의 사역은 간호사에만 머물지 않았다 교육에 대한 열정과, 풍부한 성경지식을 토대로 최초의 여자 신학교인 이일성경학교(한일장신대 전신)를 설립했다. 

여성운동의 산실인 <부인조력회> <조선여성절제회> <여성전도회연합회> <조선간호부회> 대한간호협회 등을 창설하여 우리나라 교육과 여성운동사에 지대한 족적을 남겼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고통 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전라도 일대의 나환자들과 걸인들을 돌보았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한 집에서 같이 살았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며 살기를 즐겨하던 그녀는 1934년 6월, 광주에서 만성풍토병과 과로, 영양실조로 숨졌다 (54세) 자신의 주검마저 병원에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지금 광주 양림동 108번지, 호남신대 언덕위 선교사묘원에 편안히 잠들어 있다. (위 묘비 사진) 한동안 잊혀 졌던 그녀의 삶은 이 땅에 첫발을 내 디딘지(1912) 100년을 맞아 평전이 출판되면서, 재조명 되고 있다. 「바보야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야」양국주 저 2012.03.17. 광주 기독간호대학 ‘오웬기념각’에서 <서서평 선교사 내한 100주년 기념예배>및 <서서평 평전 출판식>이 열렸었다.

▲ 당시 일제 치하의 조선의 어린이들, 아이가 아이를 업고있는 모습도 보인다.

서서평이 활동했던 광주(전남)는 1930년 약 45만 가구 220만 인구 가운데 굶주리는 인구가 무려 88 만여 명, 걸인이 1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서평은 1년 중에 100여 일을 나귀를 타고 전라남-북도와 제주도까지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병자들을 돌보고 문맹여성들을 교육시켰다.

서서평의 당시 일기엔 “한 달 간 500여 명의 여성을 만났는데 하나도 성한 사람이 없이 굶주리고 있거나, 병이 들어 앓고 있거나, 소박을 맞아 시집으로부터 쫓겨났거나 또 다른 고통을 앓고 있었다”고 시대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 1930년대 광주, 서서평 선교사가 돌보던 한센인들. 사진의 손을 보면 나병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자신이 세운 이일학교(한일장신대 전신) 여학생들과 함께 농촌으로 가서 매년 3만~4만여 명의 문맹여성들을 교육시켜 존중받을 한 인간으로서 삶을 일깨워 주었다. 그는 한 나환우가, 역시 나환우였던 아내가 죽자 병든 자신이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버리려던 아이를 데려다 양아들로 삼은 것을 비롯해 버려진 14명의 아이들을 양아들·양딸로 삼았다. 소박맞거나 오갈 데도 없는 미망인 38명도 데려와 한집에서 가족으로 함께 살았다.

1926년 이 땅의 한 매체는 '서서평 인터뷰 기사'에서 그를 “사랑스럽지 못한 자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고 거칠고 깨진 존재를 유익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단련된 생명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서서평의 열정”이라고 썼다.

서서평이 별세하자 선교사 동료들은 그를 ‘한국의 메리 슬레서’라고 추모했다. 메리 슬레서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에서 버려진 어린이들을 돌보다 사망해 <아프리카 아이들의 어머니>로 추앙된 인물이다.

또한 1930년대 미국 장로회는 전 세계에 파견된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한국 파견 선교사로는 유일하게 서서평을 ‘가장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했다.

서서평의 부음을 듣고 그의 집에 달려간 벗들은 그의 침대 맡에 걸려있던 좌우명을 보았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NOT SUCCESS, BUT SERVICE)”

한일장신대 연역소개(홈피) 1922년 06월2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송한 서서평(Elizabeth Johanna Shepping)선교사가 광주에서 여성들을 위한 전도부인(Bible Woman)양성학교로 시작. 1923.년09월 04일 테이트(Mattie Ingold Tate) 선교사가 전주에 ‘여성성경학교’를 설립 개교, 1940년 09~10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자 여성성경학교 폐교, 1947. 09월 해방 후 전주 한예정성경학교 복교, 1948년 09월 광주 이일학교 복교 했다. (편집자 주) 신사참배 [神社參拜] 일제 강점기, 일제가 우리의 종교와 사상, 자유를 억압하기 위하여 곳곳에 신사<神社>를 세우 두고 참배할 것을 강요 했다.

1961년 04월 01일, 전주 한예정 신학원과 광주 이일성경학교가 합병하여 전주 한일여자신학교로 명칭변경 하였다. 1973년 11월 14일 정부의 대학령에 의한 각종학교 인가 1974년 04월 25일 학교법인 한일신학교를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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