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서 부활로 조재호 목사(고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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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 부활로 조재호 목사(고척교회)
  • 박동현 기자
  • 승인 2019.04.20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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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2월 8일 프랑스의 세계적인 여성잡지 Elle의 편집장이며, 프랑스 상류 사회의 사교계를 주름 잡았던 장 도미니크 보비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3주 후에 의식을 회복했지만, 전신마비 상태가 되었다
▲ 부활하신 예수님 이미지

어렸을 때 한 동네에서 뛰놀던 친구들이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할 즈음 그들 중에 한 친구가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사를 갔다. 서울로 간 친구는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해 나가기 위해, 냉혹한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투쟁적으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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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원하는 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경쟁은 욕심을 불러왔다. 과도한 욕심과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권력과 재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인생을 뒤돌아 볼 즈음인 60대 중반에 그는 회복 불가능한 심각한 질병을 얻고 말았다. 그는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대학병원 특실에 누워 있었다.

친구의 소식을 들은 고향 친구 두 명이 서울로 그를 문병 왔다. 농사 일로 검게 그을린 얼굴, 쭈글쭈글 거칠어진 손, 친구들의 손에는 주스 한 박스가 들려져 있었다. 그들은 이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친구와 으리으리한 특실에서 마주 앉았다. 별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손 꼭 잡고 힘내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고향 친구들은 병원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으로 한 참을 가다가 한 친구가 말문을 열었다. “여보게 할 말이 있네. 아무리 시설 좋은 병원 비싼 특실이라도, 우리가 늘 가는 우리 동네 경로당보다는 못한 것 같아.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그걸 말해서 뭘 하겠나. 기계장치 요란한 병원 특실보다 햇볕 잘 드는 동네 경로당이 100배나 낫지.” 맞다. 정막이 감도는 종합병원 특실보다, 시골 마을 어귀 햇볕 잘 드는 경로당이 100배나 낫다.

▲ 조재호 목사(고척교회 위임)

욥은 그의 인생길에서 불연듯 마주친 고난 앞에서 이렇게 한탄하며 고백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욥 3:25-26). 이것은 성경에서 가장 처절한 고백 중 하나이다.

고난은 우리에게서 영혼의 평온함도, 삶의 안일함도, 일상의 휴식도 다 빼앗아간다. 고난이 던져주는 것은 끝없는 불안이다. 우리 인생은 이러한 짐을 지고 살아간다. 이 세상에 고난을 좋아하거나, 고난을 반기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고난은 고난 받는 사람에게 많은 고통과 아픔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 고통과 아픔 때문에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인생이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두 손 들어 환영하거나, 문간에 나가 어서 오라고 기다리지 않는다. 너나 할 것 없이 고난을 멀리하고 피하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살았던 수많은 사람 들 중에 오직 한 분, 예수님은 전혀 다르셨다. 그 분은 고난을 회피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하늘 보좌를 떠나서 이 땅으로 오실 때, 어떠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지 이미 알고 계셨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 보좌 우편이라는 영광의 자리를 뒤로 하고, 낮고 낮은 고난의 자리로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 (눅 17:25). 예수님이 받아야 하는 고난은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정이었다.

예수님은 고난이 있음을 아셨다. 그 분은 고난을 회피하지 않으셨으며, 고난의 위세 앞에서 숨지도 않으셨다. 세례 요한은 저 멀리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세상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 1:29).

예수님이 만나야 하는 궁극적인 고난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십자가의 고난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으로부터 고난은 이미 시작되었다. 자유로운 영이신 분이, 인간의 한정된 몸에 갇혀 있다는 것 자체가 고난 중의 고난이다.

1995년 12월 8일 프랑스의 세계적인 여성잡지 Elle의 편집장이며, 프랑스 상류 사회의 사교계를 주름 잡았던

▲ 장 도미니크 보비

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3주 후에 의식을 회복했지만, 전신마비 상태가 되었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왼쪽 눈꺼풀뿐이었다.

그의 존재와 외부 세계는 단절되었다.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통로가 사라지고 막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의료진은 소통의 방식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 남아 있는 왼쪽 눈꺼풀이었다. 그가 눈을 깜빡거리는 신호로 알파벳을 지정하면, 지켜보는 사람은 이를 받아쓰기 시작했다.

때로는 한 문장을 쓰는데 꼬박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마음의 생각들이 종이 위에 표현되었다. 20만 번 이상의 눈을 깜빡이며 15개월 만에 쓴 책이 “잠수복과 나비(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라는 책이다.

그의 육체는 두껍고 무거운 잠수복에 갇힌 것 같이 꼼짝 달싹 못하는 신세였다. 하지만 그는 발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나비가 되고 싶었다. 마침내 그의 책이 출간되었고, 책을 출판하고 8일 후 그는 그렇게나 꿈꾸던 ‘자유의 나비’가 되었다.

무한히 자유로운 분이, 인간의 육신이라는 두꺼운 껍질을 입으셨다. 시간과 공간을 지으신 분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으로 들어오셨다. 이 세상 역사를 홀로 주관하시는 분이 지저분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광활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인간의 모습으로 제한되어 사셨다. 남의 집 어두침침한 마구간, 그것도 냄새나는 여물통을 요람 삼고 태어 나셨다는 것은 결코 낭만적인 스토리가 아니다. 그것은 고난의 서막이었고, 그 절정은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온 몸이 찢기시고 목마르셨던 일이다.

십자가는 그분의 무한하신 자유가 극단적으로 제한을 받는 자리였다. 그분은 왜 그 고난의 자리를 아시면서도 꿋꿋이 걸어가셨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730년 전, 이사야는 그 분의 모습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사람들이 조롱거리로 씌워준 가시면류관의 가시가 그 분의 머리를 찔렀다. 움직일 때마다 살을 뚫고 들어가서 이마에, 얼굴에, 뺨에 피가 흘렀다. 대못으로 양손과 두 발이 찔리셨다. 그냥 찔린 것이 아니라 관통해서 찔리셨다.

관통해서 찔리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나무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그리고 그 분은 창으로 옆구리까지 찔리셨다. 우리에게 자유와 평화와 나음을 주시기 위하여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의 상황을 견디셨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는 고난 그 자체에서 끝을 맺지 않는다. 주님의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에서 끝이 나지 않는다. 주님의 십자가는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부활의 생명, 그리고 새 세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인생은 죽음이 마지막이요, 무덤은 인생길에 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 안에서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요, 무덤은 인생길을 거기서 멈추게 만드는 끝이 아니다. 작은 무덤은 온 우주의 주인 되시는 크신 부활의 주님을 가둬놓을 수 없다.

어두운 무덤은 빛의 근원되시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오신 주님을 가둬놓을 수 없다. 죽음의 공간인 무덤은 영원한 생명의 주님을 가둬놓을 수 없다.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며, 무덤은 끝이 아니다. 부활은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과 능력을 소유하게 만든다.

다산 정약용이 쓴 [중수만일암기(重修挽日菴記)]에 이런 글귀가 있다. '열흘 만 살다가 버리는 집이 누에고치이고, 여섯 달을 살다가 버리는 집이 제비 집이며, 1년 동안 살다가 버리는 집이 까치집이다. 그런데도 누에는 집을 지을 때 죽을 힘을 다해 창자에서 실을 뽑아내고, 제비들은 자기 침이 다 마르도록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기고 빚으며, 까치들은 열심히 볏짚을 물어 오느라 입이 헐고 꼬리가 빠져도 지칠 줄을 모른다'

세상의 미물들도 잠시 사용할 집을 짓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음 받은 인간은 어떠해야겠는가. 주님의 고난 속에서 꽃을 피운 부활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가져다준다.

부활은 궁극적인 승리와 구원의 완성인 영원한 처소가 될 하늘나라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여전히 의인의 고난을 요구하는 현실에서 오늘을 새 희망으로 살게 한다. 주님의 부활로 우리는 영원한 나라와 역사의 새 아침을 만나게 된다. 부활은 잠수복을 입고 사는 것과 같은 우리의 인생에서 껍질 벗은 나비처럼 새 생명의 날개 짓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조재호 목사(고척교회)는 

연세대학교에서 공학을 전공, 미국 노스케롤라이나 주립대학교(NCSU)에 유학 중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미국 유니온신학교(버지니아 리치몬드)에서 수학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 Div)을 했다. 그 후 같은 학교에서 선교학(Th. M, Th. D)을 전공했다.

고척교회(서울서남노회) 65년 역사 속에서 2대 담임목사로 부름 받아 지난 26년 동안 안으로는 사랑을 나누고 밖으로는 선교를 실천하는 교회의 목적의식을 가지고 섬기고 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나가며, 지역 봉사 섬김과 세계 선교에 열정을 품고 달려가고 있다. 교회가 복음의 능력을 소유하고 주님의 손에 붙잡혀 아름답고 능력 있게 쓰임 받고자 늘 기도하고 있다. 조재호 목사는 2월17일 (사)한아봉사회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선교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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