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심미의 히브리어 냄새 맡기(Smelling the Deep-Favoured Hebr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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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칼럼) 심미의 히브리어 냄새 맡기(Smelling the Deep-Favoured Hebrew)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0.05.08 02: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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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은 헬라어로 쓰였지만, 히브리적 화법으로 넘쳐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히브리인은 옹달샘에서 마시고 헬라인은 그 아래 샘에서 마시고 라틴족은 그 아래 연못에서 마신다.’” 여기에 나는 한 문장을 더 첨가한다. ‘한국인은 더 아래 작은 웅덩이에서 마신다’라고 말이다.
히브리어 성경

성경은 구약 히브리어(아람어)와 신약 헬라어로 기록된 책이다. 세계 다른 어떤 언어보다 구별된 언어로 쓰인 책이므로 원어를 알아야 제대로 해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원어를 모르더라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한 좋은 번역판을 이용한다면 큰 도움이 될 수가 있다. 영어역본만 해도 수없이 많은 종류가 있고, 게다가 몇 개월마다 새로운 역본이 만들어진다. 우리가 잘 아는 KJV, NIV, ESV, RSV 등등, 이 외에도 계속 추가되고 있다. 왜 이리 역본의 종류가 많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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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에 가장 가깝고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최고의 역본 하나를 만들어내는 건 요원한 일인가? 다른 역본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원어에 근접한 내용으로 번역된 역본을 소유할 순 없는 것인가? 히브리어는 아프리카-아시아 계통의 언어와 짝이 잘 맞고, 헬라어는 인도-유럽어족에서 자라온 영어와 상대적으로 비슷한 색깔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어는 쩍쩍 갈라진 황무지를 이동하며 만나를 먹고 양 떼를 치며 적에게 돌팔매질을 해대는, 흙냄새 폴폴 풍기는 셈 부족의 사막 빛 갈색과 타다 남은 잿빛을 띠고 있다.

10만 개 이상의 단어가 있는 영어에 비해 히브리어는 턱없이 적은 8천 개의 단어를 보유하고 있다. 성경번역 작업을 하다가 이런 사실을 깨달은 마틴 루터의 얘기를 들어보자. “히브리어는 다른 어떤 언어보다 평범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웅장하고 찬란하다. 히브리어는 훨씬 적은 수의 소박한 단어들을 가지고 다른 모든 언어를 능가하는 일을 한다.”

히브리인은 반 고흐(Vincent van Gogh)처럼 굵직한 붓으로 대담한 색을 흩뿌려 진리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해보자. 히브리어 중에 ‘חֶסֶד’란 단어가 있다.

이것을 영어로는 ‘goodness’, ‘kindness’, 우리말로는 ‘자비’, ‘긍휼’로 번역한다. 이처럼 영어나 한글로 번역할 때에 다양한 단어를 그 대응 단어로 사용할 수 있겠지만, 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חֶסֶד’란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를 그에 맞게 1:1로 대응 번역하기에 적합한 한 단어가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단어수가 아무리 많아도 묵직하고 깊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단어를 동일한 무게와 깊이의 단어로 번역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번역은 반역’이라 했다. 번역하는 반역이 되기 때문이다.

저는 번역가로서 활동해봐서 번역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영어 원서를 번역할 때 제일 힘든 내용이 통계에 관한 것들이다. 우리말에 대응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2009년 <생명의말씀사>로부터 부탁을 받고 톰 라이너(Thom S. Rainer)와 에릭 게이거((Eric Geiger)가 공저한 『Simple Church』란 책을 번역한 적이 있다. 목회나 설교에서 전달되는 표어나 메시지의 내용이 단순해야 부흥과 성장이 가능하다는 통계학적 자료를 제시한 책이다. 그만큼 사람들은 복잡한 것보다는 간단한 것을 좋아한단 말이다.

그런데 번역한 책의 한글제목 선정에서 고심이 시작됐다. ‘Simple Church’를 우리말로 표현해야 하는데, 누구나가 다 떠올리는 대응번역은 ‘단순한 교회’이다. 하지만 본서의 내용으로 볼 때 ‘simple’은 ‘단순한’이란 뜻이 아니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복잡한’(complicated)의 반대 의미였기 때문이다.

장고 끝에 최종 출판사에 넘긴 제목은 ‘심플 처치’였다. 하지만 책은 ‘단순한 교회’란 제목으로 출간되고 말았다. 역자로서 기분이 많이 상했지만 이해는 했다. ‘심플’이란 말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지만 문제는 ‘처치’란 말이었다. ‘교회’를 ‘처치’로 말하는 이는 거의 없기 때문에 ‘심플 처치’라 정하기 힘들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래도 내 마음 한 구석에 찜찜함이 남아 있었음은 숨길 수 없었다. 본서의 저자가 의도한 ‘simple’은 ‘단순한’보다는 ‘간단한’ 혹은 ‘간결한’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들이 ‘교회’란 단어와 어울리면 ‘간단한 교회’, ‘간결한 교회’로 더 어색해진다. 지금 나는 번역 시 원어에 대응하는 적절한 단어가 존재하지 않을 때의 어려움을 얘기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다시 히브리어로 돌아가 보자. 히브리어는 지극히 풍성하고 시적인 언어로, 영어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 따라서 다양한 영어역본을 참조하는 것이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역시 원어의 의미는 원어로만 제대로 맛볼 수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신약성경을 읽을 때 헬라문화 배경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함에 유의하라. 왜냐하면 비록 신약이 헬라어로 기록되긴 했지만, 그 저자들은 대다수가 ‘셈족식 사고’(Semitic thought)를 하는 유대 문화권에서 자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헬라어 성경
헬라어 성경

헬라어로 된 신약에서 깊고 풍성하게 묻어나는 히브리어 색감을 보며 ‘유대 본토의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데살로니가 전서 4:1절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이 때 ‘행하며’로 번역된 헬라어 ‘περιπατέω’는 단순히 ‘걸어서 돌아다니다’ 혹은 ‘도보로 이동하다’를 뜻한다.

이것을 자칫 ‘산책’이나 ‘조깅’으로 오해할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이 대화를 위한 교제나 건강을 위해 ‘걷기’를 많이 한다. 심지어 ‘만보 걷기’를 위해 스마트폰을 이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약에 나오는 ‘행함’(walking)은 그런 뜻이 아니다.

유대 문화적 사고가 없이는 바울이 의도한 깊은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행하라”고 했는데, 이 내용을 처음 대하는 헬라어권 독자들은 왜 바울이 그렇게 말했는지 궁금해 하며 머리를 긁적였을 것이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다.

신약 저자가 히브리적 뉘앙스를 담아 헬라어 ‘περιπατέω’란 단어를 사용했음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절대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비록 헬라어로 기록되긴 했지만, 바울의 유대적이고 히브리적인 냄새를 맡아야 만이 그 진의를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미국에 진출해있는 태권도 사범들이 많은데, 도장마다 태권도를 배우러 오는 미국 아이나 사람들로 붐비는 모습을 본다. 태권도를 배울 때는 인사나 구호 등은 모두 한국말로 한다.

예를 들어, “차렷!”이라고 했을 때 손을 내리고 자세를 꼿꼿하게 있으라는 말로만 받아들였다면 오해다. 마음가짐이나 정신자세도 항상 깨어 있어 있으란 뜻이 들어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영어로 ‘walk’의 뜻을 가진 헬라어 ‘περιπατέω’는 히브리어로 ‘הֲלַךְ’라는 단어인데,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지니고 나아가야 할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의 방식과 방향을 묘사하는 메타포(metaphor, 은유)로 두루 사용되는 단어이다.

깊은 의미를 다 포함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그분과 인격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순종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걷거나 행하는 것’이 아님을 눈치 챘는가? 그럼 유대적 의미를 충분히 살려서 살전 4:1절을 다시 번역해보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그분과 인격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순종하고 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살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보여주는 구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어떤가? 영어역본이나 우리말 성경과 비교했을 때 그 맛의 차이가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다. 위에서 소개한 루터의 얘기로 마무리 해보자. “내가 더 젊었다면 찬란하고 유익하면서도 올바른 성경 이해에 필수적인 히브리어를 완벽하게 섭렵할 방도와 수단을 강구했을 것이다.

신약은 헬라어로 쓰였지만, 히브리적 화법으로 넘쳐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히브리인은 옹달샘에서 마시고 헬라인은 그 아래 샘에서 마시고 라틴족은 그 아래 연못에서 마신다.’” 여기에 나는 한 문장을 더 첨가한다. ‘한국인은 더 아래 작은 웅덩이에서 마신다’라고 말이다.

 신성욱 교수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교수다.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공부했음, University of Pretoria에서 공부했음, Calvin Theological Seminary에서 공부했음,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언어학 전공, 계명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과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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