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小鹿島) 한센인의 슬픈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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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小鹿島) 한센인의 슬픈 추억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0.12.16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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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은 필요한 전시 물품을 생산하는 데에도 동원됐다. 목탄 생산, 가마니 짜기, 송탄유용 송진채취, 토끼가죽 생산, 벽돌제조 등이다. 1935년부터 소록도에서 생활한 한 한센인은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이란 자료집에서 당시의 고통을 이렇게 회고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지배자들은 한센병인 들에게 송진을 구해 오라 명했다. 사진의 소나무는 당시 껍질을 벗겨 송진을 얻어낸 상처의 흔적을 보이고 있다.  남계영 이수미 선교사

소록도는 전체 면적 약 3.8㎢의 원래 남해안의 다른 섬처럼 주민들이 고기잡이와 농사를 짓고 사는 평범한 섬이었다. 소록도가 한센인의 한(恨)이 서린 섬으로 바뀐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 2월부터다. 이때 조선총독부(1910년 국권피탈로부터 1945년 8·15광복까지 35년간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 및 수탈기관)가 소록도병원의 전신인 ‘자혜의원’을 소록도에 설립을 공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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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그해부터 세 차례에 걸쳐 ‘토지수용’을 명목으로 소록도 주민에게 모두 섬을 떠나게 했다. 한센인을 소록도에 수용하기 시작한 건 자혜의원이 들어서고 이듬해 4월 병사(病舍)가 건립되고 부터다.

평범한 명칭과 달리 자혜의원은 의료시설이라기보다는 한센인 격리 공간이었다. 일제는 전국에서 뚜렷한 주거지가 없는 한센인들을 강제로 끌어 모아 소록도로 보냈다.(당시 안센병에 걸리면 스스로 가족을 떠났다)

소록도 안에서는 자혜의원의 일본인 원장을 포함한 직원들의 거주공간은 ‘무독지대,’

(유독지대'와 `무독지대'라는 말의 유래 : 소록도에서 1948년 이전 한센인 환자 간부들이 직원지대에 잠시 거주했는데, 그들을 병사지대로 옮기고 그 사이에 아카시아 나무를 심고 아래로 철조망을 설치하여 병사지대와 직원지대를 유독지대, 무독지대라 구분하여 불렀다고 한다).

환자의 거주공간은 유독지대로 분리하여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다. 환자들에게 일본식 옷을 입히는 등 일본의 생활양식을 강요했고 신사(神社)를 세워 강제로 참배케 했다. 처음에는 40여 명의 한센 인이 있었지만, 환자 수가 급증하자 병동 신축 등 확장공사를 시작했다.

이 공사에는 그곳에 수용된 한센인들이 동원했다. 새로 건물을 짓기 위해 벽돌공장을 세우고 벽돌을 찍어냈다. 그 밖에도 일상에 필요한 생활용품인 짚신(신발) 만들기부터 환자들의 치료 보조까지 모든 작업에 한센 인이 투입됐다.

일제는 적당한 작업이 ‘정신 위안’, ‘체력 증진’ 등 치료 효과를 낸다면서 환자들에게 작업을 독려했다. 한센인은 독한 약을 먹기 때문에 영양 공급이 중요한 사안이었지만, 일제는 작업에 동원되는 한센인들에 충분한 음식을 주지 않았다.

작업의 대가로 소종의 작업 장려금을 지급한 것으로 기록돼 있지만, 한센인들이 이 돈을 실제로 받았는지는 자료가 부실하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도 못하면서 각종 작업에 강제 동원된 사람들의 불만이 커져가면서 소록도를 탈출하는 환자도 생겨났다.

치료는커녕 가혹한 노동에 내몰린 한센 인들은 어선을 타고 800m 남짓 떨어진 건너편 녹동 항으로 도망쳤다. 무조건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은 한센인도 상당수였다고 전해진다.

일제는 한센인의 탈출을 막기 위해 해안에 4㎞ 길이의 순찰도로를 만들었는데 그 작업에도 환자들을 동원했다. 1937년 말, 환자들은 추위 속에서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삽과 지게 등에 의존해 도로를 닦아야 했다.

이른아침부터 중노동에 시달린 소록도 안센인들 

그해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한 이후로 소록도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일제는 한센인들 에게까지 국방헌금·장병위문금 등의 명목으로 돈을 거둬갔다. 작업 장려금도 헌금 명목으로 회수해갔을 정도다.

환자들은 필요한 전시 물품을 생산하는 데에도 동원됐다. 목탄 생산, 가마니 짜기, 송탄유용 송진채취, 토끼가죽 생산, 벽돌제조 등이다. 1935년부터 소록도에서 생활한 한 한센인은 200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센병, 고통의 기억과 질병 정책>이란 자료집에서 당시의 고통을 이렇게 회고했다.

“(병원) 확장 공사할 때는 새벽에 나가서 어두워져야 들어와요. 사람들이 일본 감독관에게 많이 맞았어요. 당시 (일제는) 환자를 인간 취급을 안 했거든요. 동물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았죠.” 노동력 착취는 물론이고 환자에 대한 폭행도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증언이다.

당시 소록도의 인권 유린의 상황을 웅변해주는 시설물이 지금도 남아 있다. ‘자혜의원’이 ‘나병요양소’라는 이름을 거쳐 1934년 10월 ‘소록도갱생원’으로 명칭을 바꾼 뒤 지어진 감금실·검시실 등이다.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한센인 중에는 붉은색 벽돌로 지은 감금실에 끌려가서 최장 60일까지 갇혀 지내다가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일본인 갱생원 원장은 정해진 금지행위를 한 한센인에 대해 직권으로 판결 및 징벌을 할 수 있었다.

당시 감금실이 보존되어 있다 

1945년 해방 직후 자치권 주장하는 84명 학살 만행

구금·체벌이 아무런 법 절차 없이 이뤄졌다. 소록도 한센인이 지켜야 할 규정 등을 담은 ‘조선총독부 자혜의원 연보’에 따르면 ‘환자가 사망한 경우 학술연구를 위해서 시체 해부를 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당시 시체 해부가 이뤄진 장소가 바로 검시(檢屍)실이다.

소록도 환자는 사망하게 되면 가족의 의사와 무관하게 검시 절차를 거친 뒤에야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시신은 소록도 내 화장터에서 화장했다. 현재 검시실에는 당시 사용된 검시대와 세척 시설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감금실 등은 문화재청의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유지되고 있다.

남녀가 다른 공간에서 생활한 소록도에는 1936년부터 동거가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원래 호적상 부부, 법적인 부부는 아니더라도 정식으로 혼인한 남녀, 소록도에 오기 전부터 연인 사이였던 남녀 등에 한해서다. 하지만

중요한 조건이 있었다. 자식을 갖지 못하도록 단종(斷種) 수술, 즉 정관 수술을 받아야 했다.

당시는 한센병이 유전되는 것으로 오인했던 일제가 단종과 낙태 수술 등의 인권 유린을 했다. 이러한 수술은 해방 후 1980년대까지도 계속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런 피해를 입은 한센인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며 2014년 4월 광주지법 순천지원의 판결을 시작으로 정부가 이들 한센인에게 1인당 3000만~40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잇따랐다.

소록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광활한 중앙공원(관광객은 이곳까지만 출입이 가능하다)은 한센인의 피땀이 서린 한의 공간이기도 하다. 일제는 작은 공원이었던 이곳을 확장하는 공사를 1939년 12월부터 벌였다. 환자들은 조경에 사용할 바위와 큰 나무를 나르고 산을 깎아 공원 조성 작업에 동원됐다.

정원석은 다른 지역에서 배에 실어 소록도에 들여왔다. 환자들은 통나무를 이용해 정원석을 해안에서 공원까지 끌어왔다. 돌을 메고 가다가 지쳐 쓰러진 환자에게 공사 감독자들이 채찍질을 가했다. 이에 어떤 환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런 사연을 갖고 있는 중앙공원은 1년여의 공사 기간을 거쳐 1940년 4월 1만9800㎡ 규모로 완공됐다. 현재는 확장을 거쳐 2만5000㎡ 규모로 황금 편백과 향나무 후박나무 등 관상수 100여 종이 심어져 있어볼만 하다.

공원에는 한센병은 낫는다는 탑이 있다.

일본인 소록도병원장의 부당한 대우를 견디다 못해 한센인 환자가 일본인 원장을 살해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1942년 6월 20일 일어난 스오 마사스에 원장 살해사건이다. 1940년부터 2년여 동안 소록도에서 지낸 당시 27세의 한센인 이춘상은 스오 원장이 훈시를 위해 환자들 앞을 지나던 순간 준비한 흉기로 가슴을 찔렀다.

이춘상은 곧장 체포돼 감금실에 갇혔다가 재판을 받았다. 그는 사건 두 달 만인 8월 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항소·상고 기각을 거쳐 사형이 확정됐다. 이춘상에 대한 사형 집행은 1943년 2월 19일 대구형무소에서 이뤄졌다. 그의 행동은 범죄지만, 일제로부터 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투쟁이었다는 평가가 비등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소록도에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8월 22일 자치권을 요구하던 환자 84명을 직원들이 끌고 가 총살한 ‘84인 학살사건’이다. 세상과 단절된 섬 소록도에서 일어난 대규모 학살은 이듬해 4월이 돼서야 바깥세상에 알려졌다.

진상 조사가 이뤄진 것은 사건이 발생하고 56년이 지난 2001년 12월 8일이다. 소록도 환자들로 구성된 원생자치회는 숨진 환자들이 화장·매몰된 현장을 발굴했다. 2002년 8월 22일 매몰 현장에 추모 시설물이 세워졌다. 소록도병원 본관 앞 ‘애한의 추모비’다.

좌절로 끝난 ‘희망의 사업’ 오마도 간척

‘자혜의원’으로 시작된 이 병원은 여러 차례 개칭을 거쳐 1982년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현재 200명에 가까운 직원과 500여 명의 입원환자가 머무르고 있다. ‘한’이 서린 섬에 점차 변화의 바람이 불게 된 것은 1945년 9월경. 한국인 김형태 원장이 부임하면서다.

그는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원장이었다. 이 시기 직원 전용 지역인 소록도 장안리에 환자의 마을이 새로 생겼다. ‘직원지대’와 ‘환자지대’의 구분을 처음으로 깬 사례였다.

1947년에는 환자들의 자치 활동을 주도하는 조직인 환자 자치회가 꾸려졌다. 현재 원생자치회의 전신이다. 소록도의 주인인 한센인들이 그동안의 억압과 통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마을운영에 관한 각종 행정에 참여하게 됐다. 1946년 9월에는 녹산중학교가 소록도에 문을 열었다.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이어 중학 과정의 교육시설이 들어선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은 점차 안정돼가던 소록도병원에 다시 암운을 드리웠다. 1950년 8월 북한의 인민군이 소록도에 들어온 이래 환자들은 육지에서의 식량 운반 등 각종 작업에 투입됐다. 환자들은 인민군가를 강제로 배우고 불러야 했다.

인민군은 감금했던 직원 11명을 소록도를 떠나기 직전에 사살했다. 한국전쟁 기간에는 북한의 한센인이 소록도에 수용되기도 했다. 북한에 진군한 우리 군이 철수 과정에 데려온 한센인들이다. 현재는 거의 모두 숨지거나 소록도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가 끝났지만, 소록도의 한센인이 인권을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1950년대 초 한국인 원장 시절에도 환자를 대상으로 한 나균 검출실험이 있었다. 환자의 가슴에 침을 꽂아 골수에서 나균을 검출하는 방식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했다. 실험 이후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거나 숨진 환자도 발생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환자들은 원장 퇴출을 요구하며 항의하기도 했다.

소록도, 구글어스 항공촬영 지도
소록도, 구글어스 항공촬영 지도, 지금은 다리가 있어 육지가 되었다.

희망의 빛은 서서히 찾아왔다. 1962년 7월 시작된 소록도 북쪽 ‘오마도 간척’ 사업은

다시 사회로 복귀하고 싶은 소록도 한센인의 꿈이 담긴 사업이다. 한센인들은 소록도에서 벗어나 벼· 보리농사를 짓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오마도에 2693m 길이의 방조제를 쌓고 바다를 메워 농지를 조성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병이 나은 한센인들이 일반 농민과 어울려 농사를 지으며 지내는 삶을 꿈꾸며 돌을 날라 바다를 메웠다. 공사 과정에 사망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2000여 명의 한센인이 고통 속에서도 꿋꿋이 작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런 꿈은 1964년 7월 무참히 무너졌다. 소록도병원 측이 주도한 오마도 간척사업의 권한이 정치적 이유로 전라남도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한센인의 의사는 무시됐다. 낮은 임금에도 참아가며 중노동을 했던 한센인들은 공사에서 손을 떼게 됐고, 그동안의 임금도 받지 못한 채 물러나야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5년 이 사업을 한센인에 대한 인권 침해라고 규정했다.

1963년 2월 이뤄진 전염병예방법 개정은 작게나마 한센인의 인권 보장 토대를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우선 강제 격리가 폐지되고 한센인이 집에서 치료받을 수 있게 됐다. 일제강점기부터 이뤄진 한센인 격리 수용제도가 40여 년 만에 허물어진 것이다. 한센인 환자의 사망 시 사체를 화장해야 한다는 규정도 폐지됐다.

1960년대 소록도 한센인의 호적과 주민등록을 복원하는 일도 이뤄졌다. 한센인은 가족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해 실제와 다른 이름을 쓰면서 주민등록을 말소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1960년대는 소록도병원이 과거 한센인 격리 목적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치료 체제를 갖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병원 직제도 총무과·의무과·보육과로 조정되고 직원의 정원이 과거에 비해 늘어 95명으로 조정됐다. 1967년부터는 환자들을 위한 수세식 화장실을 갖춘 새로운 병동이 들어섰다. 1970년대에도 오래된 병원 시설 개선작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기자는 2018년 볼리비아 선교사를 안내하여 녹동중앙교회 목사님의 도움으로 이곳 내부의 역사 유적까지 둘러봤다. 슬픈 흔적은 남았지만, 한센인들은 안정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전동 훼체어를 자가용 처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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