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장신대학교 설립자 서서평(徐舒平)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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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장신대학교 설립자 서서평(徐舒平) 선교사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2.07.25 1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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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평이 22년간의 조선에서 선교사의 생활을 하는 도중 언제나 어려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부 나누어 주고 베풀며 자기 자신은 영양실조로 삶을 마치고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유품은 강냉이 가루 2홉, 현금 7전, 반쪽 짜리 담요가 전부였습니다.
 서서평 선교사 생전 모습(왼쪽)
 서서평 선교사 생전 모습

한 여인이 말을 타고 전라도 일대를 한 달 여간 순회한 뒤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번에 만난 여성 500명 중 이름이 있는사람은 열명 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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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100 여년전) 조선 여성들은 큰 년이, 작은 년이, 개똥어멈으로 불립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글을 가르쳐 주는 것이 저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간호 선교사로 조선에 발을 내디딘 엘리자베스 쉐핑 (Elisabeth Johanna Shepping, 한국명; 서서평  徐舒平; 1880~1934)의 기록입니다. 서서평은 독일 출신의 미국 선교사로 한국 최초의 ‘간호 선교사’로 파견되어 왔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가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전염병으로 병자가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눈과 마음을 뗄 수 없었던 그녀는 서양식 삶을 고수하던 여러 선교사와 달리 조선말을 익혀 '서서평'이라 이름 짓고, 한복을 입었으며 된장국을 먹으며 헐벗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선교사에게 주어진 하루 식비는 3원, 그러나 서서평은 10전으로 허기를 채우고 나머지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습니다. (1원은100전)

걸인들을 데려와 씻기고,옷을 사 입히는가 하면,  환자가 버린아이를 수양 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데려다 키운 아이가 14명, 아이를 낳지 못해(당시는 흔한 일) 쫓겨나거나  오갈데 없는 여인 38명도 거두어  보살폈습니다.

한번은 병원 앞에 버려진 아기를 어느 집에 맡겼는데, 잘 키우겠다는 약속과 달리 술 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보고 그 동안의 양육비를 주고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서서평이 광주에 한국최초의 신학교인 이일학교(裡一學敎; 1961년 전주로 이전하고 한일장신 대학교 개명)와 조선 간호부회(대한 간호협회 전신)를 세운 것도 이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서 였습니다.

조선에서 이렇게 헌신하다 휴가를 받아 잠시 미국에 돌아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 고된 생활에 찌든 딸을 보고 "몰골이 부끄러우니 돌아가라!" 하며 매몰차게 외면했습니다.

서서평의 유물 강냉이 가루 2홉, 현금 7전, 반쪽짜리 담요... 

서서평이 22년간의 조선에서 선교사의 생활을 하는 도중 언제나 어려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부 나누어 주고 베풀며 자기 자신은 영양실조로 삶을 마치고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유품의 전부였습니다.

거적떼기를 덮고 자는 사람에게 그의 담요 반쪽을 찢어주고, 남은 반쪽으로 가냘픈 몸을 가린 채 이 땅의 삶을 그렇게 마쳤습니다.

그의 장례 행렬을 뒤따르던 천여명은 통곡하며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
 
그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오늘까지도 서서평이 묻힌 광주광역시 양림동 뒷동산에는 그의 참사랑과 헌신을 추억하는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침대 맡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답니다.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 (Not Success, But serve)”

서서평은 1880년 9월 26일 독일 비스바덴에서 출생. ​어머니는 안나 쉐핑(Anna Schepping,) 3세일 때 어머니가 미국 뉴욕으로 홀로 이민가고, ​조부모에게맡겨진다.​

​할아버지는 안드레아스 쉐핑(Andreas Schepping), ​할머니는 엘리자베스 화버(Elisabeth Faber). 9세에 할머니를 잃고, 서서평은 ​주소 적힌 쪽지 한 장을 들고엄마 찾아 미국으로 떠난다.​

​가톨릭 미션 스쿨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성마가병원 간호전문학교를 졸업한다.​

​뉴욕시립병원 실습 중 동료 간호사를 따라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개신교로의 전향.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간호전문학교 졸업 후 브루클린주 이시병원에서 근무한다.

1904년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 ​(Bible Teacher Training School)의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 ​(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1년간 봉사활동을 했다.

1911년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를 졸업하고, ​동료 선교사로부터 조선에 환자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길에 버려질 정도라서 의료 봉사가 절실하다는 말을 듣고, ​조선(한국)선교를 지원한다.​

1912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 모집에 지원하여 간호선교사로 파송을 받는다.

어머니의 신앙인 가톨릭을 따르지 않고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에 집에서 쫒겨 났다. ​어머니에게 모두 세 차례 버림당한다. ​어린 시절이 불우했지만 바람, 햇살, 숲과 함께 자랐다고 고백했다. ​빗속에서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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