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의 헌신’ 어느 목사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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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의 헌신’ 어느 목사의 고백
  • 박동현 기자
  • 승인 2020.02.05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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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얻어야 하는데 수중에 얼마 되지 않았다. 교회 집사님들이 집 얻으라고 수천만 원을 그냥 주셨다 처형이 수천만 원을 빌려주셨다. 18평형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큰 방에서 우리 부부와 작은 애가 쓰고 작은 방은 큰 애가 썼다.
​서경기 목사와 그의 아내(사모)​
​서경기 목사와 그의 아내(사모)​

나의 교육전도사(파트타임) 시절 사례는 월 19만원이었다. 신대원(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학년 1학기 때는 어머니께서 등록금을 주셨고, 2학기 때는 학교에서 장학금 일부를 받았고, 그 후에는 장학금을 받지 못해서 염치없지만 아내를 의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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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2학년 5월에 결혼했으니 3학기 등록금은 교사인 아내의 수고에 의지했다. 이후 계속 아내의 노고에 의지하며 지냈다. 신대원를 졸업한 후 수개월 간 공장에서 일할 때 월급은 30만원-40만원 사이였다. 잔업에 따라서 차이가 났다.

가장으로 가정을 책임진다면 기본적인 생활비가 될 수 없는 소액이었다. 1년 후 영등포산업선교회 간사로 일할 때는 30만 원을 받았다. 용돈으로도 부족했다. 밥값을 내고 노동자들과 몇 번 모이면(식사) 늘 부족했다. 아내에게 용돈을 받아야 했다.

93년에 갈릴리교회(통합측 영등포노회)에 전임전도사로 가서 첫 달에 받은 사례는 70만원이 조금 넘었다. 그 때 얼마나 많게 느껴졌는지. 다른 이와 비교하면 적은데도 수년 간 30만 원대를 받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아내에게 조금 면목이 섰다.

캄보디아 선교사로 파송되어 기술학교 사역할 때는 최소 비용으로 생활했다. 1997년 5월에 파송을 받았을 때, 월 1800달러를 보내주었다. 이게 전부였다. 상여금도 없었고 의료지원비도 없었다.

12월에 이른 바 I M F(아이엠에프)사태가 났을 때 우리는 스스로 1/3을 감액했다. 파송한 단체와 고통을 분담하려고 했다. 생활비 쓰고 큰 애 학교에 보내면 생활이 빠듯 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본부에 상여금 한 달 치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걸로 휴가 중에 쉬는 데 사용했다. 기숙사 있는 건물에서 지내다 기숙사 없는 건물로 이사하면서 밖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에 집 임대비 200불을 추가로 달라고 해서 1400불로 지냈다.

기숙사에서도 그렇고 나와서도 그렇고 4식구가 방 한 칸에서 지냈다.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오손도손 지냈다. 돈 한 푼 없이 귀국했다. 캄보디아에서도 살았는데 한국에서 살지 못할 리 없다고 믿었다.

우선 거처를 어머니 집으로 정했다. 4식구가 또 방 한 칸에서 지냈다. 수개월을 지내다 교회 사택으로 들어갔다. 아내는 다시 복직해서 가장이 되었다. 갈릴리교회에서 3년 조금 넘게 사역을 하다가 대책 없이 사임하게 되었다.

집을 얻어야 하는데 수중에 얼마 되지 않았다. 교회 집사님들이 집 얻으라고 수천만 원을 그냥 주셨다 처형이 수천만 원을 빌려주셨다. 18평형 아파트를 전세로 얻었다. 큰 방에서 우리 부부와 작은 애가 쓰고 작은 방은 큰 애가 썼다.

작은 집에서 지내니 생활이 불편했고, 그래서 갈등도 자주 생겼다. 공간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 한아봉사회에서 일하였는데 처음 5년간은 월 90만원을 받았다.

상여금도 없이 이것이 전부였다. 이사님(목사) 한 분이 사례가 너무 적으니 자신이 담임목사로 시무하시는 교회에서 초등부를 맡으라 하시면서 기회를 주셨다 월 60만원을 주셨다. 그래서 8개월 주일마다 초등부 3-4학년에게 설교를 했다. 이 당시 사례비는 적었지만 일하는 보람은 무척 컸다.

사무총장님이 은퇴하신 후, 그 자리를 맡으면서 비로소 사례를 ‘제대로’ 받았다. 결혼하여 처음 면목이 섰다. 이때 나이 쉰살이었다. 작은 아파트에서 살다가 다가구주택 25평형으로 이사했다. 방이 3개여서 아이들이 자기 방을 가질 수 있었다. 얼마나 좋아하던지. 이 집에서 무려 7년을 살았다. 그리고 교회 집사님 집 2층으로 이사했다.

집사님은 같이 사는 동안 집세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가 살고 싶은 기간만큼 살라고 했다. 이렇게 살다가 대전으로 내려왔다. 아내는 학교교사를 사임했다. 처음으로 내 사례비로 생활하게 되었다. 제대로 면목이 섰다. 지금까지 우리 가정의 생활을 책임진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서경기 목사 페이스 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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